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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레네 시몬의 선택 (막 15: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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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도리언'이란, 로마 총독의 관저를 의미하는데 그 곳엔 200-600여명의 로마의 정예 군사들이 관저를 지키면서 주둔하고 있는 곳입니다. 빌라도는 군중들의 압력을 받고 결국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굴욕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주니라' 너무나 정치적인 선택이었지만 빌라도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는지 모릅니다.

군병들은 총독 관저에서 곧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떠날 예수 그리스도를 희롱하는 일에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자색 옷을 입혔고,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자색이란 정치적으로는 왕이, 종교적으로는 비숍이 입을 수 있는 권위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놀리면서 그들은 자색 옷과 가시 면류관으로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침을 뱉었고, 주님을 채찍으로 때리다가도 엎드려 절하면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라며 예의를 가장한 모독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20절에 보면, 희롱을 마친 군병들은 드디어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게하고는 골고다로 향하도록 했습니다. 십자가를 성전 안팍에서 늘 보아온 우리는 십자가의 이미지가 친근하지만 사실은 끔찍한 사형 틀입니다. 너무나 끔찍해서 로마는 자국의 시민권을 가진 이들에겐 적용하지 않고, 로마 이외의 이방인들에게만 적용할 정도였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의 두 팔과 두 발에 큼직한 대못을 박고서 매달아 놓아 피를 흘리며 말려 죽는 이 끔찍한 십자가형이 로마 시민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 달리시려 주님께서는 골고다 언덕을 십자가를 메고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 몰려들었고, 그리 넓지 않은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골목길, 우리는 그 길을 고난의 길, 눈물의 길이라는 '비아 돌로로사'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로마 군병의 채찍을 맞으면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힘겹게 올라가셨지만 자주 쓰러지셨습니다. 채찍으로 일으키곤 했던 로마 군병들은 주님께서 계속 십자가를 지고 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주변에서 구경하던 건장한 한 흑인 청년을 붙잡게 됩니다. 그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아프리카 북부 지역의 사람인 그는 모처럼 예루살렘에 왔다가 큰 구경거리를 만났는데, 우리말로 재수 없이 걸려든 것이지요. 좀 더 가까이서 구경해 보고 싶어서 제일 앞자리로 밀고 나아갔다가 그만 로마 군병의 눈에 띄이게 된 것입니다. 적어도 십자가를 대신 질 정도라면 구레네 시몬의 체격은 꽤 건장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성경 2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구경 중에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 여기서 가장 강조되는 표현은 '억지로'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사명을 말할 때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어렵고 힘든 길을 말할 때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동료들 중에서 누구도 나서지 않는 어려움과 수고를 내가 담당하겠다는 말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늘 말씀하시기를 주의 일을 감당할 때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하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선진국가일수록 자원봉사자들이 많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도 모든 일들이 자원해서 되어진다고 하면 그것은 그 교회의 성숙도와 건강도가 아주 높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할 수 만 있다면 언제나 자원함으로 주님의 일을 감당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21절에 보면, 구레네 시몬은 주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마음과는 상관없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불행하다고 생각했고 운이 없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는 머리를 썼습니다. '내가 이 십자가를 질 이유가 없다' 결국 그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을 했을 거예요. 소위 머리를 굴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십자가를 벗을 수 있을까?' 결국 그는 십자가를 팽개치고 골목으로 달아나버렸고 로마의 군병도 그를 붙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로마서 16장 13절에 보면 '주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나의 어머니임이라' 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루포는 구레네 시몬의 두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 중 하나입니다. 두 아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까지 주의 종 바울을 위하여 좋은 믿음의 동역자로서 희생하며 수고했다고 바울 사도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온갖 머리를 굴려 자기에게 주어진 그 십자가를 팽개치는데 성공했던 구레네 시몬, 그런 그가 나중에는 자신 뿐 아니라 온 가족이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거는 진정한 십자가를 지는 가족이 된 줄로 믿습니다. 역전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할렐루야 !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다 보면 자원해서 하는 일도 있지만 때로는 주님께서 강권해서 사명을 맡기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불평하지요. '사실 나는 할 마음이 없었는데 목사님이 시켜서 하는 거야. 알고나 있어?' 그러면서 다른 사람에게 불평 조로 이야기하지요. '나는 아닌데 목사님이 시켜서 임명해서 하는 거야' 사실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별로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아요. '저 분이 지금 기쁨으로 주님의 일을 하고 있지 않구나' 마음이 씁쓸하지요.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하는 것이 내가 지금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변명이 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그렇게 지혜로운 대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자원하기를 원하고, 기쁨으로 하기를 원하지만 주님의 일이 어디 그렇게만 됩니까?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고 또 잡아가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폭행자요, 훼방자였던 사울,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메섹 언덕에서 강권적으로 뒤집어주셨어요. 주님을 만나서 누구시냐고 물었을 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서 그는 너무 헷갈렸습니다. '도대체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는 무엇인가? 나는 하나님에 대하여 열심이고, 하나님을 위하여 예수를 죽이고, 예수의 사람들을 죽이러 가는데 도대체 나를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는 그분이 하나님의 모습으로 자기에게 다가오다니...' 그는 굉장히 번민스러웠고, 아라비아 사막에 가서 3년동안 퇴수하면서 그 부분에 대한 정리를 하게 되었어요. 예수는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곧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그는 깨닫게 되었고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나바를 통해서 안디옥으로 초대를 받고 안디옥 교회에서 교회를 섬기면서 성령 충만한 주님의 일꾼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줄로 믿습니다.

살인자가 변해서 순교자가 되었다는 말이지요. 핍박자가 변해서 전도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세상적인 논리로 설명할 수 있어요? 우리는 이러한 변화를 주님의 강권하신 급진적인 변화라고 말합니다. 늘 점진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한걸음씩 변화되고 새로워지는 삶들도 중요하지만 때때로 주님은 당신의 필요에 의해서 강권적으로 삶을 변화시킨다는 말입니다. 때때로 주님이 필요하실 때에 그들을 불러서 '내가 너에게 이 일을 맡기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도 그에게 불렸을 때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입니다. 내가 이 일을 맡기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주님은 그의 입술을 숯불로 지져서라도 내가 너를 정결케 했으니 이 일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때로 주님은 당신의 사역을 위해서 강권적으로 십자가를 지게 하실 때가 있다는 거예요.

저는 오늘 1부 예배시간에 우리 평안의교회가 개척한 후 3년만에 땅을 사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이야기를 간증했어요. 40명이 채 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땅을 준비하라고 하는 말씀을 하셨고, 저는 한달 내내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올해의 계획에는 땅을 사는 계획은 없습니다. 땅을 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 3년만에 땅을 샀다고, 그래서 능력있는 목사라고 칭찬 받지 않아도 좋으니까 올해는 땅 살 기회가 없습니다. 40여명 가까운 성도들를 잘 섬기는 일이 올해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새벽마다 계속해서 땅을 준비하라고 하는 주님의 강권하심은 결국 이것이 나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강건하심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또 하나의 고민이 생겼지요. 땅을 찾는다면 구입해야 할텐데 구입할 능력이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강권하심에 일단 순종하기로 했어요. 한달 동안 버티다가 결국은 '하나님, 그러면 일주일 동안만 땅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월요일부터 나섰습니다. 모든 역곡동, 괴안동의 부동산은 다 다녀보았어요. '땅이 나온 곳이 있습니까?' '없는데요' '교회를 지을 만한 땅이 나온 곳이 있습니까?' '없는데요' 금요일 저녁까지 땅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아직 우리한테는 시기상조인데...' 하지만 일주일 동안 약속을 했기 때문에 토요일 오전까지는 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토요일 아침에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집을 나섰어요.

다 부동산을 다녀보았기 때문에 안 다녀 본 곳이 없어요. 혹시나 하고 길을 나섰는데 한 가게 모퉁이에 조그마하게 한 아주머니가 용돈이나 벌려고 하는 아주 작은 부동산이 하나 있었어요. 그냥 지나쳤던 곳입니다. '이제 저기 밖에 갈 곳이 없겠다' 싶어서 문을 열고 들어가서 물었습니다. '땅 나온 거 있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 아주머니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좋은 땅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보자고 했더니 바로 여러분이 앉아계신 이 자리 100평이 사거리 모퉁이에 나와있었어요. 물론 그때는 이 주변이 전부 산이었고 지적도에만 그 산 모퉁이 100평이 나와 있었던 것입니다. 평당 100만원씩이었고 그것을 사기 위해서는 1억원이 필요했어요.

돌아와서 주일날 장로님을 만났습니다. 그 당시 집사로서 재무부 부장이었던 장로님께, '얼마 남아있나요?' '현재까지 35만원이 있습니다' 물론 그 돈도 남아있는 돈은 아니지요. 곧 쓰면 모자랄 돈입니다. 등 하나를 아끼기 위해서 불을 끄고 예배를 드렸던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1억이라고 하는 돈은 너무나도 크게 보였지요. 또 하나의 근심이 생겼습니다. '이 1억원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그러면서 저에게 최근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어요.

역곡역 모퉁이에 한 교회가 개척되어지고 1년만에 100명이 넘었던 교회가 있었어요. 그 목사님은 너무나도 기쁘고 흥분해서 1년이 되던 그 해에 성도들에게 '우리 1년만에 100명을 돌파했는데 건축하십시다. 땅을 사십시다' 이러면서 건축 헌금 봉투를 다 돌렸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다음 주일에 교인들이 거의 나오지 않았대요.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 교회는 그해 성탄절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문을 닫았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500m도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곳에서 일어났던 일을 제가 듣고 있었기 때문에 제게는 너무 부담이 되었어요.

'40명 겨우 되는, 지금 한창 불이 붙어있는 우리 평안의교회가 이 일로 인해서 끝장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기도하면서 결론을 내었습니다. '이것이 목사의 공명심이 아니라면 이것이 하나님이 강권하시는 일이라면 하나님의 종으로서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저는 주일예배 시간에 말씀을 드렸어요. '90%가 부담을 갖고 교회를 떠나더라도 저는 이 일을 하겠습니다' 정말 그때는 비장한 각오로 한 거예요. 그랬는데 8,000만원으로 금액이 조정이 되어지고 3달동안 계약금과 중도금, 잔금을 치르는데 하나님께서는 계약금조차도 없는 우리에게 잔금을 치르는 날짜를 당겨주셔서 하루도 어기지 않고 잔금을 지불한 줄로 믿습니다. 더 감사한 일은 그 일을 하는 동안 한 가정도 떠나지 않은 줄 믿습니다.

한 가정이 여수로 남편이 발령을 받았는데 할 수 없이 그 부부가 여수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그 부인 집사님이 얼마나 마음의 배려가 크신지 떠나야 되는데 혹시 지금 떠나면 그것으로 인해서 부담을 갖고 떠난다고 생각이 되고 다른 성도에게 지장이 될까봐 남편 먼저 여수로 보내고 자신은 대지가 완료될 때까지 교회에서 그분은 떠나지 않고 잔금을 치르고 구입을 완료한 후에 자신의 그 얘기를 했어요. '사실은 남편이 여수로 발력을 받아서 그쪽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제가 몇 달을 혼자서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교회가 대지를 구입하고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을 보면서 기쁨으로 저는 여수로 내려갑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몰라요.

사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다 보면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바라는 것보다는 주님이 강권하실 때가 있어요. 사실 그때 그 일을 믿음으로 우리가 감당하지 못했다면 오늘의 평안의교회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일 이후에 저와 성도들은 마음이 담대해졌어요. 어떤 일이든지 주님이 강권하신다면 순종한다고 하는 용기와 믿음이 생긴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명들은 이제 일도 아니예요.

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할 때 그때도 계약금도 없이 일을 했어요. 왜냐하면 저도 계획을 잘하는 치밀한 계획성을 가진 사람이지만 이 선교에 관해서는 우선적으로 선교를 우선적으로 하는 그런 사역이다 보니까 건축을 위해서 돈을 모아두는 그런 목회는 하지 않았습니다. 건축이 필요하게 되어졌을 때 우리는 1년 동안 건축을 하면서 매달 현금으로 1억원씩을 헌금을 해야 했지만 우리 성도들은 1년 동안 94년 6월부터 95년 6월까지 우리는 정확하게 건축 헌금을 건축 시공자에게 전달해 주면서도 우리는 교회 예산을 한 푼도 줄이지 않고 선교와 교육을 다 감당한 줄로 믿습니다.

이제 큰 일은 일도 아니예요. 한번 믿음의 역사를 체험하고 나니까 이제는 우리에게 담대함이 생겼어요. '아, 하나님의 일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도 있지만 그 분이 원하실 때에 하는 것도 중요하구나' 할렐루야! 강권하실 때 그 강권하심에 응답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오늘 구레네 시몬은 구경 왔다가 억지로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습니다. 대신 지고 난 그의 마음속에는 '어떻게 하면 이 십자가를 팽개칠 수 있을까?'를 고민했고, 결국 그는 팽개칠 수 있었어요. 달아날 수 있었어요. 사명의 자리에서 멀리 갈 수 있었어요. 성공했다고, 해방되었다고 기분 좋게 생각했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을 가지고 계실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구레네 시몬은 이렇게 주님과 인연이 된 관계로 후에는 주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줄로 믿습니다. 교회에 오실 때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나의 주여,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교회에 오는 분도 계시겠지만 많은 경우에 친구 따라서 교회에 구경 삼아 오신 분도 있고, 또 교회 예배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 스포츠 행사나 여러 가지 교회 행사를 통해서 우리 중고등부 같으면 이번 토요일에 있을 '샤론의 밤'을 통해서 친구들을 초청하면 교회 한번 와보지 않은 친구들이 친구가 그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한다고 하는 것, 그것에 의해서 따라왔다가 교회와 첫 걸음을 하게 되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져서 주님의 사람이 되는 계기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수없이 다양한 여러 모양의 일을 통해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주님과 만날 수 있는 계기를 주어야 됩니다. 어느 때는 부흥회라고 하는 말씀과 기도와 찬양의 자리를 통해서, 어느 때는 밖에서 스포츠를 통해서 전혀 주님과는 상관없는 일 같지만 그곳에서 주님의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여러 모양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여러 모양이 되었다고 그랬습니다.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그는 여러 모양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던 유일한 이유는 아무쪼록 한 영혼이라도 구원코자함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스타일이 있지요. 여러분의 삶의 이미지가 있지요. 하지만 그 이미지조차도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라면 바꿀 수 있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나는 이런 이미지인데... 나는 좀 지적이고 세련되고 그런 내가 저 낮은 그런 그룹의 사람들과 어떻게 섞이나?' 그렇습니까? '나는 또 못 배웠는데, 가보니까 다 대학 나온 사람들만 있던데 부담스러워서 어떻게 가나..' 그렇습니까? 우리가 주의 공동체에 포함되어지고 동참해야 할 유일하고 분명한 이유 하나 '한 영혼이라도 구원코자 함이라'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라면 낮출 수도 있고 또 높아질 수도 있어요. 아직도 내 성격, 내 스타일에 맞는 사람, 맞는 공동체를 찾아다닌다고 하면 아마 그는 주님 오시는 날까지도 어려울 거예요.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모양으로라도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찾고 계십니다.

지금 이 구레네 시몬은 참으로 재수 없는 날이라고 정말로 자기에게 있어서는 불행한 날이라고 생각을 했을 지 모르지만 그 일이 그를 새롭게 만들어 주었어요. 그가 변화됨으로 그의 아내와 두 아들도 변화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6장에서 정말로 자기의 사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동역자들을 설명하면서 '주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를 문안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런 이유없이 주님의 사람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건 없이 여러분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라는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여성 운전자가 샌프란시스코의 다리를 지나가면서 다리에 있는 톨게이트에서 돈을 주고 표를 끊는데 7장을 끊습니다. 그리고 그 직원에게 '한장은 제 것이고, 6장은 저 뒤에 오는 사람들 것입니다' 그러고는 지나갔습니다. 뒤에 오는 사람이 돈을 내려고 하니까 직원이 말합니다. '저 앞에 가는 사람이 당신의 표를 끊어주었습니다' '저 모르는 사람인데요' '그건 전 잘 모르겠고 하여간 그분이 당신 표를 끊어주었습니다' 다음 사람이 또 와서 돈을 내려고 합니다. '저 앞에 앞에 가는 사람이 당신을 위해서 표를 끊어주었어요' 그렇게 6명의 사람들이 기분좋게 톨게이트를 지나갔습니다.

그 여성 운전자가 그렇게 일을 한 것은 어느날 자기 친구 집에 갔다가 냉장고에 붙어있는 작은 글을 본 이후였어요. 그 냉장고에는 이런 글이 붙어 있었습니다. '때로 너의 인생에서 엉뚱한 친절을 베풀어 봐라' 아무런 이해 관계 없이 친절을 베푸는 것이지요. 그들은 정말 엉뚱한 친절을 받았지만 그날 하루 너무나 기분 좋은 하루가 되었어요.

우리는 아는 사람에게 친절 베푸는 일은 익숙합니다. 우리 선교회원, 우리 속회원, 우리 교회 성도, 우리는 그런 분들에게는 친절하고 또 사랑을 베푸는데 어느 정도는 익숙합니다. 하지만 전혀 관계없는 이들에게 사랑을 베푼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하지만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는 지 몰라요.

주님께서 빌라도의 정치적인 선택으로 인해서 십자가를 지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비아돌로로사' 골고다의 길, 고난의 길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십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과의 만남을 이루었어요. 그때는 대화도 없었고, 그때는 어떠한 다른 내용도 없었지만 그는 그 일로 인해서 십자가의 주님이 누구인가를 알았고 그는 스스로 십자가를 위해서 평생을 살게 된 줄로 믿습니다.

어느 철도원의 이야기가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그는 철교 입구에서 기차가 원만하게 지나가도록 돕는 일을 하고 때때로 강에서 배가 지나가면 철교 중간을 기아로 들어 올려서 배가 지나가도록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자기 아들이 찾아와서 기분좋게 자기 아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있었어요. 조금 후에 배가 지나갈 그런 시간이 되어져서 그는 기아로 배를 지나가게 하기 위해서 다리를 들어 올렸습니다. 아직 배는 와있지 않은 상태인데 점심을 아들과 맛있게 먹는 중에 기적소리를 들었어요. 이게 웬일인가? 멀리서 기차가 고속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깜짝 놀라서 그가 그 다리를 내리기 위해서 뛰어가는데 아들이 쫓아왔습니다.

불행하게도 아들의 다리가 하나가 기어에 걸렸습니다. 아버지는 짧은 시간동안 많은 생각을 합니다. 지금 기아를 멈추고 아들을 건질 것인가? 아니면 400 여명의 승객을 태운 기차를 강으로 추락시킬 것인가? 결국 아버지는 기어를 풀고 올렸던 다리를 내려놓았습니다. 기차는 아슬아슬하게 철교를 지나가서 400명의 목숨을 구했어요. 아들은 처참히 기아에 끼어서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그 아들을 바라보던 아버지가 지나가는 기차를 보니까 너무나도 놀라웠어요. 기차 안에는 우아하게 입은 남녀들이 식당에서 칼과 포크를 들고 식사를 하고 있었어요. 때가 점심 때였어요. 자기 아들 또래의 어린아이들이 예쁜 옷을 입고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스푼으로 떠먹고 있는 모습이 보였어요. 하지만 그 어른이나 그 아이들이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복한 모습으로 그 기차는 지나가고 있었어요.

사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수많은 구경꾼들,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그냥 행복해 보였어요. '오늘 구경거리 하나 괜찮은 거 생겼다'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다가 골고다에서 쓰러지시고, 십자가를 지시다가 채찍을 맞아도 그들에게는 단지 흥미거리이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아들의 생명을 담보해서 400명의 목숨을 건진 것처럼 그리고 그 사실이 나중에 알려지면서 그 열차에 탔던 사람들은 가슴을 쳤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은 것은 그 아이, 그 아이를 희생시킨 아버지 때문이구나'

그때는 우리가 몰랐지만 그때는 억지로 우리에게 사명을 준다고, 그때는 내가 부담스러운 이 일을 내게 맡긴다고 짜증내고 화를 내었는데 나중에 그 십자가를 지시는 주님을 알고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나니까 이제는 지나갈 수가 없는 것이지요. '주님, 이제는 그 십자가를 나도 지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알면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사명 중에 때때로 주님께서 강권하시는 사명들이 여러분들을 힘들게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인하여 주님은 역전의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내와 자녀들까지 주의 동역자가 되고 주안에서 참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주님의 일꾼이 되는 그런 축복을 누리게 되는 줄 믿습니다. 이 놀라운 주님의 은혜, 이 역전의 감격을 맛보는 여러분들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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