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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 (막 16: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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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8장19절-20절은 '주님의 지상 명령'이라고 일컫는 말씀이 있는데, 오늘 본문 15절은 그 지상명령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 이것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주님의 명령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이 복음전파 명령을 하신 내용을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면, 크게 2가지로 구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장소입니다. '온 천하에 다니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역에 대한 것이지요.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는 모두 다릅니다. 직장이든지 사업현장이든지, 가정이든지 동네이든지 모든 삶의 자리가 다양합니다. 그러나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일을 하기 위하여 직장이 동료들이나 업무와 관계되는 사람들을 만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그 장소가 복음 증거의 장소가 되어야 하고, 이웃을 만나는 사회활동 그 자체가 복음증거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때때로 '오늘은 전도대회를 하는 날입니다'해서 전도지나 주보를 들고 1-2시간씩 전도하는 경우가 있지요. 그때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오늘 행사가 끝나고 나면 '이제 전도는 끝났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 오해때문에 저는 전도대회라는 형식의 '행사'는 지금까지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도 형식적이고 행사적인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지요.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전도의 영역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을 모두 포함하는 '삶의 자리' 그 자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상명령의 두 번째 의미를 보면, '만민에게.....' 라고 하셨듯이 이것은 복음 전파의 대상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이 중요합니다. 전도란 관계를 만들어 가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관계를 통해서 전도라는 열매가 거두어지게 됩니다. 최근에 전도된 사람들을 조사했을 때 놀랍게도 85%의 사람이 아는 사람에 의해서 전도가 되어졌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통계가 나와 관계를 통한 전도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일깨워 주었습니다.

길거리에서 아무도 모르는 사람에게 전도지를 주면서 '예수 믿으세요'해서 교회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말이지요. 부흥회를 한다고 신문지에다가 전단지를 수만장을 넣어 뿌려도 전단지 보고서 은혜받으러 온사람 손들라고 하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진정으로 전도는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줄 믿습니다. 우물가의 여인이 주님을 찾아와 만나 말씀을 들었을 때에 변화되었듯이, 니고데모가 밤중에라도 주님을 만나 거듭남의 비밀을 듣게 되었을때 제자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삶에 다양한 자리에서 이웃들과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인격적인 관계를 만들어야 하고, 신뢰받는 관계를 만들어야 하고, 인정받고 인정하는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예수 믿읍시다. 교회 가십시다' 했을 때 비로서 그의 마음은 움직이는 거예요. 하지만 자신이 인정할 수 없고 신뢰할 수 없다고 여긴 사람이 예수 믿자며 아무리 좋은 전도지를 내보인다고 한들 그들은 끄떡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전도하라면 디자인 좋고 칼라플한 전도지가 없다며 이런 것만 탓하는 사람들이 있읍니다만 사실 전도지가 시원치 않아서 전도가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 방법과 종류는 개선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전도에 관한한 핵심은 아니예요.

오늘 주님께서 주신 지상 명령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는 말씀은 대상이 누구든지, 장소가 어디든지 전도의 사명은 중단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요즘은 빌라가 많이 건축됩니다만 전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나 의미있는 일이지요. 그들은 빌라가 몇 세대가 들어오는지, 언제 준공이 되며 언제 입주가 되는지 긍금해서 집에 앉아 있을 수 없어 입주도 되기 전에 입주 사무실에 가서 물어봅니다. '얼마나 입주가 되었나요? 언제쯤 입주가 끝나나요?'

관계를 만들어 가려고 고민하고 애쓰는 사람에게는 전도의 열매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자기 집 옆에 아무리 큰 아파트나 빌라가 생겨도 한번 들여다보지도 않습니다. 심지어는 우편함에 주보나 전도지 조차 꽂아놓지 않아요. 그렇게 한 해를 소비하듯 보내지요. 사실 생각해 보면 주님 앞에 너무 심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원하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그냥 등떠밀듯 맨손으로 세상에 보내신 것은 아닙니다. 17-18절에 보면, 4가지의 중요한 약속을 해주셨어요. 첫째는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입니다.' 둘째는 '새 방언을 말하는 은사입니다' 셋째는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는 체험입니다.' 네 번째는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낳는 치유의 능력입니다. 주님은 복음증거를 위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제자들에게 믿는 자에게 이러한 표적이 따르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전도의 사명을 회복하고 전도자로서 세상을 향해 나갈 때 적어도 이런 4-5가지의 주님 약속하신 하나님 자녀의 권세와 능력을 우리가 나타내어야 하겠다는 거지요. 그런데 이 말씀은 또 일부 사람들에게 제일 오해가 되고 있고, 왜곡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야, 성경보니까 뱀을 집어도 괜찮고, 독을 마셔도 괜찮다더라. 야, 한번 먹어보자' 그래서 농약을 마시면 어떻게 되겠어요? 죽어야지요. 독사를 만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독에 물려서 몇 시간 못 가서 죽겠지요. 어떻게 보면 순수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알고 보면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아주 불신앙적인 행동이지요.

자, 우리는 왜 주님께서 지금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만민에게 천하에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면서 이런 중요한 말씀을 약속했을까? 그 배경을 우리는 먼저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생각합니다.

1세기 초대교회 상황은 예수 믿는다고 하는 것은 참 부담스럽고 어려운 일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결심과 그리고 사람들에게 내가 예수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알린다고 하는 것은 적게는 모든 사회적인 삶의 활동에서 제외됨을 의미합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그 사업의 그 조합에서 제외 당하는 거예요. 길드 조합에서 배제 당하는 겁니다. '당신은 더 이상 우리 조합원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물건을 공급받을 수도 없고, 물건을 내다 팔 수도 없어요. 만약에 학교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드러났을 때 그는 더 이상 학교에서 자유롭게 공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중동지역의 모슬렘 국가들은 대외적으로는 우리도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슬람을 믿지 않으면 거의 사회활동은 어렵지요. 신분증에다가 종교란을 만들어서 모슬렘이냐? 크리스챤이냐? 그런 것들을 기록하게 만드는데 그 신분증에 크리스챤이라고 되어있으면 취직도 안되고, 학교에 입학도 되지 않아요. 대외적으로는 종교에 자유가 있다고 말하지만 결국은 이슬람이 아니고서는 모든 삶에서 완전히 제외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21세기에도 그런 국가가 있는데 1세기 로마가 지배하는 당시에 황제를 숭배하고 수많은 우상을 숭배하는 그러한 시대에 예수의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런 의미에서 전도를 한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예수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일이 되는 거예요. 그 말은 '네가 전도하겠느냐?'라는 말은 '너희 기득권을 포기할 수 있겠느냐?'라는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직장이나 개인적인 일 때문에 주의 일을 놓는 사람이 있어요. 젊은 중고, 청년 대학부들이 예배 참석을 잘 못합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학원에서 주일날에도 오라고 해서 특강받아야 하기 때문이랍니다. 어른만 도전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도 그런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갈등하고 고민합니다. 그럴 때 부모라도 '애, 너 공부도 중요하지만 주일날은 예배 드리러 가는 것이 좋겠다. 엄마, 아빠 생각에는 주일날 예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렇게 지원해 주면 이 아이가 신앙적인 결정을 하거나 결단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것입니다.

그러나 '애, 평생 믿을 건데 중3 때, 고3 때 공부 안하면 언제 하느냐 면서 다그친다면 곤란하겠지요. 오히려 믿는 부모가 그쯤되면 말도 못하는 것이지요. 눈 앞의 성적이 더 급하다고 생각하고 신앙적이고 인격적인 부분을 소홀히 한다면 희망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그런 부분에 철이 좀 든 부모라면 이 아이를 원만한 인격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키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음을 알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나아가서 복음을 전파하라.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네가 가다가 군인을 만나거든 군인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네가 가다가 너의 거래처 사람을 만나거든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여러분, 사업하는 분들은 여러분 사업장에 교회 주보와 전도지를 쌓아놓고 여러분이 거래를 하면서 상담을 다하고, 물건을 팔고 나서 마지막 '어떻게 하면 이 사람에게 전도지를 줄 수 있는 좋은 분위기를 만들까?' 고민하고 기도하십니까? 어떤 사람은 그런 것을 부담스러워해요.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손님 떨어질까봐 그렇답니다. 그정도 자신이 없으면 사업을 하지 말아야되는 것 아닌지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가지고 사업을 하겠다고 말하면서 그 정도의 자신이 없으면 하지 말아요. 구두를 닦아도 '아저씨, 아저씨 구두 참 멋있네요. 제가요, 좋은 선물 하나를 드리고 싶은데요' 그러면서 구두를 닦으면서도 구두 닦는 분에게 전도해서 그 교회에서 전도왕 된 사람도 있어요. 중요한 것은 많이 배우고 높은 지위에 있어야만 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내가 손해 볼 마음을 가지고, 희생할 마음을 가지고 주의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열정을 가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4-5가지의 특별한 권세를 주신 이유는 당신의 제자들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할 때에 그들에게 어려움이 닥칠 것은 손바닥 보듯이 뻔합니다. 불 보듯이 뻔한 거예요. 그러면 피해야 되느냐? 포기해야 되느냐?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말씀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고자 하는 전도의 열정을 가진 당신의 제자들에게 그 말씀이 실현되도록 주님께서 뒷받침해주겠다는 거예요. 당신의 제자들이 세상에서 실족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도록 권세를 주시겠다는 거예요.

그 권세의 첫째는 전도 중에 많은 방해를 받는 사탄 마귀를 대할 때이지요.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 사도가 빌립보에서 루디아를 만난 이후에 복음의 문을 열어주셨고, 그리고 기도하러 가다가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났습니다. 그 여종은 귀신이 들린 것으로 인해서 주인에게 점을 쳐주고 주인을 유희롭게 하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정말 그 여종이 불쌍히 여겨졌어요. 사도 바울이 그 여성을 향해서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와라' 그 여종을 사로잡고 있는 사탄 마귀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나오기를 선포했을 때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16장 18절 '귀신이 즉시 나가니라' 귀신 쫓는 권세를 주신줄로 믿습니다.

전도하다 보면 문화적인 장벽도 생깁니다. 언어의 장벽도 생깁니다. 주님께서 전도를 통해서 새 방언의 역사를 주시겠다고 약속했어요. 이 새 방언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언어를 말합니다. 우리가 영어를 배우고, 일어를 배워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새 방언을 주시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의 문을 열기 위해서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시는 방언의 역사를 말합니다.

20세기에 하나님께서 가장 크게 쓰셨던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 모스크바 집회를 계획했습니다. 당시는 미국과 소련이 냉전시대에 가장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하던 시대예요. 서로 누구 힘이 크냐를 키재기하면서 핵폭탄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 전 세계 집회를 하던 중에 모스크바 집회 신청을 했어요. 당시에 서기장이 고민합니다. 대외적으로는 소련도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선포해 놓았는데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 모스크바에서 집회를 하겠다고 하니까 막을 방법이 없어요. 막자니 종교의 자유가 없는 것이 드러나는 일이고, 허가하자니 공산주의자들에게 복음이 전해질까봐 두렵고, 결국은 허락을 했습니다. 빌리 그레함 목사님과 많은 스태프들이 얼마나 많은 기도의 준비가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집회가 열렸습니다. 러시아어 통역이 말씀을 통역합니다. 그냥 원만하게 크게 충돌하지 않고 지나갈 수도 있을 거예요. '여기는 소련이고, 여기는 공산주의의 심장이고, 여기서 집회가 된 것만 해도 은혜지' 이러고 넘어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빌리 그레함 목사님은 그렇지 않았어요. 복음에는 십자가가 선포되어야 하고, 우리의 회개와 결단이 선포되지 않고서는 그것은 복음이라고 말할 수 없어요. 설교하는 중에 아주 중요한 선포를 합니다. '미국 사람들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멸망합니다' 통역이 신이 나서 통역합니다. 자기 나라와 원수의 나라가 멸망한다는데 얼마나 신납니까? '미국 사람도 예수 믿지 않으면 멸망합니다'

'소련 사람도 예수 믿지 않으면 멸망합니다' 통역이 아무 소리 안하고 가만히 있습니다. 못 들은 지 알고 한번 더 얘기합니다. 그래도 조용합니다. 그때 목사님 생각에 '지금 이 사람이 그 말씀을 통역했다가는 끝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지도 모른다. 아마 그런 두려움 때문에 지금 통역을 못하는구나'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다시 그 말씀을 선포할 때 그 말씀이 러시아 방언이 되어 선포된 줄 믿습니다. 다 들었어요. 모스크바 광장의 수많은 사람들이 소련 사람도 예수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말씀을 러시아 방언으로 듣게 되었어요. 그것을 새 방언이라고 그래요. 하나님께서 생명을 걸고 주의 복음을 증거하려고 하면 길을 열어주시고, 방법을 열어주시고, 해답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는 뱀을 집으며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고 했어요. '해를 받지 않는가 보자'라고 독을 마시면 죽을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일입니다. 이 말씀은 주의 종들이 복음을 증거하는 극한 상황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겠다고 하는 주님의 강력한 의지가 거기 담겨져 있는 거예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7배나 뜨거워진 풀무에 던졌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 자리에 보내셔서 내 사람이 되게 하셨고 불에 던질 때에 군사가 데어서 죽는 그 뜨거운 풀무불, 그 세 사람은 전혀 옷자락과 머리카락도 눋지 않았다고 그랬어요. 사자굴에 다니엘이 던짐을 받았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을 통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자들을 보내어 저들을 나를 지키는 도구로 사용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받기 위해서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말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병자를 만날 때에 치유의 능력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환자들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니라' 치유의 은사지요. 베드로와 요한이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만납니다. 그리고 그 앉은뱅이를 향해서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왜 없겠어요? 그 앉은뱅이 거지에게 동전 한푼 주는 것이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당신에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신의 근본적인 삶, 앉은뱅이 인생이 아니라 일어나 걷는 인생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그가 걸은 줄로 믿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종들의 기적과 역사의 중요한 공통점이 있어요. 그것은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나 요한이나 누구든지 기도하러 가던 중에 이런 역사가 일어난다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기도의 사람에게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거예요.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세상 얘기가 될 것입니다. 평생을 믿어도 남의 얘기가 될 거예요. 저는 소원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이 이 기적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어떤 사람을 만나든, 어떤 형편에 있든 여러분들은 내가 예수의 사람이며 내가 믿는 그 예수님을 내가 당신을 위해서 소개하고 싶고, 전하고 싶고, 내가 나가는 교회에 옆자리에 당신을 앉히고 싶은 그 열정과 그 열망이 때때로 내게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려움이 주어지고 손해가 된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위한 일이라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라면 나는 기꺼이 이 일을 하겠노라고 그렇게 결심하고 실천해 나갈 때 주님께서 험한 세상에 그냥 우리를 떠밀어 내미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이적과 기적과 표적을 주셔서 오히려 승리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이 능력, 이 증인의 삶을 여러분들이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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