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말씀 (요 01:1-3)

첨부 1


하나님은 말씀입니다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구원자는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할까요? 구원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자는 인간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죄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인간보다 초월적인 존재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자의 첫번째 조건입니다.

두번째 조건은 무엇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자는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이 인간을 구원한다면 그 구원은 강압적이요 억지로 만든 것이 됩니다. 참으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인간 이상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인간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자의 절대적인 조건입니다.
그런데 이 지상에 하나님이면서 인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자입니다. 거짓말이라도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예수 외에는 없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을 눈여겨 보십시오. 오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말씀으로 존재하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씀’이란 무엇일까요? 말씀은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던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비스러운 존재, 초월적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알듯하면서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음 속으로는 다 믿지만 하나님에 대해 물어보면 구체적으로 설명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은 막연한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막연한 존재가 아니듯이 하나님은 구름과 같은, 안개와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막연한 관념이나 개념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믿음이 생기지 않는 까닭은 하나님을 막연한 존재로 보기 때문입니다. 막연한 기대, 막연한 생각 때문에 한 번도 하나님을 만나본 적도 없고, 음성을 들어본 적도 없고, 사랑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입니다. 사람이 하는 말을 ‘말’이라고 하고, 하나님이 하는 말을 ‘말씀’이라고 합니다. 말 자체는 특별히 구분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이라고 할 때, 우리들이 하는 말과는 달리 하나님이 하는 말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말씀’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로고스’라고 합니다. 그것은 헬라인들이 절대적인 존재를 설명하려고 할 때 썼던 단어인데 요한이 복음을 기록하면서 사용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 태초부터 존재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태초‘는 시간과 역사가 생기기 이전, 인간이 생기기 이전을 말합니다. 영원 전부터 존재했던 것이 말씀이었고, 그 말씀의 실체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성령 안에서 말씀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의 실체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실체를 만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막연한 존재가 아닙니다. 따라서 기도는 염불이 아닙니다. 독백도 아닙니다. 자기 암시도 아닙니다. 기도는 실체와 함께 하는 대화입니다.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내 신음소리까지 들으시고, 내 형편을 아시고, 나를 위해 눈물과 피를 흘리시며, 나를 위해 온 몸을 던져서 사랑했던 실체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말씀으로 오신 그분은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실체는 예수님입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인데, 그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하나님의 실체가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분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상상할 수 없었던 인생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빌립보서 2장 5-8절을 보면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예수는 인간이었지만 그분의 본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되기를 포기하셨습니다.
사랑은 얻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갖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을 포기하고 인간으로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들의 사랑은 전부 가짜입니다. 가짜이기 때문에 내가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착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됨을 포기 하시고 우리를 사랑하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을 뿐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 오셨고, 가장 처절한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발견하는 것이 있습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의 실체라는 것입니다. 나의 실체는 내가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고 변함이 없고 거짓이 없습니다. 말씀은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말씀하신다는 것은 듣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듣지 못하면서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말하고 듣는다는 것은 상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가 있다는 것은 인격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혼자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분은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분과 사랑의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말씀’이라는 것이 이런 뜻입니다.

인간은 돌을 깎아놓고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찬물을 떠놓고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있으면 우상을 만들어서 가짜에게 빌고 절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의 공허함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만든 하나님과는 대화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진짜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외로워서, 공허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인격이입니다. 인격이 깨어지면 사랑도 깨어집니다. 신앙도 인격입니다. 교회에도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인격이 파괴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국 그 사람들의 신앙도 파되됩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십니다. 여러분의 하나님은 이렇게 구체적이고 인격적인 하나님입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살펴보면 말씀은 죽은 존재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은 자의 특징은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한다는 것은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살아있습니다. 죽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면 죽은 것도 살아납니다. 없는 것도 있게 됩니다. 안되는 것도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막연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실체입니다. 천국도 실체입니다. 지옥도 실체입니다. 그것은 관념이나 이론이 아닙니다. 믿음은 밥먹는 것과 같습니다. 이론이 아닙니다. 실제 경험인 것입니다. 이해하면 믿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믿음의 실체, 말씀을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때 하나님이 보입니다.

마음 문 열고 예수 만나십시오
하나님은 삼위일체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개인주의를 배격합니다. 삼위일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연합과 일치’입니다. 마귀의 주특기는 ‘분열과 파괴’입니다. 저는 우리 민족이 하나되기를 바라고, 우리 사회와 가정이 하나가 되기 바랍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하나가 되고, 배운 자와 못 배운 자가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과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에 대해 요한복음 1장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영원한 존재가 유한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사랑 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포기할 수 있고 양보할 수 있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특징입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보면서 사랑을 느낄까요? 요즘 교회는 더욱 이기적이고 뭔가를 가지려고 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본질에서 멀러 떠나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개인주의가 아닙니다. 공동체입니다. 연합과 일치가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실체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마음의 문을 열면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 긍정적인 마음을 갖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 그냥 온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만나기 원하시고 여러분의 인생에 개입하기 원하십니다. 뜬 구름 잡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실체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에게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육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여러분은 영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육체로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이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아직 성경을 잘 모르거나 교회를 모르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을 느끼느냐가 중요합니다. 만약 느끼신다면 거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찾아가셔서 만나주실 것입니다.
생명(요 1:4)

4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책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전부 예수의 탄생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인간 예수로부터 시작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를 기록하는 형태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본질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태초로부터 계셨던 예수로 기록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특징입니다.
태초에 말씀으로 계신 예수

요한복음의 첫 시작인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말은 ‘예수는 인간 이상의 존재다’라는 것입니다.
역사상 아무리 위대하고 뛰어난 사람이라 할 지라도 인간은 인간을 구원하진 못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셨고, 그가 인간이 되셨지만 죄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남자의 씨로 예수가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남자의 씨로 태어났다면 그도 죄인이니까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태어나 신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죄 많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존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으로 존재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저는 이 요한복음의 설명에 정말 밤새도록 감탄을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모습인지, 어떤 존재인지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예수로 보여집니다. 예수님은 내가 만질 수 있고, 밥을 같이 먹을 수 있고 그 품에 안길 수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모습을 인간으로 다 보여주셨기 때문에 선명하게 하나님을 내 마음 속에 그릴 수 있습니다.
예수를 알면 하나님을 아는 겁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실체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실체입니다. 무서운 하나님,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내 마음 속에, 내 삶의 현재 속에 거하시는 주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찬양입니다. 이것이 예배요 기도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허구가 아닙니다. 그 어떤 분과 우리는 매일 매일 함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본질에 있어서 ‘예수님은 인간 이상의 존재다’ 라고 믿는 것이 구원입니다. ‘인간 예수다, 역사적 예수다’ 이렇게 말하면 구원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1장 2절과 3절을 보면 예수님이 본래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셨고, 말씀으로 존재하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천지창조를 하셨습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부터 17절을 보면 예수님이 우주를 창조 하셨고 천지만물을 창조했다는 얘기가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세상을 창조하셨을까요? 그 열쇠가 ‘생명’이라는 말에 있습니다. 4절을 보면 ‘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 되어있습니다. 이 생명이 인간을 만들고 우주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천지창조의 열쇠 ‘생명’
생명이란 뭡니까? 죽음의 반대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죽음의 그늘에 앉은 백성들’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의 그림자 속에 삽니다. 병, 고독, 갈등, 이런 모든 것들이 죽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죽음으로 가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인생의 종착역인 죽음을 우리는 그렇게 두려워 합니다.
왜 죽음이 두려울까요? 죽음 이후의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후의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은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을 환영합니다. 죽음은 영원을 여는 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세상이 보장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것이 두렵고 무섭고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창조의 능력은 무엇일까요? 생명입니다. 생명이 있으면 이미 죽은 것도 살아납니다. 생명이 들어가면 죽은 나무들이 살아나고, 죽은 사람들이 살아납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생명의 역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한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고 병들었던 사람이 일어나고 귀신들이 떠나가고 절망하던 자가 희망을 갖게 되는 까닭은 예수 안에 있는 생명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 생명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 안의 생명이 없어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끊어지고 일반적인 생물학적인 생명만 가지고 있게 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접붙임을 받아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으로 생명의 접붙임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 믿으라는 소리입니다.

요한 1서 5장 11절 12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여기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예수가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 예수가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이런 뜻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에 예수께서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부활의 핵심에는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부활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삽니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예수 믿으면 천국가고 영원한 생명이 얻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온 것은 생명이 없는 당신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가짜 생명을 가지고 있는 여러분에게 진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있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부활이 생깁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을 전도했더니 “저는 교회 다니고 싶은데 어머니가 독실한 불교 신자이십니다. 그러니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교회에 다니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말은 어머니를 지옥까지 잘 모셔드리고 자기는 천국에 가겠다는 말입니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으니’라는 이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복음을 지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 몸안에 생명이 잉태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임신한 사람은 갑자기 배가 부르지 않습니다. 몇 달이 지나야 표가 납니다. 오늘 예수 믿었다고 갑자기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계속 거짓말 하고, 담배 피는 사람은 계속 담배를 핍니다. 그런데 배가 불러오는 것을 어찌 할 수 없듯이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오면 내가 변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말이 달라지고, 표정이 달라지고, 언어와 습관이 달라집니다.

생명의 특징이 뭡니까? 자란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사람은 자라지 않습니다. 생명의 특징은 성장하고 열매맺는 겁니다. 내 인생이 자라고, 성숙하고 열매를 맺고, 다른사람에게 축복을 나누어 주는 사람으로 내가 변신하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의 생명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의 생명이 여러분의 몸에 붙으면 그 예수의 생명은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령의 역사’라고 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 내 안에 들어와서 역사가 일어나는 사건을 가리켜 ‘성령의 사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 일이 제일 중요합니다.

“생명의 접붙임을 받으라”
두번째 중요한 것은 성령세례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기까지는 떠나지 말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받았지만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전 여러분들이 두 가지를 하기 바랍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예수님을 믿겠다고 말하고 예수 안에 생명의 접붙임을 받으십시오. 어떻게 믿냐구요? 그냥 믿으십시오. 믿음은 이성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렇게 안 믿어지던 것이 은근히 믿어집니다.제가 믿다가도 정신차려 생각해보면 ‘내가 제 정신이 아니지. 2천년 전에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에 태어난 그 청년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 어떻게 그 사람의 이름을 믿으면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는다는 말인가?’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온 경험과 논리로 이해되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런데도 믿어집니다. 그 분을 만나면 기쁘고, 눈물이 나고, 위로가 생기고, 죽음이 두렵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 분이 살아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진짜니까. 그 분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예수를 믿기로 결정하신 분들은 이렇게 기도를 하십시오. ‘성령님 내게 오시옵소서. 나를 충만하게 하옵소서.’
잉태한 생명을 유산시키면 안됩니다. 생명을 해산할 때까지 소중히 지켜야 합니다. 그 책임은 내게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성숙하고, 흔들리지 않고, 어떤 고난과 어떤 위기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열매맺을 때까지 가는 것, 이것은 여러분 자신이 할 일입니다. 성경 읽고, 기도하고, 예수 잘 믿는 친구들의 옆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연약한 그릇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오늘 예수의 생명으로 접붙임 받고 가짜 생명으로 살아가던 사람들 진짜 생명으로 바꾸시길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