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요 01:9-13)

첨부 1


창세기 1장 2절은 천지창조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지 창조 이전의 모습을 혼돈과 공허와 흑암,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특징이 세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극도로 혼돈된 삶입니다. 또한 그 인생이 허무합니다. 어둠 속에서 방황합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서 천지 창조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3-5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지창조의 시작은 빛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빛이신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순간 모든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그리고 천지 창조의 새벽이 열립니다. 우리의 일상적 경험으로 하루는 해 뜨는 아침에서 시작하여 해지는 저녁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천지 창조를 보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루란 해지는 저녁에서 시작하여 해뜨는 아침으로 이어집니다.
요한복음 1장 9절은 참빛이신 예수님께서 어두움이 가득찬 세상에 오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요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세례 요한은 참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사람들은 참빛되신 예수님을 환영하기는 커녕 거절했다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빛되신 예수님’ 거절하는 ‘죄’
인간의 본질은 ‘거절’입니다. 인간의 상처는 거절감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거절을 당합니다. 사람들 마음 속 깊은 곳에는 거절에 대한 상처, 환영받지 못한 것으로 인한 상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존경쟁이라는 사회속에 뛰어들어오면서 거절을 겪습니다. 배신과 거절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학교나 직장에서, 애인이나 친구들로부터 거절을 당합니다.
이 거절감의 상처는 말할 수 없이 큽니다. 그것은 열등감으로 우리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나아가서 거절감의 상처는 우울증을 만들고 자살에까지 이르게 합니다. 거절감은 죄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환영하십니다. 거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에게 상처를 줍니다. 환영하지 않습니다. 싫어하고 꺼려하며 제외시켜버립니다. 소외시키는 것입니다. 거절을 철학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소외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외감속에서 고독하게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하지 않은 까닭은 인간 속에 있는 죄가 거절했기 것입니다. 진리와 빛, 생명과 구원을 거절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외롭고 고독하고 가장 낮은 자리에 태어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탄생을 죽음으로 바꾸려 했습니다. 그를 핍박하고 저주하며 조롱했습니다. 결국에는 가장 저주스런 십자가형으로 그분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환영하고 영접해야 할 그분을,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들고 경배해야 할 그분을 인간들은 죄의 속성 그대로 거절해버린 것입니다.

어둠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빛을 거부합니다. 죄가 있는 사람, 죄가 많은 사람, 정직하지 않은 사람, 불의로 가득찬 사람은 의가 오면 무섭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도둑이 경찰만 보면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유는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정의, 진리, 빛을 싫어합니다. 그 이유는 빛이 올 때 자기 양심을 찌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둠 속에 오래 있던 사람은 태양 앞에서 눈을 뜰 수 없습니다. 빛이 찌르므로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 양심을 찌르므로 양심이 마비된 사람은 예수를 거부합니다. 자기의 더럽고 천하고 무질서하고 비참한 모습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정의나 빛을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둠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빛이 오는 것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막습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직한 사람이 들어오면 나쁜 짓하는 사람들이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같이 탈세하고 훔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그 사람으로 인해 자기들이 노출되기 때문에 의로운 사람이 직장에 들어오면 그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바보로 만들어 내모는 것입니다.

‘거짓 빛’과 ‘참 빛’
사람들은 빛을 저주하고 눈을 감고 등을 돌립니다. 어둠의 옷을 이중삼중으로 입습니다. 자기의 불의를 감추기 위해 빛을 차단할 수 있는 것이라면 두겹세겹으로 장치를 합니다. 참빛은 자기를 찌르기 때문에 싫습니다. 그래서 거짓 빛으로 위장합니다. 사람들이 거짓 빛을 좋아하는 이유는 자기 눈을 찌르지 않고 양심을 찌르지 않기 때문니다.
우리는 편한 길로 가기를 원합니다. 자기를 야단치고 정체를 밝히고 실수를 드러내는 사람은 꺼려합니다. 이것은 마치 술과 마약처럼 내 죄를 합리화시키고 편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대신에 스스로 창안해 낸 사상, 철학, 종교또한 마약같은 것입니다. 거짓 빛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우리는 여기서 빛의 특성 몇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감추인 것을 드러나게 하는 역할입니다. 빛의 다른 특성은 혼합물이 없는 것입니다. 빛은 언제나 순수하고 투명합니다. 빛에는 불순물이 없습니다. 빛의 또 다른 특징은 어둠을 밝히고 사물을 관통하는 것입니다. 빛 앞에는 어둠이 무력하고 모든 단절, 혼돈이 사라집니다. 나아가서 빛은 따뜻합니다. 빛은 얼어붙은 것을 녹이고 위로하고 보호하며 따뜻하게 만들어 줍니다. 빛은 우리를 안내해 줄 뿐만 아니라 경고를 해주기도 합니다. 잘못된 길을 비춰서 가지 못하도록 하고 방황할 때, 길을 잃었을 때 빛은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길을 가게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인생의 빛, 등대입니다. 그러나 어둠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이 빛을 거부하고 싫어합니다.

9절에서 한 가지 더 발견하는 것은 그 빛이 각사람에게 비췬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빛은 일반적으로 태양빛과 같이 모든 사람에게 비춰지는 빛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춰지는 빛입니다.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나 한사람을향해 비춰지는 빛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일반적인 빛이라면 누구 뒤에 숨으면 그 빛을 받을 수 없지만 예수님의 빛은 내가 숨든 숨지 않든 간에 나 한사람을완전히 비추는 빛입니다. 구원은 온 인류에게 주는 일반적인 특성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0절의 주제는 우리가 그를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영접하지 않고 거절했습니다.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합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질적으로 환영하지 않습니다. 죄로 인해 눈이 어두워지고 양심이 마비된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는 까닭은 그분이 엉터리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죄로 말미암아 양심이 마비되고 인격이 파괴됐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몰라 보는 자식과 같습니다. 부모를 거역하고 집을 나간 탕자와 같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집주인이 왔지만 세든 사람이 집 주인을 몰아낸 것입니다. 나를 창조하신 주님이 자기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을 내쫓고 오히려 죽였습니다.

거절과 배신, 죄인의 특징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죄인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죄인의 본성은 거절입니다. 사랑을 거절합니다. 또한 죄인의 특징은 배신입니다. 누구나 배신을 당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거절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나도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상처를 받았다는 말은 상처를 줬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상처 받을 때는 아이큐가 높아져서 상처를 분명하게 기억합니다. 상처를 받을 때는 토시까지 모두 기억합니다. 그러나 상처줄 때는 아이큐가 낮아져서 기억을 하지 못합니다. 상처준 것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발뺌합니다.

여러분이 상처를 받았다는 얘기는 상처 받은 만큼 상처를 줬다는 얘기입니다. 거절을 당했다는 얘기는 거절했다는 말입니다. 배신을 당했다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배신을 했다는 사실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그런 경험을 많이 합니다. 인간이 가진 많은 문제를 요약해 들어가며 뿌리를 찾아보면 결국 배신과 거절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부부 관계의 문제도 여기 있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거절하고 환영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내게 순종하는 것은 쇼하는 것이지 진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좋아서가 아니라 돈 때문에, 아이 때문에 산다는 것입니다. 언제 나를 사랑해 봤냐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부모에게 하는 얘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는 그렇게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자식의 입장에서는 부모들이 언제 나를 사랑했냐는 것입니다. 이 상처 때문에 자식들이 평생을 방황합니다. 거절감과 배신감, 이것이 우리 구원에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가 거절하는 인생에서 환영하는 인생으로, 거부하는 인생에서 받아들이는 인생으로, 부정적인 삶에서 긍정적인 삶으로 내 인생을 바꾸면 무슨 일이 생깁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상상할 수 없는 기적과 축복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받는 복 중에서 가장 큰 복이 있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은 내 인생의 소속, 위치, 신분, 환경이 완전히 달라짐을 의미합니다. 상속의 조건이 달라집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습니다. 하나님이 사시는 집에 내가 살게 됩니다. 하나님 호적에 내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탄의 자녀로 이 세상에서 살다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내 위치, 신분, 조건, 상황이 다 변하는 것입니다.
북한에 살던 사람이 탈북하면 상황, 환경, 소속이 달라집니다. 환경이 달라지면 문화와 법과 질서가 달라지고 소속이 달라지면 그 인생의 미래가 달라집니다.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과 함께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천국에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삶이 있을 것입니다.

기적과 축복의 분기점
땅의 복이 아닌 하늘의 복, 순간적인 복이 아닌 영원한 복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은 하나님의 자녀로 입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거절에서 환영으로, 부정적이던 데서 긍정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배척하던 데서 예수님을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로 바꾸면 이런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분기점입니다. 거절이냐 환영이냐, 신앙이냐 불신앙이냐, 지옥이냐 천국이냐, 저주냐 축복이냐를 결정짓는 분기점은 예수님을 환영하느냐 거절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죄의 특징은 거절임을 앞에서 언급했습니다. 거절에 익숙한 사람은 자식도 거절하고 남편이나 아내도 거절합니다. 누구 한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체질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사랑하지 않고 이용할 뿐입니다. 진심으로 내 가슴속에서부터 사랑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자기도 사랑이 안되서 고통을 겪습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을 미워하고 저주하는 부모를 본 적이 있습니다. 블란서 코스타에 갔을 때 한 부모가 찾아와서 자식이 벌레처럼 싫다며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의무적으로 안고 있지만 싫다고 했습니다. 거절감이 이처럼 무섭습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사랑을 받지 못해 죽어가고 부모는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못해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거절의 결론은 미움, 복수입니다. 어떤 여자로부터 거절을 당한 남자가 거절감을 이기지 못해 복수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거절감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거절감이 이토록 무섭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거절하지 않고 수용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환영하고 수용하고 이해하고 격려하고 축복하는 사람의 얼굴에는 행복과 기쁨이 솟아날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치열한 생존 경쟁속에서 투쟁에 익숙해져서 받아들이는 훈련이 잘 돼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이런 경우에도 알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거절할 것 같으면 과거에 거절당했던 상처가 올라와 그 사람이 거절하기 전에 먼저 선거절해 버립니다. 선수를 쳐서 상처를 줘버립니다. 마찬가지로 누가 나를 배신할 것 같으면 상대방이 배신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 사람을 배신해서 쳐 버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런 인간관계가 계속해서 직장, 사회에서 악순환이 됩니다. 아무리 좋은 말과 설교를 해도 믿지 않습니다. 자신의 뒤통수를 치기 위한 전략이라는 것입니다. 복받을 통로를 스스로 모두 차단해 버리는 이 사람의 결론은 파멸과 죽음입니다.

하나님에게도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믿고 충성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응답은 커녕 저주밖에 오지 않았다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상처입니다. 정직했는데 왜 이런 결과가 나왔으며 기도했는데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상처로 인해 방황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기도는 응답됨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진리가 반드시승리한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사람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불가능할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유전, 가문, 종족, 혈통, 국가라는 것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나라, 어느집안에서 태어났기에 구원받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둘째로 그것은 육적인 생각에 기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본능이나 우리의 생각이나 욕망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셋째로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성, 의지, 선한 노력, 희망때문에 이런 일들이 만들어지는는 것이 아니므로 안심하십시오. 우리가 잘나고 고상한 사상을 가지고 있어서 이런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근거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사랑이요 선택이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무조건적인 그분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하나님의 뜻에 맞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듭날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할 일은 한 가지 뿐입니다. 그분을 환영하는 것입니다.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에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 축복이 이시간 여러분에게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