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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십시오 (요 0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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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는 바리새인으로서 종교적으로 성숙한 사람이고 산헤드린 공회의 한 멤버로서 사회적 결정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존경 받는 지성인이었고 예수님의 시체를 관리할 정도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다 갖춘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왜냐하면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을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영적인 갈급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위대한 질문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인 줄 아나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함께 행하시지 않았다면 당신이 행한 표적과 이적은 모두 불가능한 것입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질문 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질문이 이것입니다. “예수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왜냐하면 예수님은 AD와 BC를 나눈 분이고 동서양을 합쳐 예수님만큼 인류에게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을 한 사람이 성경에 또 한 사람 있습니다. 사울입니다. 사울은 신약 성경 13권을 쓸 만큼 지성이 있고 학문적 훈련을 받았으며 자기가 믿는 대로 행동하는 혁명가적 기질 또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가던 중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난 뒤 눈이 멀고 쓰러집니다. 이때 사울이 니고데모와 똑 같은 질문을 합니다.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에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그때부터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고 그의 인생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납니다.

니고데모의 질문에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 속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 ‘거듭남’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기독교 사상을 ‘거듭남’이라는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거듭남은 하나님 나라의 열쇠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고 깨닫고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은 거듭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 말을 당시 유대인 지성의 최고봉이었던 니고데모가 못 알아 들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은 니고데모가 알고 있는 모든 개념에는 없는 전혀 생소한 개념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주어진 말이 아니라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 거듭났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이 새롭게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진짜 거듭났는가?
기독교 집안에서 꾸준히 신앙생활을 해오던 사람은 나이 든 뒤에 예수를 만나는 사람에 비해 믿기가 어렵습니다.
예수와 전혀 상관 없는 무신론적 배경에서 자란 사람은 예수를 만나면 복음을 정확하게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이 예수를 잘 믿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를 잘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율법과 종교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 기독교 핵심 진리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기 때문입니다. 주변에서 맴돌며 자신이 하나님을 잘 믿고 성경 잘 알고 교회에 익숙하다고 자랑하며 삽니다. 이런 사람이 니고데모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네가 지금까지 생각하고 믿어온 것은 진짜 신앙이 아니다”라고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니고데모는 이 말을 알아듣고 당황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정말 거듭났습니까? 우리는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에 대해 정확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말 그대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태어남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 째 육체적으로 태어남입니다. 니고데모나 우리는 첫 번째 탄생에는 굉장히 익숙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낳아주신 부모의 유전인자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남자나 여자인 성이 있고 육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인이 되면 결혼을 하고 부모가 나를 낳아주었듯이 자식을 낳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며 죽음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이 탄생, 출생, 결혼, 죽음의 개념을 잘 압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네가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고 하시니 당황스러운 것입니다. 두 번째 탄생인 거듭남에 대해 우리가 생각해 본 적이 없고, 경험해 본 적이 없고, 아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탄생은 영적 탄생입니다. 원어로 보면 거듭남에는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아노델’의 첫 뜻은 ‘처음부터’입니다. ‘시작’, 새롭게 완전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다시’라는 뜻입니다. 한 번 한 것을 다시 반복했을 때 이 아노델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세 번째 아주 중요한 뜻인데 ‘위로부터’라는 말입니다. 거듭남은 위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땅에서 태어났지만 하늘에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진짜 탄생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래로부터 태어나는 것, 형이하학적인 것은 쉽게 이해합니다. 그러나 영으로 태어나는 것, 하늘로부터 태어나는 것은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세 가지 뜻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하고 완벽하게 다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생, 거듭난다는 뜻입니다.

행위로는 구원 받지 못한다
거듭남이라는 개념은 일반 다른 종교나 철학에 없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에만 있는 독특한 개념입니다. 모든 종교는 행위로 구원 받습니다. 내가 열심히 하고, 어떤 의식을 드리고 선행, 수련을 하고, 도를 닦으라고 하지 근본적으로 다시 거듭 태어나서 만들어진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율법을 주장하는 종교는 더욱 이 개념을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지금까지 믿어왔던 것은 출발 자체가 잘못됐으니 그것을 다 없애고 다시 시작하라”고 하니 힘듭니다. 하고 있는 것을 조금 더 잘하라고 하는 것은 쉽지만 근본부터 잘못됐으니 다시 하라니 당황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거짓 종교와 참 종교, 거짓 믿음과 참 믿음의 갈림길을 발견합니다.

제가 목회를 하며 보니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 거듭나기가 참 힘들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도 저희 부모님이 예수를 믿어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예수님을 진짜로 만나기는 어려웠습니다. 충격적인 큰 사건이 있지 않는 한 예수님을 만나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구약 종교, 율법에 대해 선입관이 많은 니고데모는 이 말씀에 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태어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5절에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거듭남의 핵심은 물과 성령입니다. 우리의 행위나 선행, 노력, 종교적 습관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성령에 의해 태어나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은 선택받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택한 것입니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내가 그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을 발견하고 사랑한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내가 하나님을 모를 때 이미 나는 택함을 받았고, 사랑 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믿음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로 시작되는 찬송이 있습니다. 신앙은 이런 의미에서 은혜요 ,감동입니다. 율법과 내 노력과 의지로 했다면 자랑할 것이 많고 주장할 것이 많지만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거듭남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성령께서 나를 감싸주시고 내게 역사하시고 나를 인도해주셔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다.

물과 성령이라고 할 때 ‘과’는 ‘그리고’의 뜻도 있지만 ‘즉’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물 같은 성령’이라는 겁니다. 또 하나 물은 말씀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내가 거듭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났으면 그 거듭남은 진짜입니다.
물은 씻는다는 의미에서 ‘회개’라는 말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 번째는 부모로부터 육적인 탄생이었지만, 두 번째는 탄생은 회개와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게 성령으로 임하셔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내 죄를 다 씻고 말씀으로 새롭게 해주시고 어미 닭이 계란을 품어 병아리가 부화하듯이 성령으로 내가 다시 태어남으로 새사람이 되었다는 뜻이 이 안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성령이 임할 때 진짜 거듭남, 제 2의 출생이 시작됩니다. 제 1의 출생에서 부모님의 유전인자를 받듯이 제 2의 출생에는 하나님의 유전인자가 내 안에 들어옵니다. 죄의 인자가 없어지고 생명의 인자가 내 안에 다시 시작합니다. 죄성으로 부패했던 내 모습이 회복합니다. 인간의 속성은 배신이었지만 하나님의 성령이 내 안에 임해 하나님의 인자가 다시 살아납니다. 이것이 ‘새롭다. 거듭났다. 변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날 하나님 없이 살면서 흔들리고 비참해지고 방황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여태까지 오만하고 자신 만만하게 자기 중심으로 살아왔던 내가 안에서 무너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교회에 한 번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고, 들리지 않던 설교가 들립니다. 자꾸 듣고 싶습니다. 자기 내면에는 하나님에 대한 갈증, 갈망이 생깁니다. 성령이 당신 안에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말씀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태어난 시기도, 지역도, 성도 어느것 하나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육적인 탄생처럼 영적인 탄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영적인 갈급함과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을 주시고 내 영혼에 대해 제 2의 탄생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은혜와 믿음은 언제나 동전의 양면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오시는 것이 은혜고, 내가 하나님께 가는 것을 믿음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오실 때 내 마음에 하나님께로 가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낳아주시는 것입니다. 내 부모가 나를 낳았듯이 성령이 나를 낳아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확실하게 이해하고 깨닫기를 축원합니다.

그때부터 내 힘으로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 말씀의 능력,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쁨이요, 평안이요, 설명할 수 없는 삶의 환희입니다. 의욕이 넘치고 비전이 생기고 죽고 병들고 가난한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어떤 분으로 말미암아 내가 다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 때부터 이상한 현상이 생깁니다. 밤이 새도록 기도하고 찬양을 부르면 눈물이 납니다. 가슴이 흔들립니다. 성경을 읽고 싶어집니다. 당신 안에 성령이 임하시고 말씀이 거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새로운 비전, 능력, 생각이 내 안에서 움직이는 것을 경험합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기도를 하면 할수록, 찬송을 부르면 부를수록 더 커집니다. 내 안에는 그런 것이 없지만 어디선가 그런 것들이 내 안에 생깁니다. 이것이 기독교요, 거듭남이요, 기적입니다.

영으로 난 자만이 깨닫는 진리
이 말을 니고데모는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이 비밀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니고데모가 못 알아 들은 것이 얼굴에 분명히 보이자 예수님이 한 마디 더 하셨습니다. 6절과 7절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개는 개를 낳고, 소는 소를 낳고, 원숭이는 원숭이를 낳을 뿐 사람을 낳을 수 없습니다. 종은 바뀌지 않습니다. 육을 아무리 훈련시키고 도를 닦고 관리한다고 해서 육이 영이 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인간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인 것처럼 육은 육이고 영은 영입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하면 된다. 산에 가서 백일 기도 하면 된다. 금식하면 된다”라고 생각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종교적인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한 거듭남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종교적인 훈련, 노력, 열심이 곧 여러분의 믿음이라고 착각하면 할수록 더 허무하고 갈급하고 괴로워집니다.

인간 안에 허구와 죄와 더러운 것은 교양이나 지성으로 아무리 감싸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본성을 없애야 합니다. 육을 없애지 않고 영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과거, 죄성, 옛 사람을 죽이지 않고 새사람이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은 육이요, 영은 영이니 내가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혼동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이 말을 알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또 설명하십니다. 8절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이 이러하니라

성령으로 난 사람은 알지만 육으로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변화와 거듭남, 새 사람은 당신이 인격으로 성숙했느냐, 안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성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여자가 아기를 낳는 것은 지성이 있거나 유식하거나, 돈이 있거나, 신분이 높은 것과 관계없습니다.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거듭남은 없습니다.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를 보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영적인 진리를 깨닫습니다.

내가 아무리 수영을 잘해도 한강이나 현해탄 정도는 건널 수 있지만 태평양은 건널 수 없습니다. 내 선행이라는 것은 한강을 왔다갔다하는 정도입니다. 미국을 가려면 비행기를 타야 합니다. 그러면 비행기가 나를 태우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데려다 줍니다. 구원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낳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말씀으로 낳아야 합니다. 이것이 제 2의 출생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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