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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손이 만들어 준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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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뉴스를 통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스스로 포기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삶이 얼마나 힘겨웠으면 그랬을까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몹시 화가 난다. 적어도 그들은 나보다는 가진 것이 많을 거라는 생각에….

백일이 조금 지날 무렵 소아마비를 앓은 탓에 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내 힘으로 땅을 디뎌 보지 못했다. 그래서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했던 나는 학교라곤 딱 두 번 가보았는데, 한 번은 아들의 가을 운동회 때였다.

휠체어를 타고 아들 학교에 갈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아 한 달여를 고민한 끝에 겨우 남편이 밀어 주는 휠체어에 앉아 남의 눈에 띌 새라 도둑고양이처럼 운동장 한구석에 숨어 있다가 돌아왔다. 그리고 지난해 3월 어느 일요일, 여중생이 된 딸아이 학교에 남편과 함께 다녀왔다. 우리 아이가 다니는 학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는 남편의 깊은 생각에서였다.

어린 시절 나는 친구 한 명 없이 늘 집에서만 혼자 지냈다. 그런 나에게 말이라는 별명이 꼬리표처럼 붙은 가슴 아픈 기억이 있다.

당시 내 또래 여자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골목으로 몰려나와 줄넘기나 고무줄 놀이를 하며 동네를 떠들썩하게 만들곤 했다. 방에서 웅크리고 있던 나는 창틈으로 들려 오는 아이들 소리에 더욱 외롭고 슬퍼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너무도 바깥 세상이 그립고 아이들 노는 모습이 보고 싶었던 나는 어린 생각에 신발에다 손을 넣고 네 발로 기어서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내 모습을 보자마자 아이들은 마치 희귀동물을 만난 듯 손가락질하며 야! 말이다, 말 하고 놀려댔다. 그 순간 눈물을 꾸역꾸역 삼키면서도 다시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이대로 돌아서면 영영 바깥 출입을 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1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금씩 철이 든 나는 지독한 외로움으로 사춘기를 보내고, 스물두 살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라디오 장애인 프로그램을 통해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나의 사연이 소개되었는데, 제주도에 살고 있던 남편이 그 방송을 듣고 나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그때 나는 단순히 친구가 필요했을 뿐 남자를 사귈 생각이 전혀 없었고 글도 쓸 줄 몰랐으므로 그에게서 일방적으로 편지를 계속 받았다. 그리고 일 년쯤 지나 그에게 고맙다고 전화를 하며 편지를 그만 보내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남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뒤로도 자신의 일상을 일기처럼 매일 써서 나에게 보내더니 하루는 불현듯 서울로 나를 찾아왔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사랑이 싹텄고 3년의 연애 끝에 결혼을 약속했다. 그러나 건강한 남자와 휠체어를 탄 여자가 한 가정을 꾸미는 일은 둘만의 사랑으로는 쉽사리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하지만 시댁의 극심한 반대 속에도 남편의 변함없는 사랑의 힘으로 마침내 우리는 식을 올릴 수 있었고, 두 아이도 낳았다.

처음엔 내가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무척 걱정스러웠다. 아이들이 나를 부끄러워하거나 다른 엄마를 보며 부러워하면 어떡하나…. 그리고 출산을 하기까지, 나의 장애가 대물림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그러나 다행히 아이들은 정상이었고 잘 자라 주었다.

요즘 나는 달마다 어려운 살림에도 남편과 함께 장애인 시설을 찾아가 돕고 있다. 지난달에는 아들녀석이 따라나서길래 처음 함께 가게 되었다. 도착한 시간이 마침 점심때라서 아들은 손가락도 제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한 뇌성마비 아가씨가 봉사자의 도움으로 힘겹게 밥 먹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던 아들녀석이 갑자기 두 눈을 감고 손을 모으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잠시 당황한 나는 아이의 기도가 끝나길 기다린 뒤 무슨 기도를 그렇게 간절히 드렸느냐고 물었다.

엄마, 사실 나 하나님을 얼마나 많이 미워했는지 몰라요. 우리 엄마를 못 걷게 만들어서요. 그런데 지금 용서해 달라고 했어요. 저 누나를 보니까 엄마 손을 건강하게 해주셔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저 누나도 우리 엄마처럼 건강한 손으로 만들어 달라고 기도했어요.

아들의 대답을 듣는 순간 나는 숨이 탁 막히는 것을 느꼈다. 무슨 말인가를 꼭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가슴에는 끝없는 감사가 넘쳐났다.

손에다 신발을 신고 네 발로 기어다니며 놀림 받던 내가 이제는 그 손으로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며, 무슨 음식으로 사랑하는 가족의 입을 즐겁게 할까 생각하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무엇보다 이름 석 자도 쓰지 못했던 내가 나이 서른이 넘어 배운 글로 이렇게 직접 내 손으로 나의 작은 행복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감사하다.

비록 가진 것 없고 평생을 휠체어의 도움 없이는 살기 어려운 장애인이지만, 나에겐 내가 가고 싶은 곳이면 언제든지 나의 다리가 되어 주는 사랑하는 남편이 있고, 엄마의 휠체어를 서로 밀어 주겠다고 다투는 두 아이들이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앞으로도 나는 두 발로 걸을 수는 없겠지만 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나의 두 아이들을 보석보다 빛나게 다듬는 손이 있으니 영원히 행복을 꿈꿀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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