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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생의 말씀 (요 06:6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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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환호성으로 가득했던 예수님의 주변은 곧 싸늘해지고 말았습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은 흥분했습니다. 생소한 이야기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기적이 동반됐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신 일, 풍랑이 일어 배가 침몰할 것 같은 위험에 빠졌을 때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시는 일도 목격했습니다.

영적 말씀에 부담 느끼는 사람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매료되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좀더 가까이 만나 말씀을 듣고 난뒤 한 사람씩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66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왜 이런 현상이 발생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영적 진리이므로 사람들이 부담감을 느끼고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은 기적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이 사람을 임금으로 삼으면 우리는 배고프지 않겠구나.’ 또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실 때 ‘우리가 이 사람을 임금으로 삼으면 굉장히 좋겠구나’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맹목적일 정도로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다. 조상들은 만나를 먹고 죽었지만 내가 주는 떡을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 내 살과 피를 마시면 너희들은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는 말씀의 뜻을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에 사람들은 환호했지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수군거리며 떠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사람들에게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두 가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육적인 생각과 영적인 생각, 육적인 호기심과 영적인 호기심입니다. 육적인 말을 하면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고 공감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반항하고 거부합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이성과 경험으로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사람들은 말씀을 부담스러워하며 예수님을 등졌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이 말씀에서 두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실망과 고독입니다. 오랫동안 같이 살던 사람이 어떤 이유로 떠날 때 우리는 고통을 느끼고 고독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환호성을 질렀던 많은 사람들은 어차피 떠날 사람들이지만, 이제 가까이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너희도 가려느냐”고 질문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결국 혼자시구나’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본문 말씀 중에서 조금 뒤로 가면, 예수님은 자신을 배신하고 팔 자가 누구인지도 아셨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나실 때도 배신할 것을 아시고 사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때 우리가 떠날 것을 아시고 받아들이며 관용하셨습니다.

둘째, 믿음의 한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믿음이란 자기 중심적인 것입니다. 믿음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믿음’과 ‘인간 중심의 믿음’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믿음은 주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중심의 믿음은 내 생각, 경험, 이성, 감정 중심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육적인 믿음, 인간적인 믿음입니다.
처음부터 영적인 믿음을 덧입고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 교회에 나올 때는 인간적인 믿음에서 시작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교회에 와서 보니 좋아서 열심히 모임에 참석하고 설교도 듣습니다. 아직까지는 인간적인 생각에서 설교가 마음에 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봉사도 헌신도 합니다. 기뻐하고 감사하며 눈물도 흘립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육적인 믿음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가십시오. 그러면 육적인 생각을 뿌리치고 영적인 믿음으로 도약할 수 있습니다. 이때 시험과 갈등이 찾아와 여러 가지 고통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자기 편한 대로 살다가, 하나님 중심으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니 육신과 이성이 따라가지 못하고 자신의 경험은 자꾸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이 단계는 그저 교회에만 왔다갔다하는 시기입니다. 육적인 믿음이 영적인 믿음으로 바뀌는 과정은 자아를 깨고 포기하며 죽이는 것으로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열정적으로 주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겉으로 보면 그들은 굉장한 것 같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면 육적인 믿음이었습니다. 단연코 영적인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시면, 알 것 같으면서도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수군거리며 모두 떠나 버렸습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한계입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해서 모두 옳은 믿음은 아닙니다. 믿음의 기초는 하나님 말씀과 성령님의 음성에 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좋아서 하나님을 좋아하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어떤 사람이 싫어서 하나님까지 싫어하게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인간적인 믿음을 보시고 “너희도 가려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나의 생각, 경험, 이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음성에 의해 세워진 것입니다. 육적인 믿음을 버려야 영적인 믿음이 생겨납니다. 이런 일은 쉬운 것이 아니지만, 진짜 믿음은 ‘하나님 말씀’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진짜 믿음, 영적 믿음, 말씀에 기초한 믿음, 성령의 역사로 생긴 믿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시험이 닥쳐와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육적, 영적 믿음 사이의 베드로
“너희도 떠나려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매우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 68절 말씀을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아직 베드로는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3년을 같이 지냈어도 예수님의 마음을 잘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도, 부활하실 때도 몰랐습니다. 육적인 믿음, 인간적인 믿음, 자기 중심의 믿음을 갖고도 예수님을 계속 따라다녔다는 게 신기합니다.
베드로가 영적인 믿음을 갖게 된 시기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성령님이 임했을 때입니다. 그 전까지 베드로는 ‘왔다갔다, 이랬다저랬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육적인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결코 팽개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아끼시고 진실한 믿음이 생길 때까지 보살펴 주십니다. 이게 사랑이며 축복입니다.

예수님을 영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베드로가 그런 대답을 할 수 있었다는 게 놀랍기만 합니다. 마태복음 16장 13절에 비슷한 내용이 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묻자, 제자들이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묻자, 순식간에 베드로가 자신의 수준을 뛰어넘는 이상한 말을 꺼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이어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정식 이름을 부르시며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것을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고 말씀하십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여 제 삼일에 살아나실 것을 비로소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즉시 인간적인 믿음으로 돌아와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못 하리이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육적인 믿음과 영적인 믿음 사이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육적인 믿음이 있는데, 주일 아침 일찍 교회에 온 것을 보면 분명 기적입니다. 그리고 예배하며 설교도 듣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다고 다 깨닫는 게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아직도 헤매고 있습니다. 때로 “주여,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하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깥 세상에 나가면 모든 것을 잊고 옛 모습으로 되돌아갑니다. 육적인 믿음을 갖고 있으면서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하며 책임도 맡습니다.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는 은혜
베드로는 자신도 모르게 한 순간에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68절 말씀에서 베드로는 또 한가지 일을 해냈습니다. 예수님을 “주여”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신약 공동체의 핵심적 신앙 고백은 “주여”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나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69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예수님 옆에 있던 베드로는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영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것을 알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닌데, 어느 순간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래서 가끔 보면 이상한 기도를 많이 합니다. “주님, 저를 써 주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어디든 가겠습니다.” 그러나 눈을 뜨고 현실로 돌아오면 다른 태도를 보입니다. 눈을 감으면 자신도 모르게 믿음의 기도, 예언의 기도를 합니다. “주님, 나는 앞으로 어디든 가겠습니다.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끝나고 눈을 뜨면 실행하지 않습니다.
눈을 감고 기도하는 것은 진실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은혜 중의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잘 깨닫지 못하지만 은혜 안에 있고, 영적이지 않지만 영적인 말을 하며, 육적인 믿음을 갖고 있지만 어느 순간엔 믿음의 고백을 하기도 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또 “주여,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믿고 아는 사람, 알고 믿는 사람
베드로에게 신기한 게 또 있습니다. 그것은 ‘믿고 알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믿고 아는 게 있고, 알고 믿는 게 있습니다. 알고 믿는 사람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경험적인 사람입니다. 모두 알아보고 난 후 이해가 되고 경험상으로 동의하며 합리적이면 믿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안 되면 믿을 듯 하면서도 믿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알고 믿는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믿고 아는 사람’은 다릅니다. 알고 나서 믿을 것인가, 믿고 알 것인가 하는 차이입니다. 성경은 후자를 말합니다. 믿으면 하나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흔히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여 주면 믿겠다’고 합니다. 이사야 7장 9절에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믿어야 합니다. 천지가 창조된 것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믿으니 그 후에 모든 것이 이해되고 풀리는 것입니다. 순서는 먼저 믿고 다음에 아는 것이며, 먼저 받아들이고 다음에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성이 먼저인가 믿음이 먼저인가’라는 주제 앞에서 베드로는 자신도 모르게 불쑥 ‘믿고 알았다’고 합니다. 믿음은 이성을 인도합니다. 믿음은 지성을 낳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감정을 조절합니다. 믿음이 우선합니다. 여러분에게 성령님의 믿음, 말씀에 기초한 믿음, 은혜의 믿음이 있게 되길 축원합니다.
믿음이 이성을 조정해야 합니다. 믿음이 지성을 통제해야 합니다. 참 믿음, 성령으로 난 믿음, 말씀으로 난 믿음,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믿음이 삶을 인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어떤 어려움과 시험과 난관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70, 71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아직 육적인 믿음을 갖고 있고 진짜 믿음도 갖지 않았던 베드로는 왜 선택받았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신했는데, 결국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사도 중의 사도로 영광스런 삶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왜 같은 제자인 가룟 유다는 버림을 받았습니까?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는 버림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30대 챔피언 전도 집회’에서 하나님께서 계시는 이유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실제가 없는 대상에 대한 단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컵’이라는 게 있으니 ‘컵’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니 하나님이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십니다. 천국과 지옥도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가룟 유다가 개입된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와 택하지 않은 자가 엄연히 있다는 것을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적이고 인간적인 믿음을 갖고 있는 베드로를 택하셔서 초대 교회를 이끄는 수장(首將)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두 제자에 속했어도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 유다와 같은 존재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격려하고 도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들인 것을 믿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택하시지 않았다면, 아무리 좋은 믿음을 갖고 있다 해도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을 겁니다. 때로 방황하면서 하나님의 품을 떠나지 못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것은 여러분의 모든 가정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의 육적 믿음이 영적으로 변화할 때가 되었습니다. ‘인간적 믿음’이 ‘말씀 중심의 믿음’으로 변화할 시기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 고백과 삶이 하나로 일치하기를 축원합니다.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사오니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주님은 나의 주님이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리고 내가 믿고 알았습니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처럼 일시적이 아니라, 주님 앞에 갈 때까지 지속하는 영적인 고백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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