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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에 대한 세가지 질문 (요 08: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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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언제나 확실하고 분명한 것만은 아닌 듯 합니다. 불확실하게 보이기도 하고, 때로 오류라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똑같은 볼펜도 보는 각도에 따라 크기가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한강에 흐르는 물의 색깔도 하늘에 떠있는 구름의 종류에 따라 맑게 보이기도 하고 어둡게 보이기도 합니다. 한 사람을 두고 보는 위치에 따라 앞모습, 뒷모습, 옆모습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예수님을 달리 해석하고 오해하는 것을 지금까지 우리는 말씀으로 지켜 봐 왔습니다.

믿고 순종할 때 보이시는 하나님
유대의 바리새인들은 편견에 가득 찬 시선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모든 인간은 문화적, 사상적, 종교적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 편견에 따라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옳다고 주장합니다. 종교적인 편견이 아주 심했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고 말씀하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그 말씀을 곱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증거가 자신이 스스로를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참되지 않다고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편견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변함 없이 당당하게 자신에 대해 주장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세 가지 질문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19절 말씀에 있습니다.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두 번째 질문은 22절 말씀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려는가”

세 번째 질문은 25절 말씀입니다.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위와 같은 질문들은 긍정적이기보다 부정적이고 냉소적입니다. 이 질문들은 우리에게 예수님에 대해 좀더 분명히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기도 합니다.

먼저, 첫 번째 질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 질문은 18절 말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네 증거가 참되지 않다’고 반박하자,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해 증거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렇다면 네 아버지가 어디에 있느냐’고 공격적으로 질문합니다.
사실 우리는 어떤 영적인 일을 할 때 말로 설명할 수 없어서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을 누군가 부인하고 증거를 대라며 다그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상대편에서 ‘다 아시는 하나님이 누구냐, 어디에 있느냐, 보여 달라’고 요구하기도 합니다. 바리새인들도 역시 예수님에게 ‘네 아버지가 누구며 어디에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아주 간단하고 직선적입니다.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지금 너희가 나를 의심하고 비판하기 때문에 너희들 눈에는 나의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어느 누구도 함부로 보거나 듣거나 만질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실체는 그분을 믿고 받아들이며 긍정하는 태도에서 느낄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없이 냉소적이며 불순종하는 마음이라면 하나님이 계셔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신뢰한다면 상대편이 느껴지고 보일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것저것 따지고 요리조리 의심하며 공격한다면 그 사람이 잘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상처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정적으로 접근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괴롭고 힘들며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우리는 공연히 하나님께 주먹질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구도자적인 자세와 어린아이 같은 심성, 그리고 진실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을 알아보려고 노력할 때, 놀랍게도 그분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들에 핀 한 송이 꽃이나 공중에 나는 한 마리 새를 볼 때, 하나님을 믿고 창조하심을 인정하는 사람의 시각과 하나님을 믿지 않고 진화론을 믿는 사람의 시각은 전혀 다릅니다. 과연, 신비한 육체의 모든 시스템을 인간이 스스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육체에서 하나님의 숨결, 손길, 창조적 아이디어를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의 물질이나 과학적 대상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삼라만상의 변화를 보면서 하나님을 느끼십니까?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여주겠다’고 하신 게 아니라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속하신 분
22절 말씀에서 두 번째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두 번째 질문을 하게 된 동기는 21절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서 연유합니다.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이 말씀에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너희가 나를 찾아보려고 애쓰지만 결국 찾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예수님을 알 수 없나?’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죄’ 때문입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인간은 죄 가운데서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는 거룩을 보지 못합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습니다. 악은 선을 보지 못합니다. 불의는 정의를 깨닫는 눈이 없습니다. 불의한 인간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눈이 없습니다. 인간은 죄 때문에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죄 중에서 죽게 됩니다.

둘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쫓아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더욱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신다는 개념을 그들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의 무모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죽을 죄를 지어 십자가 처형을 받아야 했던 사람들도 십자가를 피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능인데, 어떻게 스스로 십자가에서 죽겠다고 자청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그럼, 예수가 자살하겠다는 게냐?’며 반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한 사람은 십자가, 부활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지성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님은 몰라도 십자가는 이해하려고 합니다. 죽음은 누구든지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활은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부활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말라고 합니다. 23절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자살로 몰고 가려는 사람들에게 설명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두 가지 문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질과 소속의 문제입니다. 첫째, 예수님의 본질은 하나님에게서 났다는 것이고, 인간의 본질은 땅에서 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자고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인간은 가끔 피조물의 본질을 망각하고 하나님과 맞서려 합니다. 인간의 기준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논리를 전개해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 피조물 바리새인들은 동등한 신분일 수 없습니다.
둘째, 소속의 문제에서 예수님은 이 세상 소속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신 분이십니다. 반대로 인간은 이 세상에 속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
바리새인들의 세 번째 질문은 25절 말씀에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도대체 너는 누구냐?’고 질문합니다. 이것은 24절 말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인간은 누구나 원죄를 가진 죄인입니다. 이 사실을 모른다면 인간의 문제는 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문제도 풀리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본질상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자신의 실존 문제를 해석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 인간은 병들고 고독하며, 허무하고 부질없으며, 철이 없고 실수 연발일까? 인간의 내면 세계는 어떤 것일까? 왜 인간은 상처가 있고 거절감이 있을까? 인간 자체는 매우 복잡한 구조를 띠고 있습니다. 인간론에 관한 해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부터 문제의 해결이 시작됩니다.

환자에게 필요한 사람은 의사입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합니다. 죄인이 아니라면 구원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실존적으로 깨닫고 경험할 때 하나님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죽음의 존재, 한계를 가진 존재, 병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참된 은혜란 인간 자체가 부패한 본성을 가진 타락한 죄인인 것을 고백했을 때, 죄인을 살려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참된 은혜는 잃었던 생명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 아니라면 하나님, 구원, 은혜도 없는 것입니다. 24절에 숨겨진 뜻은, 우리가 죄인으로서 영원히 심판 받아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서 풀려나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눈앞에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구세주이십니다. 24절 말씀에서 마지막 부분을 한번 더 강조하고 싶습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 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나님의 뜻만을 말씀하심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당신은 누구냐’고 질문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아주 통쾌하고 간단하며 확실합니다.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해 온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얼마나 확실한 메시지, 설득력 있는 말씀인가요. 예수님의 말씀과 구원, 그리고 죽음은 한결같습니다. 26, 27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서 말하노라 하시되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님의 주장은 한결 같습니다. ‘나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말하지 않겠다. 나는 아버지께 들은 이야기만 말하겠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까지 이 태도를 견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증거는 참되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사로운 주장이나 생각이 아니라 철저히 아버지의 뜻만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설교자의 자세입니다. 아버지의 생각을 그대로 전해주는 것이 설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2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두 가지를 제시하셨습니다. 첫째는 ‘내가 들림을 받으면 내가 누군지 알 것이다’. 둘째는 ‘내가 한 번도 내 말을 하지 않은 것을 너희들이 알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지만, 자신의 특권을 포기하시고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전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안심하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십시오. 인류 역사상 존재했던 악한 사람들, 독한 사람들, 상처받은 사람들, 슬픔에 빠진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위로와 회복을 얻는 까닭은 그 분께서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 중에 예수님에게 상처받은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2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 대한 예수님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 결코 하나님은 나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오늘, 끼니마저 제대로 잇지 못할 정도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때로 건강, 사업, 가정에 문제가 생겨 절망에 처할 수가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나를 보내신 이는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시 27:3).

세계 3차 대전, 핵전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신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판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세 가지 질문을 받으신 후 그 대답을 통해 주신 메시지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들, 우리가 세상을 살아나가는 것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믿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나와도 함께 하신다. 하나님께서 나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또 ‘내가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다’는 믿음도 갖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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