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나면서 소경된 자 (요 09:13-23)

첨부 1


본문 9장 17절 “이에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대”라는 말씀과 23절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저가 장성하였으니 저에게 물어 보시오 하였더라”는 말씀에 주목하여 주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제자들은 길거리에서 구걸하고 있던 태어나면서 소경된 사람을 보고 예수님께 질문 합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은 자신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이 질문에 예수님은 직설적으로 분명하게 메시지를 주십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은 본인이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이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믿음-고난을 해석하는 힘
믿음은 사건을 해석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했을 때 어려워하는 이유는 고난 자체가 해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록 가난하고 힘들고 병이 들어도 그 고난을 해석할 수 있다면, 오히려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한 순간에 모든 비극과 절망을 복과 영광으로 바꿔 놓는 계기가 됩니다. 이제 더 이상 인간은 운명론이나 원죄론으로 핑계 삼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허무, 좌절, 소외감, 불평등, 고통 등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그런 것들이 존재한다고 해석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도쿄에 일본을 대표하는 미네노 목사님이 있습니다. 저는 그 분과 교제하며 친하게 지내던 중에 그 분의 간증문을 읽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목사님은 사생아였습니다. 그래서 젊은 미네노는 좌절하고 방황하며 청춘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고 지금은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로 변신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자기 출생의 비밀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한 사건이었다고 간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에게 인생의 의미를 해석해 주셨을 뿐 아니라, 눈을 뜨는 복도 함께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주님께서 주시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구원도 받고 동시에 건강의 복도 받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생활에서 주님의 복이 흘러넘치기를 축원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눈을 뜨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며 충격을 받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크게 네 가지 분류로 반응을 보입니다. 첫째는 소경된 사람에 대해 평소에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지난 주 본문 말씀에서 8, 9절에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변화를 이끄는 참된 신앙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기 때문에 소경의 주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전에 소경이었던 사람이 맞다, 아니다 로 논쟁을 벌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영적 교훈이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지 못했다면, 아마 우리는 가짜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이나 믿은 후에 동료, 친구, 친척들에게 아무런 변화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카이스트(KAIST)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의 성경 공부 모임이 발전해 설립되었습니다. 당시 카이스트에 김기순 박사님이 계셨는데, 그 분이 간암에 걸렸습니다. 비교적 젊은 나이인 40대 초반에 죽음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부인과 그 분의 친구들이 저를 찾아와 울면서 기도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울대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제가 처음 뵙는 분이었는데, 김 박사님은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그 분께 말했습니다. ‘교수님에게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해 얘기할 시간이 없습니다. 제가 교수님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은데, 교수님이 하나님을 믿어야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도전했습니다. ‘교수님, 하나님을 믿으시겠습니까?’ 그 분은 눈을 깜박깜박 하시더니 믿겠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병원을 나와 혼자 길을 걷으며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하나님, 젊은 사람을 이대로 데려 가시겠습니까?’하고 혼자 기도했습니다. 어쨌든 그 분은 두 달만에 퇴원하고 직장에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교회에 나오셨습니다. 처음에 저는 그 분이 은혜를 받아서 교회에 나오는 줄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 젊은 전도사가 자기를 위해 기도해 주었고 퇴원하게 되었으니 미안한 마음에서 교회에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그 분의 신앙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 중에 새해 1월 2일 밤 12시에 그 분의 부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남편이 이상하다며 급히 와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분의 이상한 모습들은 귀신이 나가는 현상이었습니다. 충혈된 눈으로 그분이 크게 소리를 지르자 피가 터져 나와 선혈이 낭자했습니다. 부인은 생전 처음 보는 일에 겁을 먹고 옴짝달싹 못했습니다. 저는 안수 기도했습니다. 그 일 후로 그 분은 기도원에 다니면서 변화되었습니다. 김 박사님은 카이스트 동료들과 직원들을 모아 놓고 이야기했습니다. “너희들은 나에 대해 잘 알지 않느냐. 술 좋아하고 테니스 좋아하는 것을…. 이제 너희들은 나를 다시 봐라. 나는 간증을 하겠다.” 그래서 카이스트 내에 성경 공부 모임이 만들어지고 그것을 기초해 우리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때 제가 기억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친구 분들이 김기순 박사님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일들이 사실이냐, 그럴 수가 있느냐’하고 물어왔습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만나면 주위 사람들은 충격을 받게 됩니다.
진정한 믿음은 사람들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옵니다. 소경이 눈뜨는 것 같은 일이 아니더라도, 미워하던 사람을 용서하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을 버리며 인생을 뒤바꿔 버리는 영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럴 때 부모, 자녀, 친척, 친구들이 놀라고 당황하게 됩니다.

저는 대학생이었을 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장로, 권사이셨던 부모님은 크게 놀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니다. 적당히 믿어야 한다.” 아버지는 혹시 제가 정신이 이상하게 된 줄 아시고 주위 사람들에게 아들을 좀 말려 달라고 부탁하신 적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또 자신만 변할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도 변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바로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일어났습니다. 옛 사람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되고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 되며 어둠의 자녀가 빛의 자녀로 되는 복이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자신이 알고 느끼는 변화, 다른 사람들도 아는 변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자신의 변화에 스스로 놀라고, 주변 사람들도 놀라며, 하나님께서 놀라시는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복음은 간단한 진리
둘째는 바리새인들이 보인 반응입니다. 13절에서 15절까지 말씀입니다.
“저희가 전에 소경 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 어떻게 보게 된 것을 물으니 가로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이 눈을 뜨게 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그를 데려고 바리새인을 찾아갔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 두 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는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종교 지도자였고 백성들의 멘토였기 때문에 이 엄청난 사건에 대해 그들의 해석을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날이 안식일이라 사람들의 마음에 안식일에 대한 율법의 문제가 걸려서 바리새인들에게 물어 보려 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도 소경이었던 사람이 눈을 뜨게 된 것을 보고 사건의 해석과 안식일 문제로 고민했습니다. 예수가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것은 사실인데, 이것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느냐가 문제였습니다. 평소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이단이라고 몰아붙였기 때문에 무척 당황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전에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사건의 자초지종과 눈을 뜨게 한 사람에 관해 물었습니다. 그는 거침없이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그분이 진흙으로 내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여 씻었더니 눈이 떠졌습니다.” 이렇듯 복음은 간단한 것입니다. 귀신이 많은 사람은 생각도 복잡합니다.
소경이었다가 눈을 뜬 사람은 아주 간단하게 있는 그대로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대답을 들은 바리새인들의 반응을 16절 말씀에서 보겠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바리새인들도 두 가지 의견으로 나눠졌습니다. ‘예수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보면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다’는 의견과 ‘병 고친 것을 보면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이다’라는 의견이었습니다. 16절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리새인들은 앞을 보지 못한 소경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전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예수가 안식일을 지켰느냐 지키지 않았느냐는 것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종교의 잘못된 관심입니다.
교회의 진정한 관심은 교회법이나 교파가 아니라, 사람을 귀히 여기고 실족하지 않도록 격려하는 데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교회 건물, 제도, 방법 등에 있지 않고 사람에게 있습니다. 사회는 사람을 제도의 이용물로 여기는 경향이 팽배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종교적 전통과 가치를 더욱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구원에의 확실한 고백
셋째는 눈을 뜨게 된 자신의 반응입니다. 그는 눈을 뜨고 난 뒤에 세 가지로 반응했습니다. 하나, 그가 하는 말에 수식어가 없습니다. 둘, 그는 항상 대답이 일정했습니다. 누가 물어 봐도 ‘나는 소경이었는데, 그분이 눈에 진흙을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어라 해서 씻었더니 눈이 떠졌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셋, 그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이든 제사장이든 겁내지 않고 대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빠지게 됩니다.

9절 말씀에서 많은 사람들이 소경이었던 자신을 보고도 확신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자, 그는 “내가 그로라”하고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17절 말씀에서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라는 질문에 “선지자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오직 선지자라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다만 그가 알고 있는 분명한 사실은 자신이 소경이었다가 눈을 떴다는 것과 눈을 뜨게 해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실을 소경이었던 사람처럼 간단하고 진실하며 확실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8장 1, 2절의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는 말씀에 믿음을 갖고 ‘나는 구원받았다’라고 확실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지식에는 확신이, 이성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확신이 없는 지식, 믿음이 없는 이성은 사람을 방황하게 만듭니다.

에베소서 2장 3절에서 7절은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까닭
넷째는 재미있게도 소경 되었던 사람의 부모님의 반응입니다. 18절과 19절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바리새인들은 소경이었다가 눈을 뜨게 된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며 그의 부모를 불렀습니다.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진리를 찾으려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건의 진실 여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은 확실한 증거가 있어도 결코 예수를 믿을 수 없다는 오만, 독선, 편견 등으로 가득 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아무리 옳은 얘기를 해줘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소경이었던 사람을 미숙하고 이성적이지 못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을 믿지 않고 그의 증거에 대해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뒤 그의 부모를 불렀습니다.

20절과 21절 말씀입니다.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그 다음 구절의 말씀에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의 부모는 예수님에 대해 말하기가 겁이 나서 돌려서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마음에는 두 가지 사실이 깔려 있습니다. 하나는 아들이 눈을 뜨게 되어 너무 좋은 것입니다. 또 하나는 바리새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무서워해 사실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근거해,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복음을 거부하는 세 가지 이유를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 사람이 잘못된 지식과 편견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의 섭리를 오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소경 된 것이 본인의 죄 때문인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 묻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생각이나 관점을 바꾸면, 그 순간 모든 상처는 사라지고 행복이 찾아옵니다.

둘, 율법주의로 인해 안식일을 지켜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종교적 관념이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셋, 예수님에 대한 그릇된 편견과 선입관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교회 성도님 여러분, 여러분 모두가 소경이 눈을 뜨는 것과 같은 감동과 복, 그리고 기적을 경험하며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온 세상에 나눠주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