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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요 12: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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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속담에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려 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명백한 사실을 감추려고 할 때 빗대어 하는 말입니다. 또 ‘손바닥 뒤집듯이 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계속 말을 바꾸며 거짓말을 할 때 쓰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베푸신 많은 기적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난 사실도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는 식’이라고 반응했습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살아 나온 나사로가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마저도 은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9절 말씀을 봅니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예수님께서 베다니 소재 시몬의 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큰 무리의 유대인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 계신다는 말 한마디가 많은 유대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입니다. 9절 말씀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든 이유를 두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예수를 보는 즉시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상황이었습니다. 아마 사람들의 마음속에 예수를 잡으려는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소문이 예루살렘에 파다하게 퍼졌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 사이에 ‘과연 죽은 자를 살린 사람이 누구일까? 어떻게 죽은 자를 살릴 수 있을까?’라는 호기심이 일었을 것입니다. 과거에 예수를 본 적이 있지만, 다시 한번 보려는 사람들과 예수를 체포해 보려는 사람들 모두 베다니 시몬의 집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또 다른 이유가 9절 말씀 후반부에 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나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소문만 들었습니다. 과연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다면 그의 얼굴과 몸은 어떨지, 죽었을 때 느낌은 어땠는지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려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요즘은 텔레비전으로 볼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호기심이나 영적 끌림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드러나는 진실
한편, 당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10, 11절 말씀으로 알아봅시다.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잡아다가 제거하려고 계획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사로까지 없애려고 합니다.
살인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죽이려는 의도가 없었지만 우발적으로 살인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돌발적인 살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연을 가장한 의도적인 살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두운 사건들 이면에는 음모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 어두운 일이 일어난 원인을 일반인들은 모르고 있지만, 뒤편에는 음모를 모의한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예수님과 나사로의 경우도 예외는 아닙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의한 결과는 예수뿐만 아니라 나사로까지 죽이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세 가지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진실은 숨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진실은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 진실은 순교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셋째, 진실은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진실은 가만히 있어도 크게 영향력을 미칩니다. 한 사람, 한 집단, 한 시대에 영향을 줍니다.
나사로는 ‘예수를 믿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라는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그분은 정말 구원자구나’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나사로는 살아있는 증인입니다. 누구나 나사로를 보면, 그를 죽음에서 살리신 예수님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를 보면서 ‘하용조’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부족하고 형편없는 사람을 목사로 만들고 오늘날 저렇게 있도록 하신 하나님을 느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의 지위와 지성, 사회적 신분을 보는 게 아니라 그가 그렇게 되도록 인도하신 예수님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모두 나사로와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난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과 변화, 축복을 주었습니다.
제가 대학생이었을 때 성경을 읽으면서 강하게 감동을 받았던 말씀이 바로 ‘나사로 까닭에’입니다. 성경책에 빨간색 동그라미를 얼마나 많이 쳤는지 모릅니다. ‘나사로 까닭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용조 까닭에’ 예수 믿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이런 질문은 처음 예수님을 만났던 대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제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예루살렘 입성
드디어 다음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33년입니다. 앞서 30년 동안의 기록은 별로 없고 공생애 3년 동안의 기록이 많습니다. 그 중에 마지막 1년 동안의 기록이 특히 많습니다. 1년의 기록 중에서도 십자가에서 죽기 전 1주일간의 기록이 가장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사건은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시며 40일 동안 지상에 계시다가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복음서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한다는 소문을 듣고 유대인들이 하나둘씩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가 들려 있었습니다. 유대인들 사이에 뭔가 흥분이 일고 있었습니다. 12, 13절 말씀에 그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 많은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모인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영적 호기심, 영적 갈증, 영적 끌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적 목마름을 갖고 삽니다. 사람들은 영적 갈증의 해갈을 교회에 기대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무기력해 영적으로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졸다가 그냥 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어떠한 기대감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어떻게 해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교회가 많은 부분에서 위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많은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홍수 때 마실 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종교 천국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은 종교 없이 살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고 진정한 구원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백성들에게 어느 누구도 해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세례를 베풀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우리는 그 시대에 영적 목마름, 영적 호기심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은 메시아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나가 흔들며 환호했습니다. 종려나무는 열대성 식물로 우리는 사진이나 영화에서 많이 봐왔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든다는 것은 사랑, 기쁨, 존경, 환영 등을 의미합니다.
이 종려나무가 요한계시록 7장 9, 10절 말씀에 기록돼 있습니다. 천상에서 일어날 일에 관한 것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천상에서 찬송을 부르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것입니다. 저는 요한계시록에서 이 말씀을 가장 좋아합니다. 보좌와 우뚝 서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수많은 영혼들이 흰 옷을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듭니다. 천국에서 일어나는 모습처럼, 지금 예루살렘 성문에서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나귀를 타신 메시아
그때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십니다. 상상해 본다면 매우 우스꽝스러운 모습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백마를 타고 오신다면 보기도 좋을 텐데 말입니다. 우리는 깃발을 높이 들고 기마병의 호위를 받으며, 백성들의 함성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하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나귀 새끼를 타시고 힘없는 백성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카펫 대신 사람들이 벗은 옷을 깔았습니다.
왜 예수님의 이런 모습이 중요할까요? 사람들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노래하며 함성을 질렀습니다. ‘호산나’는 히브리어로 ‘오, 구원하소서’라는 뜻으로 시편 118편 25절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시편 118편은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이며 당시 사람들은 항상 이 구절을 기억하고 찬송하며 메시아를 대망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모습을 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성하는 가운데 이 구절을 외쳤던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다는 사실입니다. 14, 15절 말씀을 봅니다.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이것은 매우 시적이고 소박한 모습이면서도 한편으로 희극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영웅이나 개선 장군 그리고 권력자처럼 세상을 호령하는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자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같고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 양과 같습니다.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도 없이 십자가에서 처절하고 비참하게 죽으십니다. 이분이 바로 메시아이십니다.

성취되는 예언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보통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모습에서 세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은 그분의 비전과 꿈이었던 십자가에서 죽음의 행진이었습니다. 그분의 예루살렘 입성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4복음서에 빠짐없이 모두 기록돼 있습니다.
특히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것을 제자들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막 10:32-34).

예수님께서 종려나무 가지를 든 사람들의 ‘호산나’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일을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이 곧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러 가는 길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이 십자가의 죽음을 뜻하는 것임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 중에 1주일 후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신의 미래를 분명히 알 수 있는 사람은 지금 밥 먹는 것, 예배드리는 것 등이 남들과 다릅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살기 때문에 오늘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성경 말씀의 응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습니다. 스가랴서 9장 9절 말씀에 이미 예언되었던 일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이것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입니다. 구약에는 메사아가 태어날 장소, 시간, 모습 등이 모두 예언돼 있습니다. 메시아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할 것이라는 예언도 구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왕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나귀 새끼를 타실 것이며, 나귀 새끼를 타시는 이유는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고 겸손하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내용이 본문 15절 말씀에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며 정확히 응답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2장 15절에는 구약 예언의 응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셋째,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을 유대인들의 명절인 유월절에 맞추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시간을 계산하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때를 유월절 어린 양이 죽는 날에 맞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그래서 그 날, 그 시간에 맞춰 인류의 제물인 어린 양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신 후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셨습니다. 그 날이 바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맞아 어린 양을 잡는 날이었습니다.
히브리서 9장 11, 12절 말씀에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어린 양이 죽은 숫자로 추론해 당시 인구가 25만 6천 명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유월절에 한 사람마다 어린 양을 한 마리씩 죽여야 했습니다. 즉 유월절에 25만 6천 마리의 어린 양이 죽임을 당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어린 양의 피가 강물같이 흘러 예루살렘은 피바다를 이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인간의 죄를 씻기 위해 이처럼 많은 어린 양들이 대신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친히 어린 양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이사야서 53장 5절 말씀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것이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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