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예수님 (요 13:3-11)

첨부 1


저는 요한복음 중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대목을 가장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그래서 지금 저는 무척 설레고 흥분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요한복음 1장부터 12장 말씀까지 공부했습니다. 이것을 성소에 비유할 수 있다면, 이제 공부하는 13장부터 마지막 장까지는 지성소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는 대중을 상대로 설교하셨고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논쟁하셨으며 권력자들과도 논쟁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대중들을 상대하시거나 공중 모임에는 가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소를 옮겨서 조그마한 다락방으로 열두 제자들을 불러 식사를 하십니다. 그것이 유명한 ‘최후의 만찬’입니다. 식사 중에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사적으로 이야기하십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비밀스럽고 깊이가 있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한복음 13장에서 17장까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백처럼 들려주시는 천국의 비밀들이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사랑을 고백하십니다. 1절 말씀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고 지극하며 애절합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도중에 포기하시지 않고 아무 조건 없이 생명을 바쳐 사랑하십니다. 13장 말씀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사랑을 이야기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일을 할 때 사랑에 대한 고백이 앞서지 않기 때문에 많은 문제들이 생깁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사랑을 고백한 후에 시작해야 합니다. 사랑이 기초된 다음에 일이 있는 것입니다. 2절 말씀을 읽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며 예수님은 그 사랑을 위해 생명마저 내던지십니다. 그에 비해 인간의 사랑은 열정이 있고, 왕관도 벗어 던지며 국경마저 초월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면에 배신이라는 마귀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귀가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을 팔겠다는 생각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죄는 마귀가 시켜서 한 것이고 인간은 아무 책임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마귀가 인간에게 죄를 짓게 할 생각을 집어넣는다 하더라도 인간이 그것에 동의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모든 죄는 마귀와 인간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죄에 대해 마귀가 저질렀다고, 인간이 본능과 속성에 따라 저질렀다고 변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과 다락방에 모여 소박한 만찬을 하십니다. 이 사건은 로마의 화가 미켈란젤로에 의해 ‘최후의 만찬’이란 그림으로 남겨져 세대를 이어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일어난 사건
왜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이 많은 사람들, 특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을까요? 만찬 중에 두 가지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당시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성만찬이 이뤄진 사건입니다. 마태복음 26장 26절에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27, 28절에서“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제자들은 이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떡과 포도주를 나눠 주시면서 나의 살과 피라고 말씀하신 뜻을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후에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아주 중요한 영적인 일들을 할 때가 있습니다. 곧 성만찬을 지키는 일입니다. 성만찬이란 쉽게 말해 예수님을 먹는 일입니다.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어서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만찬을 통해 예수님을 먹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갈등이 생기는 이유는 머리로 이해하려 하고 의지적으로 믿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의심이 들고 이성적인 논리에 맞지 않으면 갈등하기 시작합니다.
성만찬 사건을 통해서 본다면, 믿음이란 한 마디로 예수님을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그분의 피와 살의 흔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이 성만찬입니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은 아름다웠고 길이길이 후대에 전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음식을 드시던 중에 일어나셔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상과 같이 두 사건이 최후의 만찬 중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사건이 먼저 있고 나중인지 알지 못합니다. 4복음서에 두 사건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는 성만찬만 있고 반대로 요한복음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만 기록돼 있습니다.
4복음서를 합쳐 요약해 보면 성만찬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사건입니다. 단순히 사람의 발을 씻어주는 섬김과 겸손을 넘어서 성만찬이라는 의미를 가진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봉사나 헌신에서 십자가와 성만찬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다면 ‘자기의 의’에 그치고 맙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의 발 씻김, 섬김, 봉사, 헌신의 의미는 바로 성만찬입니다.

발을 씻기시는 하나님
3절 말씀을 읽습니다.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그들의 발이 더럽기 때문이 아닙니다. 문화나 습관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단순히 남을 섬기는 겸손과 섬김의 도리를 가르치시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구원의 상징적 의미가 있고 영적 통찰력이 있는 사건입니다.
현대 기독교는 착한 일, 좋은 일을 하는 선행 종교가 된듯 합니다. 그것이 다른 종교들에서는 가능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는 차원 높은 구원론에 본질적 핵심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영적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그냥 습관적, 도덕적, 윤리적으로 교회에 나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생애를 절대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는 개인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개인적인 변화가 없는 것은 가짜입니다.
우리의 더러운 발을 관습, 예의, 섬김, 봉사의 의미로 씻겨주는 것이라면 목욕업 종사자가 씻겨주는 것과 차이가 없습니다. 그들에게 돈을 주면 발뿐 아니라 온몸을 씻겨줍니다. 그런 봉사에는 감동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발을 씻겨주면 안되는 사람이 씻겨줄 때 감동이 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발을 씻겨주시니 큰 충격 속에 감동이 옵니다. 만약 집안의 어른이신 아버지께서 발을 씻겨주시겠다면 일순간 자녀들은 움찔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사건’입니다. 4, 5절 말씀입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종의 모습으로 사랑하시다
4절 말씀에서 몇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말씀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말이 없고 변명이 없습니다. 사랑은 조건 없는 행동이고 이유 없는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과 애정으로 아무 말 없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실 때 종의 모습을 가지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지배자의 모습이 아니라 종의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가 좋은 일을 하고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종의 모습이 아닌 능력자의 행색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종의 모습으로 헌신할 때 타인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겁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은 육체적 노동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말과 생각만으로 사랑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젖은 발을 수건으로 닦아주시며 깨끗이 마무리까지 하십니다. 진정한 사랑은 다른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것을 한다는 뜻입니다. 나도 싫고 너도 싫은 것을 할 때 곧 사랑입니다.

넷째,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모습에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으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이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인가요. 힘 있는 사람이 양보하는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 양보하면 감동을 주게 됩니다.
아주 귀하신 분이 종의 모습으로 다가오실 때 우리는 형언할 수 없는 존경과 사랑을 보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만약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한국의 우리 교회에 와서 하용조 목사의 발을 씻겨주었다면, 아마 CNN 방송을 통해 전 세계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부시 대통령이 우리 교회에 올 수 없는 사람인데, 와서 저의 발을 씻겨주었기 때문입니다.

이후에는 알리라
세상에 올 수 없는 분이 친히 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한 사람씩 씻기시고 마지막으로 베드로에게 이르렀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심기가 매우 불편해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차라리 예수님께서 ‘베드로야, 이리 와서 나의 발을 씻겨라’고 하셨더라면 편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역시 주님은 나를 알아보신다니까’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차츰 다가오시자, 베드로는 불안해 하고 화가 치밀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라고 말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교만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일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흔히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 끝가지 개인의 자존심, 체면을 염두에 둡니다.

지금 베드로가 그런 감정에 빠져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께서 이렇게 창피를 주십니까. 차라리 제게 주님의 발을 씻기라고 말씀하십시오. 그러면 제가 신이 나서 씻겨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허락지 않으십니다. 7절 말씀을 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베드로는 단순히 발 씻기로 보았지만, 예수님께서 영적 의미를 두셨습니다. 똑같은 사건을 두고 주님과 베드로는 대화가 되지 않고 뜻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물러서지 않고 막무가내입니다. 8절 말씀을 읽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베드로는 주님께서 절대로 자신의 발을 씻기지 못하신다고 우깁니다. 예수님께서는 “너의 발을 씻기지 아니하면 인연을 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곧바로 베드로는 겁을 먹고 태도를 바꿉니다. 9절 말씀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베드로는 처음에 절대로 발을 씻기지 못한다고 우기다가 나중에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양극단의 신앙으로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극단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단은 다를 이(異), 끝 단(端)입니다. 처음은 같은데 끝이 다른 것입니다. 지나치게 한 쪽을 강조하거나 극단적으로 몰고 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구원받은 자의 자세
예수님께서 상상도 못할 정도로 기가 막힌 대답을 하십니다. 10, 11절 말씀을 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겸손과 온유와 섬김의 도리가 무엇인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세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 진정한 믿음이란 하나님께 무엇을 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행동하기보다 더욱 어려운 것은 수용하기입니다. 무엇을 해야 기분이 좋고 어떤 것을 해야 생색이 나는지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일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발을 씻겨주신다고 할 때 발을 앞으로 내놓는 것이 겸손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못하겠다고 우기는 것은 오만이요, 교만입니다.

둘, 발을 씻는다는 것과 목욕을 한다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발을 씻는 것은 회개를 가리키고 목욕을 하는 것은 구원을 가리킵니다. 구원 받은 자는 다시 구원을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목욕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목욕은 했지만 손발은 항상 더럽습니다. 우리가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손발을 닦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순간마다 더러워진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회개합니다. 이것이 곧 ‘발 씻기’입니다.

셋, 극단적인 신앙은 위험합니다. 건강한 신앙은 모든 면에서 균형이 잡혀 있습니다. 사람이 신체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은 어느 한 부분이 발단한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전체가 골고루 발달한 것을 말합니다. 성도는 믿음과 행동의 균형이 필요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균형이 필요합니다. 십자가의 죽는 일도 필요하지만 부활의 영광도 필요합니다. 성령과 말씀의 균형이 필요합니다. 근로와 휴식의 균형이 필요합니다. 침묵할 때와 웅변할 때의 조화도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겨주는 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