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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빼앗길 수 없는 기쁨 (요 16: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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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요한복음 16장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대해 두 가지로 표현하신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는 보혜사 성령님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의 성령님인 것입니다. 그리고 불, 바람 같은 성령님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보혜사 성령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세 가지 일을 하십니다. 죄, 의,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책망하다’는 말은 잘못을 지적해 주고 깨닫게 한다는 긍정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제아무리 자신은 죄가 없다고 우겨도, 보혜사 성령님께서 죄를 깨닫게 하시면 곧 죄인임을 인정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죄를 지었지만, 개개인은 나름대로 자신만은 선하고 착하며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깨우치심으로 인해, 자신의 의는 걸레와 같고 선행은 위선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님께서 세상 끝 날에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겸손해지고 자신의 한계를 고백하며 세상의 종말을 인정하는 역사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지상 사역
진리의 성령님께서 이 땅에서 세 가지 역할을 수행하십니다. 첫째는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신의 잘못된 생활양식, 사고방식, 가치관, 사상 등을 깨닫고 돌이키게 됩니다.
둘째는 진리의 성령님께서 자의(自意)로 말씀하시지 않고, 오직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만 들으시고 그대로 전하십니다.
셋째는 진리의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과거와 현재를 알게 하시는 것은 물론이고 미래의 일도 알려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새로운 꿈을 꾸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개인이나 교회를 통해 이루시려는 뜻을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 주십니다.
보혜사 진리의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것’을 가지고 성령님께서 말씀하실 것이라고 단정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령님께서 결코 자신을 내세우시거나 주장하시지 않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 이룸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묵묵히 주님의 뜻에 따르게 됩니다.
또 진리의 성령님께서 오셔서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따라서 본문 말씀의 메시지는 성령님과 부활에 관한 것이 됩니다. 성령님과 십자가는 하나의 관계입니다. 보혈의 강은 곧 성령의 강이 됩니다. 진정한 성령 체험은 보혈 체험으로 되고, 보혈 체험은 성령 체험으로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곧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임하시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함 받는 보혈의 체험이 일어납니다. 죽은 몸도 일어나고 모든 절망을 희망으로 바뀌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믿음에서 부활이 정점인 이유는 부활이 죽음의 권세를 이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가능의 벽에 갇혀 있던 우리를 가능의 세계로 옮겨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으로 풀 수 없는 부활의 진리
우리가 성령님을 받으면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 마음에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시는 성령님께서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에 대해 매우 밝고 건강한 자아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 말씀을 통해 부활의 세 가지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16-18절 말씀입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의 상식과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영적 진리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3년 동안 지내며 함께 먹고 마시며 지냈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천국 말씀을 전하시고 기적을 일으키는 모든 일들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16절의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3일 후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제자들은 다시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성령님을 받은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해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오셔야 우리는 부활의 진리에 대해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이나 상식 그리고 경험으론 부활의 진리를 깨달을 수도, 인정할 수도, 믿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부활로 기독교 신앙
17-18절 말씀에서 ‘모르다’는 동사가 두 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해 제자들은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압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천국으로 간다는 확실한 믿음 위에 서있습니다. 그 믿음을 굳게 잡고 항상 ‘아멘, 할렐루야’로 화답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확신하지 못하고 자꾸 흔들리는 사람은 영적 진리를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으로 이해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진리는 인간의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십자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누구나 죽음을 이해하면서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해선 일언반구(一言半句)도 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인간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사실을 생각지도 못하고 더구나 믿지도 못합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 철학, 윤리, 사상 등에 부활은 개념조차 들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종교나 학문이나 이론 등은 부활 이하의 것들입니다. 우리는 부활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사실 앞에서 우리의 믿음 체계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이제 보통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죽는다는 것도 큰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의미를 지닌 죽음이라도 그 자체로 끝나버리면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죽음이 부활로 바뀌지 않는다면 죽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6-18절에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은 나무에 꽃이 피는 것을 희망하지 않은 사람에게 꽃이 피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관해서 이야기하는데, 그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부활에 관한 것이고 부활의 능력은 우리의 삶을 뒤바꿔 놓은 것입니다.
이미 알고 있듯이,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우리에게 반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기쁨
부활은 인간의 상식과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데, 억지로 이해하려고 하면 황당해질 뿐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가르침으로 이해하게 되면, 부활은 축복이고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20절 말씀을 읽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믿는 사람들은 이 말씀에 대해 아주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되니 사람들은 곡하고 애통합니다. 반대로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대제사장들은 물론이고 세상 사람들은 좋아서 너무나 기뻐합니다. 주님의 죽음이 한 무리의 사람들에겐 곡과 애통이 되고, 한 무리의 사람들에겐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선 죽음으로 끝내시는 분이 절대 아닙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죽음으로 끝나는 종교가 아닙니다. 애굽의 신앙은 죽음의 종교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스핑크스를 만들고 피라미드를 만든 것입니다. 일평생 무덤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종교적 행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죽음의 권세를 이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절망에 갇혀 있지도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무덤 안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왕 중의 왕께서 부활하셔서 독수리가 창공을 향해 날아가듯, 하나님의 세계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삼 일 후에 부활하시면 곡하고 애통하던 제자들은 기뻐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인 것입니다. 믿는 자의 본질은 기뻐하는 것입니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고 천국으로 향하게 되니 슬퍼하고 싶어도 슬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어떤 험한 일을 당해도 그것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이고 예수님입니다. 21, 22절 말씀입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즘 우리나라가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보고 우울증이 생기는 바람에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도 대부분이 비관적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없어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그것이 더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국가 안보, 민족 정체성에 대해서도 혼란을 겪고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지켜주시고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향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고, 궁극적으로 승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부활을 소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산이나 바다나 감옥에서나 어디서든 항상 기쁨으로 찬양할 것입니다.

믿음에 뿌리를 둔 부활 신앙
우리에게 주신 부활의 기쁨은 흔들리지도 않고 빼앗기지도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로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는 것은 그 믿음의 뿌리가 뽑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믿음의 가지만 흔들릴 뿐입니다. 그 믿음의 뿌리에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 신앙을 가진다면 믿음의 뿌리에 겨울이 닥쳐오고 가지가 잘려나가며 모든 잎들이 떨어진다고 해도 생명력은 그대로입니다.
부활 생명은 모든 것들을 다시 살아나게 합니다. 망해도 일어서고 병들어도 죽지 않으며 죽더라도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가 부활 믿음을 가진다면 세상에서 어떤 일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환경적인 요소로 인해 겪게 되는 어려움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안개와 같습니다. 태양이 떠오르면 안개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립니다. 우리는 바람이 불고 폭풍우가 몰아친다고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도 지나가고 나면 그만입니다. 안개도, 바람도, 폭풍우도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것은 오직 주님의 빛입니다. 23, 24절 말씀을 봅니다.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인간은 이성이나 상식 등으로 부활을 이해할 수 없고, 부활의 기쁨은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부활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통로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활로 인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십자가가 끝이면 더 이상 갈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크게 열린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데 걸리는 모든 장애물들을 완전히 제거해 줍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의혹이 생기고 궁금한 것들이 많아져 의문을 품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확실한 증거가 되니 우리는 모든 의문들을 풀게 됩니다. 질문할 것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부활을 경험하기 전과 후는 기도부터 달라집니다. 부활의 경험이 있기 전에는 희망을 기도하지만, 부활을 경험한 후에는 약속을 기도합니다.

이제 ‘약속의 기도’를 하다
하나님께 기도한 대로 이뤄 달라고 하는 것은 희망의 기도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상식으로 희망의 기도밖에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을 요청하는 것은 약속의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는 이미 응답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경험한 기도는 감사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이미 응답되었음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진짜 기도는 성령님께서 임하시는 부활의 기도이고 약속의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약속 가운데 응답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약속을 의지해 하나님께 나아가게 합니다. 지금의 인생은 고통이고 목마름이지만, 곧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축복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이미 성령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깨닫게 하십니다. 그분은 진리의 성령님이십니다.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시고 예수님께 들은 말씀만 전하시며 또 장래 일을 가르쳐 주십니다.
성령님께선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십니다. 곧 부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부활은 우리 믿음의 근본이고 뿌리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으로 약속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이나 생각으로 기도하는 게 아니라, 성령님에 의한 약속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생각에 혁명이 일어나고 믿음의 패러다임에 변화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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