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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자들을 위해 중보기도하신 예수님 2 (요 17: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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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중보 기도는 가장 먼저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힘들고 어려운 고통의 십자가를 피하지 말고 짊어지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십니다. 그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원래 하나님께 속한 제자들을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보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보통 우리는 ‘제자’라 하면, 흔히 훈련을 시키거나 전문 지식을 전수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제자는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선 많이 부족하고 여러 모로 미숙한 제자들을 품으시고 그들이 성숙할 때까지 끊임없이 사랑으로 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좀더 구체이고 실제적으로 중보 기도하십니다. 11절 말씀을 다시 확인해 봅시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가 되게 하소서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한 중보 기도에서 그들을 하나 되게 해 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인 인간의 본질이 분열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사람은 두셋만 모이면 서로 비판하고 싸우며 편 가르기를 합니다. 사랑하고 협동하는 게 아니라, 갈등하고 반목하며 헤어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처음에 서로 사랑할 것 같고 함께 나눌 것 같으며 모두 평화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부패한 면을 드러내고 맙니다. 사람이 서로 미워하고 헤어지는 이유는 그 속에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겉으로 도덕과 교양과 체면으로 무장하고 있을 뿐, 세월이 지나면 그 죄성의 뿌리를 드러내고 맙니다. 인간은 누구나 소유, 권력, 의심 등에 대한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잘 믿다가도 의심하고 갈등하게 됩니다. 따라서 사회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동업(同業)인 것 같습니다. 주님의 사역에서 동역자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은 분열의 영이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싸움을 만들뿐 아니라 교회마저 다투게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서 헤어지고 ‘파송’으로 헤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반면, 성령님은 연합과 일치의 영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우리에게 회복과 치유가 있고 변화가 일어납니다. 틀린 것을 옳게 하시고 그른 것을 바르게 하시며 나뉜 것을 하나로 만드십니다.
예수님께서 화해자로 세상에 오셔서 친히 화목 제물로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부탁하신 말씀도 세상을 화목케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은 천사도 감당할 수 없는 직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떤 곳에 있든지 화해자로 존재해야 합니다. ‘트러블 메이커’(trouble maker)가 아닌 ‘피이스 메이커’(peace maker)가 돼야 합니다.
화해자의 특징은 한마디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화해자로서 치러야 할 대가는 반드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12절 말씀입니다.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보호하시고 지켜주소서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한 중보 기도에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지켜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11절 말씀에서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12절 말씀에서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라고 기도하십니다. 성도의 안전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로 안전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발견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성’(城)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성을 쌓습니다. 곧 바벨탑인 것입니다. 크고 단단한 성을 높이 쌓다 보면, 저절로 타인과 단절 됩니다. 인간이 느끼는 외로움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과의 교제를 모두 끊고 혼자 골방에 들어가 이불 뒤집어쓰고 있다면 외롭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외로운 사람은 이불을 걷고 골방에서 박차고 나와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외로움을 떨쳐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온전히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노력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법입니다. 개인적으로 성실하게 처신한다고 모든 문제들이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거기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 23편 1절에서 4절까지 말씀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찬송하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를 지켜 주시고 우리의 자녀들도 지켜주십니다. 품안의 자식이지 그들이 성장해 가면 부모는 자식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보호해 주시도록 우리는 중보 기도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남편이나 아내도 지켜주시도록 중보 기도해야 합니다. 13절 말씀을 봅니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기쁨으로 충만케 하소서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한 중보 기도는 그들을 기쁨으로 충만케 해 달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교리 중에 독특한 것은 기쁨입니다. 기독교는 단적으로 말해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며, 좌절이 아니라 희망입니다. 빌립보서 4장 4-5절에서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옥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이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할 수 있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기쁨은 세상의 기쁨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기쁨은 쾌락, 명예, 물질 등을 말합니다. 집 한 채 샀다고, 좋은 자동차를 구입했다고, 원하는 옷을 샀다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하루도 채 가지 못하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기쁨은 천국, 거듭남, 부활 등을 가리킵니다. 외면적인 기쁨이 아니라 내면적인 기쁨을 말합니다.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기쁨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세상의 어떤 불행이나 슬픔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기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4, 15절 말씀을 읽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악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네 번째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한 중보 기도에서 그들을 악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서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마지막 심판을 행하실 때까지 사탄은 제한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악은 항상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기를 ‘내가 십자가에서 사탄을 완전히 패배시켰으나 다시 와서 마지막 심판을 행할 때까지 믿는 자들을 악에서 보호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는 내면적인 면을 말하는 것이고, 악에서 보호해 달라는 기도는 외면적인 면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악이고, 시험을 받는 것도 우리입니다. 우리는 양면에서 취약한 존재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가장 쉽게 찾아오는 시험이 바로 ‘섭섭이’입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사역할 때 괜히 섭섭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사람, 물질, 상황으로 인해 시험에 빠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험에 들게 되면 곧 마귀의 공격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그런 시험에 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도 사탄은 믿는 자들을 집어삼키려고 울부짖는 사자처럼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고 기뻐하며 돌아서는 순간, 바로 마귀가 기다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배 중에 충만했던 은혜를 주차장에서 쏟게 만들기도 합니다. 시험은 가까운 사람들에 의해 비롯되기도 합니다. 시편 말씀에서 마귀가 우리를 공격하는 방법은 나무 뒤에 숨어서 화살을 겨냥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의 심장을 향해 화살을 쏘는 격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저지시키려고 줄기차게 따라 다니며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세상은 사탄의 음모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지뢰밭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사는 동안 절대적으로 주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16절에서 19절까지 말씀입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거룩하게 하소서
다섯 번째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한 중보 기도는 그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중보 기도에서 최고는 바로 ‘거룩’에 관한 것입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는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성경 말씀은 모든 것들의 기준이며 근본입니다. 세상에 진리가 있기 때문에 비진리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 진리이며 기준인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그 기준을 갖지 않겠다는 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이런 사상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세상에 절대 기준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너는 네 좋은 것을 하고 나는 내 좋은 것을 하면 그만이지, 왜 네 좋은 것을 나에게 강요하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에 기준이 있고 표준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기준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특히 절대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의 진리 말씀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제자들을 거룩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십니다. 우리가 거룩해진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해진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이념, 사상, 훈련, 교육 등으로 결코 거룩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속성은 곧 ‘거룩’입니다. 거룩보다 더 높은 목표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 안에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가 포함됩니다. 거룩은 순결을 만듭니다. 즉 하나님의 거룩과 인간의 순결인 것입니다. 현대인의 특징은 한마디로 순결을 잃어버리고 양심에 갈등을 느끼며 산다는 것입니다. 순결을 잃어버린 인간은 공허함에 빠져 있는 상태입니다.

거룩의 결과는 ‘순결’
순결에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 육체적 순결이 있습니다. 즉 성적 순결을 말합니다. 둘, 정신적 순결이 있습니다. 즉 도덕적 순결로 거짓을 행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저는 며칠 전에 황장엽 선생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공산주의에 대해 한마디로 ‘거짓말의 집단’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거짓말을 하고도 아무런 갈등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방금 한 말을 그 자리에서 뒤집으면서도 인민을 위한 것이라며 전혀 문제 삼지 않는 게 공산주의라고 했습니다.
우리 사회에 신용 불량자들이 많다는 것은 단순히 사회 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 사회에 ‘거짓의 영’이 횡행한다는 뜻입니다. 신용 사회와 불신 사회의 차이는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순결하냐, 불결하냐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셋, 영적 순결이 있습니다. 즉 우상을 숭배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순결 서약 운동은 대학생들이 할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해야 합니다. 거룩은 곧 순결로 돌아옵니다. 인간이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순결할 때 허무와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인생에서 허무함과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곧 순결함을 잃어버렸다는 증거입니다.

인간은 그 영혼이 깨끗하고 거짓을 행하지 않으며 성적으로 타락하지 않았을 때, 가장 인간다운 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인간은 본질상 죄인이기 때문에 스스로 거룩해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희생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거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받아들일 때, 성령님께서 인간을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파송은 거룩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거룩하지 않은 사람이 파송을 받게 되면 갈등이 많아집니다. 파송 받은 사람이 거룩하면 그 사명도 분명해집니다. 우리 교회는 ACTS 29 비전을 갖기 전에 거룩과 순결을 본질로 합니다. 따라서 순조로운 파송을 계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신 다섯 가지 복이 우리 안에 풍성히 이뤄지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복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이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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