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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삶과 죽음 (요 11:3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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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요 11:32-44)

우리 인생에 있어서 풀기 어 려운 세 가지 숙제가 있습니다. 첫 째 어려운 문제는 허무의 문제입니 다. 정말 인생의 의미가 있을까? 세 상의 모든 철학은 예외 없이 헛되고 헛되고 헛된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헛되다면 왜 살아야 됩니까? 김용옥씨 헛되지 않게 하려고 열을 내며 떠듭니다. 금강경(金剛經)에도 인생의 모든 행동은 무상한 것이라 고 결론적으로 말하고 반야심경(般 若心經)에도 세상의 눈에 보이는 모 든 것은 보이지 않는 것과 일반이라 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헛 되고 헛되고 헛되니 해 아래 헛되지 않은 것이 없도다.'(전 1:14)
'인생 아 네 이름이 무엇이냐? 잠간 있다 없어질 안개니라.'(약 4:14)
'모든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도다'
(벧전 1:2 4)이렇게 헛 되다고 계속 강조하면서도 살아야될 이유가 있는가 하는 의미의 문제가 첫 번째 인생의 숙제입니다.

둘째로는 모순의 문제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선을 좋아합니 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끔찍한 죄목 으로 옥살이를 하고 있는, 그 이름 도 말하기 싫은 사람들을 개인적으 로 만나보면 얼마나 착한지 모릅니 다. 그리고 그 분들의 마음속이 얼 마나 선의지로 꽉 차 있는지 모릅니 다. 모든 사람이 선을 좋아하는데 실제로 악이 이 세상에 만연해 있습 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악의 강이 내 인생 한 복판을 흐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라 이 사망의 몸에 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외 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 번째로는 생(生과) 사(死 의) 문제, 삶과 죽음의 문제입니다. 정말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죽음 이후의 삶이 있을까 하는 문제 입니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죽음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끝이면 인생 간 단하지요. 얼마나 쉽습니까? 한번 멋지게 해치우고 그리고 청산가리를 물에 조금 타서 잡수시면 그냥 인생 이 다 끝납니다. 인생이 죽음을 두 려워하는 큰 이유는 죽음이 끝이 아 니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 입니다. 그러면 죽음 저편의 생명은 어떤 모습으로 있을 것인가? 그것이 우리로 고뇌케 만듭니다. 성경은 말 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죽음은 우리 인 생에게 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것으로 끝이 아니라 그 다음 하나님 의 심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성적표 가 개봉되는 날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인생의 세 문제 가운데 이 마 지막 문제만 해결되면 앞의 두 문제 는 자동적으로 해결이 됩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 생명과 죽음 앞에 서 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신 말씀에 우 리는 귀를 기울여야 될 줄로 압니 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전갈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가 정이 베다니에 있었습니다. 그 집에 만 가면 늘 마음을 편하게 내려놓고 쉴 수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에 남자가 죽었다고 말합니 다. 우리 성경에는 없는 이야기지만 헬라어는 정확하게 시제가 있고 남 성, 여성이 있고 단수, 복수가 있습 니다. 그래서 세 형제 가운데 남자 하나, 대명사로 죽었다고 했으니까 그것은 틀림없이 나사로입니다. 그 전에 병들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 다. 성경은 주께서 그 가정을 몹시 사랑하신고로 이틀을 더 유했다고 합니다. 아팠다고 하면 마음이 화급 해서 얼른 뛰어가서 고쳐주어야지 요. 그런데 성경은 예수께서 그 가 정을 몹시 사랑하시더니 그러므로 이틀을 더 지체하셨다고 합니다. 말 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그 가정에 하실 일 이 있었습니다. 빨리 가셔서 그를 병상에서 일으켜 세우는 것이 아니 라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시기를 원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드디 어 올라가자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 면서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말 했습니다. 이 의미를 모르는 제자들이
'주님, 잠들었으면 스스로 깨어 나지 않겠습니까? 갈 일이 무엇입니 까? 당신을 향해서 지금 예루살렘 주변의 공기가 험악합니다.'
제자 중의 한 사람은 '그러면 우리도 죽 으러 가자'고 오기스럽게 뒤따라 나 섰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게는 있지 만 주님께는 없는 단어가 있습니다. 첫째로, 거짓말이 없습니다. 주께서 는 진리 자체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가하면 우리 예수님께는 실수라 는 단어가 없습니다. 또 기적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창조주 그 분에게 무슨 기적이라는 단어가 있겠습니 까? 그리고 생명의 주되신 주님에게 죽음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빛 앞 에는 어둠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평화 앞에서는 두려움과 염려라는 단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인생에게 이 죽음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성경에서 죽음은 존재의 중단이라는 뜻이 아니라 분리라는 뜻으로 우리 에게 설명되어집니다. 어느 날 모두 '끝났다'가 아닙니다. '분리되었다' 입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 상태 를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94년부터 3년 동안 제 주변에서 여섯 분이 세상을 떠났습 니다. 저희 아버지, 어머니, 장인어 른, 장모님께서 소천하셨습니다. 그 리고 제 아내가 큰 집에서 작은 집 으로 입양되었기 때문에 저는 장인 장모님이 둘씩 됩니다. 언젠가 두 분을 다 장모님이라고 했더니 홍 목 사 처가댁에서는 부인을 둘이나 데 리고 살았나 하는데, 그게 아니라 큰 댁에서 자녀가 없는 댁으로 딸을 하나 입양을 시켜줘서 그 집에서 자 랐습니다. 제 아내의 생모님께서도 그 기간에 돌아가셨습니다. 거기다 가 제 하나 밖에 없는 누님께서 세 상을 떠났습니다. 죽음을 계속 가까 이 보았습니다. 제일 먼저 저희 아 버님 장례식을 치뤘는데 삼성병원 시체 안치실에 마지막으로 넣어드리 면서 빛나는 모습으로 바뀐 저희 아 버님 얼굴 보면서 우리 아버님께서 평생 그릇처럼 사용하시다가 떠난 덩그러니 남은 자리를 보았습니다. 그 시체가 우리 아버지는 아니잖아 요? 우리 아버지의 영혼은 하나님 앞으로 갔습니다. 분리입니다. 이것 이 죽음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성경은 또 다른 죽음이 있다 고 말합니다. 그 죽음은 영적인 죽 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 의 생명선에서 공급받지 않고는 인 생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대로 살수가 없습니다. 그 분의 은혜 속 에 기쁨이 있습니다. 그 분의 사랑 속에 감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 삶이 단절되어 있 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영적으로 죽 었다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 리셨도다'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닙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분리되었던 인생입니다. 우리가 예 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할 때,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집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생 명선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사랑이 마치 심장의 혈관 타듯이 새 로운 삶을 살도록 만듭니다. 우리 주님에게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없습 니다. 우리 인생에게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분리라는 의 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죽음 앞에 나아가셨습니다.

베다니 마을 어귀에 들어서기 전,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다가 좇아나갑니다. 그리고 그 분에게 나가서 말합니다.'당신이 여기 계셨으면 내 오라비 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당신이 하나님께 구하시 면 하나님께서 들으실 줄을 내가 믿 습니다.' 정확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 때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오라비가 살리라.' 그랬더니 마르다가 말합니다. '예수님, 마지막 날 부활 때 내 오라비가 살 것을 믿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 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 가 이것을 믿느냐?'
마르다는 정답을 말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 는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내가 믿습 니다.'
여러분, 이 대화를 자세히 살펴보십 시오. 마르다는 정확한 신앙고백을 가졌습니다. 교리적으로 흠이 없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는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 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는 예수님의 말에 '당신이 계시지 않았 기 때문에 내 오라비가 죽었습니다. 계셨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줄 압니 다. 그러나 당신이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께서 당신 구하는 대로 될 줄 로 믿습니다.' 라고 해놓고 마지막 날 살 줄을 믿는다고 합니다. 이 여 인은 주님께서 과거에 도와주신 것 믿었습니다. 그리고 장차 도와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 간에 내 삶 속에 역사 하시는 주님 을 그는 안 믿었습니다. 그 다음에 도 돌을 옮겨놓으라고 주께서 명령 하시니까 마르다가 좇아나가서 '주 님 시체가 썩어서 나흘 되었기 때문 에 냄새가 진동합니다.'라고 반대까 지 합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이런 모습이 너무 많습니다. 객관식 문제들의 정답은 잘 맞춥니다. 예를 들자면'당신 생각에 불쌍한 장애인 들을 위해서 좋은 시설에서 도와주 는 것, 좋습니까? 나쁩니까?' 그러 면 '좋습니다.' 100이면 100명이 정 답을 씁니다. 그런데 '당신 마을 가 까이 장애인 돕는 시설을 세우면 어 떻겠습니까?' 그러면 100이면 100 거의가, 1000명이면 1,2명 제외해놓 고는 안된다고 합니다. 객관식은 정 답을 써요. 그런데 주관식은 틀립니 다. 사지선다형 시험만 봐서 그런지 주관식을 쓰라면 쓰지를 못해요. 저 는 요즘 신문이나 TV에서 한국 정 치판에 대한 각종 여론조사 보도를 하며 신경 쓰는 것을 봅니다. 그런 데 제 개인적으로는 그것 가짜가 많 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람은 물어보면 정답 쓰고 실제로는 제 마 음대로예요. 여러분, 마르다가 그런 신앙을 가졌단 말입니다. 신앙을 가 진 사람들도 그럴 수 있습니다. 문 제의 객관적인 정답은 아는데, 그 정답이 내 삶의 현장 속에서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어떤 분에게 묻습니다.

'당신 무엇을 믿습니까?'
'우리 교회가 믿는 것을 내가 믿 습니다.'
'당신 교회는 무엇을 믿습니까?'그러니까
'나와 같은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면 당신 교회와 당신은 무엇 을 믿습니까?'
'우리는 동일한 신앙을 가졌습니 다.'
우리 한국 사람의 신앙이 이런 경우 가 참 많습니다.

17세기 영국에 윌리엄 캐리라 는 젊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사 람이 계속해서 세계를 위해서 기도 하며 대학 도서관마다 돌아다니면서 당시에는 없는 세계 선교 지도를 만 들었습니다. 각 지역마다 거기에 어 떤 나라가 있고, 어떤 부족이 있고 그 부족들은 어떤 신앙을 가졌고 그 분들에게 복음 전도하기 위해서 무 엇이 필요한지 자료 조사를 해서 지 도를 만들었습니다. 이 젊은 청년이 목사님들의 회의에 그 자료를 보내 세계 선교를 하기 위해서 이런 지원 이 필요하다는 것을 설득했습니다. 목사님들이 일주일 동안 열심히 세 미나하고 회의한 다음 이렇게 결론 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 다. 그런고로 사람의 도움 필요 없 이 자기 구원하실 자를 스스로 다 구원하신다. 그런고로 우리들은 밖 에 나갈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하나 님의 절대주권을 믿는다.'
여러분, 그것이 절대주권을 믿는 것입니까? 우리 주께서 명령하신
'너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마 28:1

9)이 단순한 말은 안 믿고 하 나님 주권 믿는다구요? 객관식으로 는 잘 알아듣는 말이예요. 그런데 주관적으로 살아있는 신앙이 저들에 게 없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이 마르다는 예수 님과 마지막 정곡을 찔러 대답한 후, 마르다는 얼른 자기 동생인 마 리아를 예수님께 인계합니다. 예수 님께서 부르신다니까 마리아가 좇아 나옵니다. 그리고 그 발 앞에 엎드 려서 울며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님, 이 곳에 예수님께서 계셨더면 우리 오라비가 죽지 아니했을 것입 니다.'
여기까지는 마르다와 똑같습 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아무 말이 없습니다. '주님, 이것이 내 형편입 니다. 그리고 이것이 내 슬픔입니다. 내가 내 사랑하는 오빠가 죽었기 때 문에 이 슬픔을 나는 가눌 길이 없 습니다.'라는 뜻으로 울고 있는 마리 아입니다. 마르다는 척척 정답도 말 할 뿐 아니라
'주님, 당신 이렇게 해야됩니다'라고 까지 지시하고 있 는데, 마리아는 아닙니다. '내 모든 형편, 처지를 주님은 아십니다.' 하 고 그대로 내어놓고 있습니다. 사랑 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을 보신 주 님께서 우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 다. 성경의 가장 큰 짧은 구절입니 다.
'예수께서 우시니라.'
영어 성경 에는 그냥 두 단어입니다. 그러나 헬라어에는 한 단어입니다. 울고 계 시는 예수님을 우리들은 봅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사랑하는 사 람을 먼저 하늘나라에 보내신 분들 을 많이 봅니다. 어떤 사람은 다시 만날텐데 뭐, 천국에서 영광의 자리 에 계실텐데, 그래서 안 울어야 된 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 닙니다. 마리아도 울었고, 마리아 보 시면서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슬픈 것은 슬픈 것입니다. 천사에게는 눈 물이 없습니다. 육체를 가진 인생만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의 아픔을 눈물로 표현합니다. 이 땅에 오셨던 참 하나님, 예수님, 그러나 참 육신 을 가졌던 고로 슬픔을 보시고 통분 히 여기셨고, 이 슬픔의 원인 자체 를 분하게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그 리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이 말은 창자가 갈라지는 듯한 아픔이라는 뜻입니다. 창자 끊어짐이라는 말입 니다. 마리아가 우는 모습 보시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그런 아픔을 당하셨습니다. 저는 젊은 사람이 세 상 떠나면 원통하겠다. 그래서 슬픔 이 더 클 것이다. 오래 오래 함께 사시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 면 많이 살았기 때문에 질력이 나서 별로 슬퍼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 었습니다. 그런데 정반대더라구요. 살아왔던 세월의 모든 정이 얽혀서 슬픔으로 타는데, 저희 어머니께서 아버지 돌아가신 다음에는 아예 죽 으실 각오를 하고 사시는 것 같아 요. 병원에 안가시려고 얼마나 그러 시는지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 는 것은 10톤 트럭에 받친 충격이라 고 합니다. 그런고로 사랑하는 사람 을 잃은 아픔에 대해서 우리 더 따 뜻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한번은 홀아비 됩니다. 한번은 과부 됩니다. 이것은 아무도 못 피해요. 아무도 순서가 없습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언젠가는 사랑 하는 사람과 헤어져야될 날이 반드 시 옵니다. 이별의 땅에서 한번은 이별을 합니다. 그 깊은 좌절과 고 통을 겪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고통 과 아픔을 보시고 우셨단 말이예요. 우리 주님, 눈물을 보이시는 분입니 다.

히스기야가 우리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 서 말씀합니다.
'네가 나를 향해서 눈물과 간구로 나오는 것을 내가 보 았다. 네 눈물을 보았다'(사 38:5)고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내 눈물을 보십니다. 남몰래 흐르는 눈물, 그 아픔의 고통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 해도 우리 주님은 보십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내가 울 때, 함께 우신 주님입니다. 그 깊은 아픔의 고통을 찾아가셔서 아무도 위로할 수 없고 아무도 함께 할 수 없는 절망의 나 락까지 좇아가셔서 함께 우신 주님 입니다. 그 주님께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함께 우 시는 주님을 우리가 지금 보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 이 고통 때문에 흘리는 눈물을 우리 하나님은 보십니다. 자녀 문제를 내 어놓고 울면서 기도하는 부모의 그 눈물의 기도를 우리 하나님은 보십 니다. 보실 뿐 아니라 아무도 위로 해주지 못하는 그 슬픔의 깊은 골짜 기까지 찾아오셔서 함께 우시는 주 님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과 21장 보면 우리가 천국에 입성할 때, 그 분이 좇아 나와 우리를 맞이하시면 서 가장 첫 번째 행하시는 동작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두 눈에서 눈물을 씻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이 세상과 다른 것은 눈물이 없 습니다. 다시 곡하는 것이 있지 않 은 땅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아프 면 아프다고 주님 앞에 가지고 나오 십시오. 교만 떨지 마십시오. 약하면 약하다고 내놓으십시오. 울고 싶으 면 주님 앞에 실컷 우십시오. 그 분 은 우리의 슬픔을 아십니다. 우리의 간구를 아시는 자라고 성경은 말합 니다. 그 분만은 어느 때든지 내가 울 때 나와 함께 우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내 두 눈에서 눈물 을 닦아주시는 분입니다. 눈물의 의 미를 모두 아시는 분입니다. 그 주 님께서 우시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무덤에 같이 가셨습니 다. 돌 문을 열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은 굴을 파놓고 그 굴 속에 사람의 시신을 안치했습니다. 그래 서 동물과 다른 사람들이 해치지 못 하도록 큰 돌로 입구를 막아 놓았습 니다. 우리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돌 문을 열어라.'
우리 주님, 부활 하실 때에는 그냥 돌문까지 다 여셨 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런데 주께서 돌문을 열라고 말씀하 십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요? 주님을 참으로 신뢰하는 사람을 그 영광에 함께 참여시키기를 원하 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혼자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할 여 분을 남겨놓으셨습니다. 주님의 능 력에 비하면 정말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해야 됩니다. 그 렇지만 내가 겸손을 가장한 게으름 으로 내가 해야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악하고 게으른 죄입니다. 무덤 문을 열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십 니다. 하나님을 향해 먼저 감사 찬 송을 돌립니다.
'아버지께서 지금까 지 내 모든 기도를 들어주셨고 영광 을 받으셨습니다.'
찬양을 올린 다 음, 무덤을 향해 외치십니다.
'나사 로야, 나오너라.'

F.B. 마이어라는 성경학자가 이렇게 재미있는 글을 썼습니다. '만약 주께서 그냥 나오너 라고 했으면 그 동산에 있는 모든 시신이 다 일어날 뻔했는데, 나사로 라고 지칭했기 때문에 나사로만 나 왔다.' 우리 주님은 정확하게 나사로 를 아셨습니다. 남서울은혜교회 교 인 수가 이렇게 많기 때문에 우리 주님이 나 같은 것, 모르리라. 아닙 니다. 여러분을 알아요. 나를 아셔 요. 그 날에 나를 부르시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랄 것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내가 하늘 끝까지 날아갈지라도 주께서 거기 계시고 내가 저 음부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를 펼지라도 주께서 거기 서도 나와 함께 하셨다'(시 139:8)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아 십니다. 빛이 있으라 명령하시매 빛 이 생겼던 그 분의 말을 누가 감히 어길 수 있습니까? 낙원에 있던 그 영혼은 낙원 문을 열어서 썩어 문드 러진 시신을 향해 다가서기 시작했 고, 그 말씀을 따라 썩었던 시신이 다시 소생하는 능력을 얻습니다.

벌떡 일어났습니다. 주께서 말 씀하십니다.
'풀어놓아 다니게 하 라.'
우리 주님 부활하실 때는 그의 세마포가 그대로 포개어졌다고 했습 니다. 그런데 주께서 또 우리에게 할 일을 맡기십니다. 영적으로 이런 일은 참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 나님을 향해 죽었던 인생, 하나님과 우리 주님과 그 사람 사이에 막힌 돌 문을 우리가 열심히 열어놓으면 주께서 그 영혼을 불러내십니다. 예 수 안 믿을 것 같던 친구들이 하여 튼 예수님과 장애물을 열심히 우리 는 제거해서 치워놓으면 주께서 그 영혼을 살려주시더라구요. 살려주시 는데, 가만히 보면 이제까지 살았던 인습, 이제까지 살았던 삶의 습관, 이런 것에 둘둘 칭칭 얽어 매어가지 고 신앙생활을 잘 못합니다. 그것을 먼저 믿는 우리 믿음의 형제들이 풀 어주어야 됩니다. 그래야 그 분이 마음껏 가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우리 주님의 장성한 분량을 향해서 자라갈 수 있습니다. 주께서 명령하 셨습니다.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순종하는 사람들이 가서 풀어주었습 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했는지를 보여주 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 이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 면서 객관적인 정답만 가진 신앙생 활을 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어렸 을 때 그냥 수련장에서 문제 1번은 답이 뭐고, 2번은 답이 뭐고, 수식은 못 풀고 그냥 문제와 답만 외워서 시험 볼 때가 있었습니다. 저는 특 별히 산수를 못했거든요. 그래서 5 만 넘어가면 '누가 이딴 것 만들어 가지고 고생시키나?' 했습니다. 그래 서 수식만 외워서 점수는 나왔어요. 그런데 수식을 논리적으로 풀라고 하면 못풉니다. 그런 신앙이 마르다 신앙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 앞 에 자기 형편, 처지를 다 내놓았습 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울고 있습 니다. 형제, 자매여, 그 주님 앞에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 앞에 전능 자이신 주님 앞에 내 모든 문제를 내어놓으십시오. 내 한숨도 내어놓 으십시오. 절망도 내어놓으십시오. 고통도 내놓으십시오. 그리고 우십 시오. 한국 남자들 울 줄 모르기 때 문에 풍성한 인생을 못삽니다. 눈물 이 주는 축복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 니다. 우십시오. 주께서 우리의 눈물 을 보십니다. 억울한 일로 고통받았 던 다윗이, 시편 56편에 외쳐대기를

'주여,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 소서 내 원통함을 보시옵소서.'(시 56:8)쫓겨다니며 죽음의 고비를 그 처럼 겪었던 그는 '주님, 내 눈물의 이 고통을 기억해 주시옵소서.' 외쳐대고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겸손 하게 주님 앞에 가지고 나오십시오. 자기의 적은 신앙 가지고 자기 오라 비 나사로의 죽은 문제를 정답으로 풀어보려고 애쓰는 마르다 되지 마 십시오. 그냥 문제 해결자이신 그 분 앞에 전체를 맡기십시오. 그 분 은 내 삶 속에 은혜로 함께 하십니 다. 내 눈물이 골짜기를 지날 때, 그 분이 함께 우시면서 걸어가 주십니 다. 그리고 그 분만이 내 두 눈에서 눈물을 씻겨주시는 유일한 분이십니 다. 그 분 앞에 나가십시오. 그 분의 은혜는 내 인생을 향해서 이슬비처 럼 찾아오지 않습니다. 오늘 이 시 간,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사 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허우적 거리 는 나를 향해서 아무개야, 일어나라 고 외치시는 소리 앞에 벌떡 일어나 십시오. 나를 일으켜주시기를 기뻐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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