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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안에서의 자유 (요 08: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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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안에서의 자유 (요 8:31-36)

이 시간에 “예수 안에서 자유”라는 제목입니다. 패트릭 헨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만큼 인간에게 자유가 중요하다는 역설입니다. 오늘날까지 인류의 피나는 투쟁은 곧 자유를 향한 투쟁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난과 질병과 불편과 각종 정치적 사회적 물리적 억압에서의 자유를 쟁취하려는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더구나 진정한 영혼의 자유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복음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자유의 복음입니다. 눅 4:18-19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 주셨습니다. 간혹 난감하고 고통스러울 때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나에게 날개가 있다면 훨훨 날아서 어떤 자유로운 곳으로 그 상황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의 영육 간의 억압에서 자유함을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자유는 무엇입니까?

1. 죄에서의 자유입니다.

요8:34-36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세상 종교에서는 수십 년 도를 닦아도 불가능한 것을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즉시 허락해 주십니다. 죄에서의 자유는 정죄에서의 자유와 죄의 지배에서의 자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정죄에서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롬8:33-34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보혈공로로 용서 받은 것을 믿고 죄의식을 버리고 양심의 자유 갖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죄의 지배에서의 자유입니다. 예수 믿고 성령 충만만 받으면 범죄하지 않도록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늘 사용하는 유명한 성경구절 있지요?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 지상에서는 다시 넘어질 가능성은 있지만 범죄하지 않는 원리를 주셨다는 사실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2. 예수님이 주시는 자유는 원수 마귀에게서의 자유입니다.

요일3:8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도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하셔서 사단이 범하지 못하도록 지키시며 귀신을 내어 쫓아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미신 지킬 필요가 없어요. 세상 사람들은 그게 무서워서 온갖 것을 다 가리고 지킵니다. 그래서 우상을 숭배하고, 날을 가리고, 나무 하나도 베지 못하고, 이리 가지 말라. 저리 가지 말라. 부정 탄다. 액땜을 해야 된다. 굿해야 한다. 고사를 지내라. 부적을 붙여라. 내 말 안 들으면 집안 망한다. 자식이 불행해진다. 병든다. 죽는다. 사업 안 된다. 무덤을 옮겨라. 집터가 세다. 온갖 엄포와 소란을 다 떱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그런 모든 협박에 자유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 성도는 악령에 대해서 자유인이기 때문입니다. 요일5:18에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니까 하나님 자녀들 털끝도 못 만져요. 이 사실 믿고 용기 가지세요. 자유함 얻으세요. 지금 우상 섬기는 나라들이 왜 발전을 못하는 줄 압니까? 이런 미신에 빠져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담대한 자가 누립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고 했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불안에서의 자유를 주십니다.

요14:27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하셨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읍내쥐가 시골쥐의 초대를 받아 놀러 갔습니다. 시골쥐는 손님 대접을 잘 하느라고 갖은 곡식을 다 내놓았습니다. 그래봤자 보리, 밀, 콩, 무우말랭이 등 잡곡뿐이었다. 이것을 본 읍내쥐가 자네 우리집 놀러오게 내가 무얼 먹고 지내나 보여주지.' 그래서 시골쥐가 읍내쥐에게 놀러갔습니다. 과연 거기에는 빵, 고기, 치즈, 꿀, 버터, 햄, 바나나 등 이제까지 구경도 못한 음식이 가득하였습니다. 두 쥐는 굶주린 쥐들처럼 마구 먹어대고 있는데 문이 열립니다. 그러니까 읍내쥐는 놀라 황급히 쥐구멍으로 도망쳤습니다. 시골쥐도 따라서 도망을 쳤습니다. 조용해지자 다시 나와 먹는데 누군가가 또 문을 엽니다. 그래서 또 다시 숨고 또 숨고 놀란 쥐들의 가슴은 팔닥 팔닥 뛰었습니다. 이 때 시골쥐가 '여보게, 난 가네. 잘 못 먹더라도 편안하게 살고 싶네. 불안과 공포 속에서 아무리 잘 먹고 잘 살면 그게 무슨 행복이란 말인가? 잘 있게.'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평안이 가장 귀하다는 교훈입니다. 사람들은 불안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여러 약물을 복용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불안에서 자유함을 주십니다. 몸과 마음을 가눌 수 없을 만큼 불안하다면 엎드려 기도하세요. 평안함을 주실 것입니다. 빌4:6-7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 예수님께서는 질고에서의 자유도 주십니다.

말4:2에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하였습니다.

왜 질고에서의 자유가 있나요?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사 우리의 병을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예수님의 은혜로 내적치유 외적치유 다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질고로 인해 너무 낙심치 마시고 병원에도 가시고 노력도 해야 하지만 꼭 해야 할 것은 신유의 복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손으로 어루만져 주시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달렸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치유의 길을 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이름으로 병을 꾸짖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질고에서 자유를 주실 것입니다.

5. 가난에서의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고후8:9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가난을 인정하지 마시고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먹을 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고 항상 성령 안에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채워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물리적인 가난을 이김도 자유지만 가난 가운데서도 가난을 모르고 사는 것도 가난을 이기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2-13) 하였습니다. 이러한 완전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6. 예수님께서는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십니다.

히2:14-16에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까지는 성도일지라도 육체의 죽음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성도가 다른 점은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함을 누린다는 점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합니까? 그래서 예수 믿되 잘 믿어야 합니다. 죽음의 공포란 심히 강력한 것이기 때문에 웬만큼 은혜 받아서는 그 공포를 못 이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성도들은 죽음에서 자유함을 얻어 하나님께서 언제 부르시든지 할렐루야 찬송하며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예로 죽음의 공포를 이긴 바울은 늘 육체를 떠나 하나님 나라에 가기를 사모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전15:51-52) 이렇게 온전히 장함을 얻을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의 복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호세아가 고멜에게 주었던 자유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한만큼 더 풍성한 자유를 누리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신앙생활 잘하셔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온갖 자유를 다 누리시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2005-08-12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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