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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 되게 하옵소서 (요 17: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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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무려 914명에 달하는 신도들이 끔직한 집단 자살 극을 벌려 온 세계를 경악케 했던 미국의 인민사원, 1987년 우리 나라에서도 똑같은 자살 극으로 종말을 고했던 오대양, 작년 독극물 사건으로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일본의 옴진리교 등과 같은 비정상적인 사교집단은, 두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집단생활입니다. 사회와는 완전 단절된, 폐쇄적 집단 생활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교주에 대한 시선집중입니다. 방마다 교주의 사진을 걸어 놓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몸속에 지니고 다니면서 틈이 날 때마다 사진을 꺼내어 교주의 눈을 맞추어 보게 합니다. 집단생활과 교주에 대한 시선집중― 이 두 가지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시야의 차단입니다. 신도들로 하여금 교주와 교주의 말 이외의 것은 생각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사교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획일화입니다. 오직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생각, 하나의 목표, 하나의 방법, 하나의 결과밖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목소리나 다른 생각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사교에 빠진 사람들의 세계는 왜곡되이 축소될 수밖에 없고,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어 그 영혼이 병들고 이지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교가 사회의 암적 요소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업은 어떠합니까? 일단 하나의 목표가 설정되면, 그 하나의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한 목소리, 하나의 생각으로 진력을 다합니다. 그 과정 중, 목표에서 벗어난 다른 목소리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일사불란한 획일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을 사교라 말하지 않습니다. 첫째는 설정된 하나의 목표는 그 기업 종사자들이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인 과정, 혹은 토론 과정을 거쳐서 세워지기 때문이요, 둘째는 설정된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목소리와 하나의 생각은 기업 내부에서만 적용될 뿐, 그것이 종사자들의 사생활이나 가정, 가족들까지 지배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업의 사주가 독단적으로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위한 자신의 한 목소리, 한 생각으로 종사자들의 가정까지 획일화하려 한다면, 그것은 집단 자살 극을 연출한 오대양과 같은 사교일 따름이지 결코 정상적인 의미에서의 기업일수는 없습니다. 오대양이란, 1987년 당시 48세이던 박순자란 여인이 세운 기업의 이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오대양을 기업이라 부르지 않고 사교라 하는 것은, 오대양의 사주 박순자씨가 오직 자기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생각으로 사원들의 24시간을 밤낮 구별없이 송두리째 획일화시켜 버렸을 뿐만 아니라, 끝내는 그들 모두를 획일적으로 다 죽여 버렸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나 독일의 나치, 이태리의 파시스트와 같은 전체주의를 사교와 동일시하는 것 역시 똑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온 국민의 생각과 삶을 오직 하나의 이데오르기로 온통 획일화시켜 버리기에, 사교와 다를 바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인류가 피를 흘리면서까지 공산주의나 전체주의와 맞서 싸웠던 것은, 그같은 획일적 ism, 주의야말로 인류를 파괴하는 무서운 독소임을 알았던 까닭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진리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획일이란 이름의 장벽을 허물케 하는 능력이요, 획일화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이신 하나님 안에서만 획일화로부터의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노아의 방주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옛날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하실 때,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짓게 하심으로 노아 가족만은 구원을 받게 해 주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지어졌던 그 방주의 특징은 옆으로 창문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단 방주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면, 세상을 내다 볼 방법이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방주란 세상과는 완전히 차단된 공간이었습니다. 방주에 단 하나 밖에 없던 창문은 오직 천정에, 하늘을 향해 뚫려 있었습니다. 방주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지 전정의 창을 통해,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만 볼 수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집단 생활과 교주에 대한 시선집중을 제 1 의무로 삼는 사교와, 노아의 방주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노아의 방주 역시 사교처럼 세상과 단절된 생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시선집중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러합니까? 사교와 노아 방주는 동일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노아의 방주와 사교가 어떤 경우에도 동일시될 수 없음은, 사교는 인간을 획일화시키는데 반하여 노아의 방주는 인간을 획일화로부터 자유케 하는 까닭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을 향해 우리의 시선이 고정되므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시각으로 이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창조세계가 얼마나 넓은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모습, 다른 목소리,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며, 그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피조물임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성이나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하나님의 역사가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한 인간의 생각이나 목소리로 이 세상을 획일화할 수도, 하려 해서도 안된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이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획일성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다양함 속에서의 조화를,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를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이신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이 노아의 방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획일성에 빠져 나의 시야를 축소 왜곡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획일성으로부터 탈피하여 나의 시야를, 나의 세계를, 나의 신앙 경지를 더더욱 확대시켜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신앙의 획일화입니다. 신앙이 성숙해 진다는 것은 시간과 상황에 구애 받음이 없이 오직 한 목소리, 하나의 생각만을 요구하거나 수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와 다른 목소리, 다른 생각을 수용하는 것으로부터 신앙의 성숙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9절이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믿으시고 당신에게 맡겨 주신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하여 첫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셨고, 두 번째로는 그들에게 아버지께서 주신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마지막으로 드린 기도의 내용을 본문 11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드린 마지막 기도의 내용은 무엇보다도 먼저 '저들이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가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면, 주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 자신을 위하여 기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제자들이 하나 되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계시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 되게 해달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마치 인격을 갖지 못한 로봇트처럼 오직 한 목소리, 하나의 생각밖에 갖지 못한, 획일적인 인간이 되라는 말입니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붕어빵을 찍어내듯 똑같이 만드시지, 각각 다르게 창조하실 까닭이 전혀 없습니다.

실제로 주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어부였고 마태는 세리였으며, 시몬은 열심당원이었습니다. 그들의 직업이 다 달랐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베드로는 말년에 로마에서 선교하다가 죽었고, 도마는 인도에서 순교하였고, 안드레는 그리이스에서 선교하던 중 그의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들의 선교 목표가 다 달랐던 것입니다. 마태는 마태복음에서 메시야이신 주님을, 마가복음은 종이신 주님을, 누가복음은 인간 예수님을, 그리고 요한복음은 하나님 되신 주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 믿음을 강조한 반면, 야고보는 야고보서에서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생각과 목소리 역시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결코 획일성 속에 빠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른 생각, 다른 목표, 다른 목소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저희로 하나 되게 하옵소서'라고 간구 하실 때, 그 하나됨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의하면 주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고 계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여기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우리'란 바로 성부, 성자, 성령을 일컫는 말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이듯이 저희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3장 16절-17절을 보면 성부, 성자, 성령께서 동시에 역사 하시는 장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자 주님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때 성령님께서는 비둘기같이 내려 주님 위에 임하셨고, 성부 하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주님을 가리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각각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시어 다른 모습으로 역사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결코 획일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우리는 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근본적으로 한 분 하나님이시었기에, 그 세분이 비록 다른 모습으로 다르게 역사 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세분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라 함은 외적인 획일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으로 다른 모습으로 보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하나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되게 하옵소서'란 주님의 기도는, 인간을 획일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이한 모습과 각각 다른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하나임을, 다시 말해 나와 아무리 다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한 자녀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을 아는 자만이 자신의 신앙을 사교화 하지 않을 수 있고, 획일화의 유혹과 피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나와 타인간의 다름을 즐기고 존중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나와 다른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통해 다양하게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능력과 섭리를 더 많이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됨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신앙은 성숙해지고, 우리의 신앙적 시야와 세계가 틔어지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한 바울과 바나바는 멋진 팀웍을 이루며 첫 번째 선교여행을 잘 다녀왔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선교여행을 떠나기 직전, 그 두 사람은 대판으로 싸운 뒤 결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유인 즉은, 첫 번째 선교여행에 대동한 마가란 청년이 중도에서 되돌아 가버렸기 때문에, 바울은 그런 무책임한 청년을 또 다시 데려 갈 수 없다고 한 반면, 바나바는 자기의 조카 바나바를 끝까지 동행하겠다고 우겼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싸우고 서로 헤어진 것은 서로 자기 생각만 옳다고 믿었음을, 다시 말해 서로 자기 생각으로 상대를 획일화하려 하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에 사도 바울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과 바나바가 다른 생각으로 헤어져 각각 다른 곳으로 향했기 때문에 각각 다른 곳에서, 각각 다른 생각을 가진 자신과 바나바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무책임하다고 평가했던 마가란 청년도, 자신과 다른 목소리를 내던 바나바도, 모두 하나님께서 쓰시는 하나님의 한 자녀란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 즉시 바울은 다시 마가를 불러 자신의 동역자로 삼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나바와의 화해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한 자녀란 사실을 깨달음으로부터 바울은 획일성에서 벗어나 신앙의 원숙을 이룰 수 있었고, 그의 신앙적 시야와 경지는 로마에까지 확대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 성도님이 사무실로 설교 테이프를 사러 왔다가 교역자에게, 이재철 목사의 목회철학이 무엇인지 물었다고 합니다. 나는 그 분이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이 시간을 빌어 대답하자면, 나의 목회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목회로써 그 구체적인 목표중의 하나가, 교인들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케 하여 하나님의 시각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게 하므로, 인간적 획일성에서 탈피하여 신앙적 시야와 경지가 넓어지도록 교인들을 돕는 것입니다. 이천년전 이 땅에 오셨던 주님께서, 인간을 획일화시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획일화의 도구로 전락시켜 사람들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신앙의 시야를 왜곡 축소시키는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맞서 싸우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그와 같이 우리 신앙의 성숙과,더 넓고 확대된 신앙의 시야와 경지를 동시에 가능케 하는 구체적인 해답중 하나를 본문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곧, 나와 전혀 다른 목소리를 내는 많은 사람들이 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한 자녀요,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통해서도 신비스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 계신다는 사실을 인식, 수용하면서 그것을 토대로 삼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을 통해 주님께서 이렇게 고백하고 계십니다.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주님께 맡기신 사람들 중에, 오직 멸망의 자식 한 사람을 제외하고서는 아무도 멸망치 않았다는 것은, 바로 가룟 유다를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가룟 유다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에서 제외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은 물론이요, 타인 역시 하나님의 한 자녀임을 끝내 인정치 않았던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 자신의 생각과 목소리로 이 세상과 하나님을 끝까지 획일화하려 했고, 그 결과는 주님에 대한 배반과 부정, 그리고 스스로의 자살로 귀결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가룟 유다는 결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생각과 목소리로 세상을 획일화하려 하고 있으면 여러분이 가룟 유다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과 다른 목소리에 귀를 막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에 대해 눈을 감는다면 여러분이 가룟 유다 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체험만을 절대시하여 하나님의 역사와 말씀을 재단하려 한다면 여러분이 가룟 유다 입니다. 가룟 유다가 있는 곳에는, 오직 참담한 후회와 파멸이 있을 뿐입니다.
나와 다른 목소리를 꺼려하지 마십시오. 나와 다른 생각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나와 다른 목표를 경멸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사람들 역시 나와 똑같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한 자녀임을 인정하고 그들을 존중하십시오. 그때부터 여러분의 신앙이 성숙해질 것이며, 여러분의 시야가 트일 것이며, 이제껏 까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다양한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왠지 아십니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한 자녀임을 깨달았다는 것은, 여러분이 이미 주님과 하나 되어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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