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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기도 (요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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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은 예수님이 하신 기도가 아니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복음서에 많은 부분에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기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은 별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7장에는 예수님의 기도가 완벽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도전에 예수님은 마지막 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성찬을 나누신 다음에 요한복음 14∼16장에 걸친 설교를 하십니다. 그 설교를 통해서 모든 가르침을 마감하신후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일이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되어 있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

사실 기도는 우리가 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기도할 필요가 없는 분이 있었다면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받으셔야 할 분이며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고 기도의 대상이십니다.
예수님은 굳이 기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언제나 성령님과 함께 하셨고, 아버지와 하나였습니다. 더구나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지혜와 권능과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필요가 없는 그분이 오히려 가장 많이 기도하셨습니다. 성경에 있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은 가장 많은 기도를 하신 분이었습니다.
겟세마네에서 마지막으로 기도할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것도 오래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단 한 시간동안만 요청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도 기도에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 26:41)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다 잠에 빠지고 오직 예수님만이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기도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광야에서 금식하며 40일동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애를 마치시고 십자가를 지는 그 순간까지도 예수님은 기도로 모든 것을 마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삶과 사역 모든 곳에서 기도로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이미 가룟 유다가 배신할 것도 알고 계셨고, 베드로가 세번이나 자신을 부인할 것과 제자들이 어떻게 할 것인지도 다 알고 계셨지만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고 그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주님은 작은 일을 할 때도 그냥 하지 않으셨습니다. 능력이 있음에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일하신 분이었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실 때도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요 11:41, 42).

이 말은 항상 기도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늘 기도하고 기도로 하나님과 동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 참혹한 자리에서도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엘리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 16:34)라며 시편 22편 1절을 기도하셨습니다. 마침내 마지막 숨이 다하는 순간이 오자 “아버지여 내 영혼을 의탁합니다”라는 기도로 생애를 마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온 만물을 다스리시면서 로마서 8장 34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누가 기도하겠습니까? 많은 문제와 고난이 있을수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가장 기도를 해야할 사람, 가장 기도가 필요한 사람이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외로 기도가 별로 필요없어 보이는 사람이 기도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점점 닮아가는 기도, 성령의 열매가 있고, 성령 충만할수록 오히려 더욱더 기도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의 특징은 항상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이 기도를 많이할 것 같은데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많이 알고 순종하는 사람일수록 더욱더 기도합니다. 이것이 기도의 비밀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 하게 되어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점점 기도하지 않게됩니다.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지만 오히려 자기는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어서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해도 무슨 소용이 있나’라고 생각하는 불신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확신이 없어서 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2절을 보십시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예수님은 혼자이십니다. 그 외롭고 고독한 시점에서 예수님이 기도할 수 있었던 힘은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확신이었습니다. 늘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이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느끼고, 친밀할수록 더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멀리 느껴질 때 기도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야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밖에도 기도하지 않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육신의 연약함, 분주하고 바쁘기 때문에 그리고 사단의 방해 때문에, 육신의 정욕과 세상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때문에 하나님께 눈을 돌릴 시간이 없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 복

하나님이 필요없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기도가 필요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기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지 않는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들어주실까? 내 기도를 하나님이 받아주실까?’라는 의구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나는 하나님의 소유이고, 나는 왕같은 제사장이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라는 확신이 있는 사람이 기도합니다.
기도할 때 신앙의 자신감, 자기가 누군가라는 ‘자기 인식’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 기도를 얼마나 오래 하느냐, 얼마나 진지하게 했는가, 기도의 내용이 얼마나 좋았는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내가 누구 앞에서 기도하는가’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있어서 나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은 내 일에 별로 관심이 없으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단의 참소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기뻐하며, 여러분에게 관심이 있으십니다. 젖먹이는 아이를 어미가 잊어버릴지라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사 49:15).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사랑을 십자가로 확증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자기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이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큰 죄입니다. 내가 자격이 없다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불신의 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기꺼이 들어주십니다.

여러분,
기도하지 않는 우리를 향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기도를 받아달라고 간청해야 하는데 오히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우리를 깨우시며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 설교를 통해서도 여러분을 깨우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된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17장 5절을 보십시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기도하면서 자기 자신이 누군지 분명히 알았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만 자기가 누군지 알게됩니다.
기도할 때 자신의 연약한 모습, 부족함, 죄인된 모습, 교만함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얻게되는 확신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이 확신만큼 우리에게 자신감을 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나면 담대해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창세 전에 계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속에는 예수님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분은 참 사람이십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온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 사실을 이 기도를 통해서 알려주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기를 지칭하십니다. 사역초기부터 사탄과 모든 사람이 계속해서 도전해 왔던 것이 그 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한번도 그 사실에 흔들린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 속에는 예수님이 인자되심이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17장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기도하셨던 이유는 그분이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은 철저하게 인자로서 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말구유에 오셨을 때는 하나님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섬기고 구원하러 오신 사람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 겸손히 기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서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기도는 필수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때를 중요하게 다룹니다. 가나의 혼인잔치 때 마리아가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했을 때 예수님은 아직 자신의 ‘때’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사로를 살리고 난 후에 예수님을 죽이려는 분위기 속에서 헬라인 몇이 찾아왔을 때 요한복음 12장 27절에서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니”라고 하십니다.
이 때는 아담이후로 타락한 인류가 기다려온 때입니다. 우리가 구속되는 때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를 지실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확하게 기도로써 때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때를 아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천하 범사에 때와 기한을 주셨다’고 전도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를 잘 맞추는 것이 인생에서 승리하는 비결 중 하나입니다. 때를 분별하지 못하고 열매 맺어야 할 때 알지 못하고, 나서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구별하지 못하면 우리는 승리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언제나 후회하고 실패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는 고통과 저주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십자가를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자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참혹함을 알고 계셔서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엄청난 고통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를 져야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기 때문에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거부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 모든 권세를 다 주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것을 거부해 버리면 하나님에게도 대안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일을 감당하지 않으셨다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입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멸망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복종하셨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의 목숨을 빼앗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목숨을 줄 권세도 있고 빼앗을 권세도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내어놓지 않으면 아무도 손댈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는 것을 예수님은 영광스럽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잘 질 수 있도록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뜻에 끝까지 순종하고 믿음으로 살아갈 수있도록 끝까지 붙들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끝까지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저주받은 십자가와 죽음까지도 영광으로 바꿀 수 있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떤 것도 좌절과 실패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이 당하는 고난을 부끄러워 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영광으로 바꾼 분이라면 우리의 연약함도 좌절도 하나님이 바꾸셔서 선을 이루실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잘하고 성공하여 세상사람들이 부러워 하는 자리에 서야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실패와 연약함 통해서도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3절을 보시시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이란 단어도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중 하나입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요 3: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영생이란 영원히 오랫동안 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냥 이렇게 오래오래 사는 것이 영생이라면 과연 축복이겠습니까? 여러분의 삶이 이대로 영원히 계속된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심판일지도 모릅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영생이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천국이 천국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 그 자체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을 아는 자가 누리는 축복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은 그래서 복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영생을 얻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맛볼 수 있습니다.
영생을 모르는 자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단지 지성으로 하나님을 알면 우상숭배입니다. 로마서 1장 21절∼23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

영생과 천국 맛보기

우리가 거듭나서 우리안에 계신 하나님을 알아야만 영이신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육신대로만 알면 나사렛에 살던 예수일뿐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실족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육신대로만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듭나면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이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의심없이 믿을 수 있습니다. 생명이 생명을 알아보는 법입니다. 예수님을 알아야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아는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속에 영생이 있는 것을 알고, 천국에 가기 전에 영생을 맛보는 것, 내가 참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는 일이 이미 영생을 누리는 증거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방법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맡기신 일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큰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한 달란트라도 내게 맡기신 것에 충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다. 다섯 달란트나 열 달란트를 가진 사람을 부러워 하지 마십시오. 작은 일이지만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것에 충성하면 하나님이 더 크신 일을 맡기실줄로 믿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모두가 손가락질을 하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당당하십니다. 이것은 순종한 사람의 담대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광을 주실 것을 믿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다 이루었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일을 다 이루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짧은 생애를 보내셨습니다. 다른 모든 종교의 창시자처럼 오래 살지 않으셨습니다. 단 3년을 사역하셨습니다. 그리고 33년의 나이로 운명하셨습니다. 그런데 다 이루었다고 하십니다.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70, 80년을 살아도 슬픔뿐이고 헛되고 헛된 것 뿐이라면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면 우리가 누렸던 모든 것은 부끄러움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 우리를 통해서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십니다.
예수님은 시작과 끝을 기도로 마무리하셨고, 모든 고난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도 고난과 역경이 있을 지라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하루를 마감할 수 있다면 우리도 담대하게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영화롭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고백이 있을 줄로 압니다.
여러분,
평생동안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단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감하며 하루를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그 영광이 우리의 삶에서도 이루어 질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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