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채찍과 가시면류관 (막 15:15-19)

첨부 1


우리가 사순절 기간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고난을 살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 전체 가 고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작은 파편과 같은 흔적을 통해서 주님의 고난을 저희들이 상고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것은 우리들이 창 밖을 내다 볼 때 문을 활짝 열지 않고도 구멍 을 조그마한 뚫어 놓고 그리고 거기에 눈을 요렇게 대고 바라보면 처음에는 좁게 보이는 것 같지만 넓게 보이는 것과도 같이 우리들이 파편 조각 같은 한 주님의 삶의 흔적들을 통해서 깊이 묵상하고 들여다보면, 주님의 고난을 볼 수 있으며 또 그 고난 넘어 있는 하나님의 은 혜를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우리가 고난을 깨우치는 흔적을 상고하고 있습니다. 구유에서, 옥합에서, 떡과 잔에서 그리고 대야와 수건에서, 오늘은 채찍과 가시 면류관 여기에서 바로 이 주님의 고난의 흔적을 깨우치고 신앙인 에게 주어지는 도전이 어 떤 것인가 상고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은 점차 가시화되었고 구체적이 되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를 당하시 고 재판을 받으시게 됩니다. 그 첫 과정이 채찍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자색 옷을 입히신 것이고 또 한가지는 가시 면류관을 엮어서 머리에 씌운 것입니다. 주님의 채찍 이 과연 고난과 어떻게 관계가 있는 것인가? 15절 말씀을 여러분 보시죠. 15절에 보면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채찍, 채찍으로 맞았다고 하는 것, 채찍질의 아픔은 상당히 큰 것입니다. 그러나 채찍질의 아픔의 문제가 아니라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고 보아야 할 고난은 재판이 종결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 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죄인으로 선고를 받는 것입니다. 아무리 억울해도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을 죽이려고 하는 무리들은 바로 이 판결을 얻어내기 위해서 재판이 빨 리 끝나서 처결할 수 있는 이 판결을 얻어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서 목요일 밤에 예수님을 체포하고 금요일 새벽까지 짧은 시간동안에 일곱을 왔다갔다하며 재판을 하게 됩니다. 안나 스의 집으로 대제사장의 집으로 빌라도에게로 그리고 또 헤롯에게로 다시 또 이제 빌라도에 게로 왔다갔다하는 재판의 과정을 일곱 번이나 갔습니다. 여러 차례 재판을 위해서 예수님 을 끌고 다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빌라도로부터 '채찍질하라' 이런 판결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죄인이 아닌 사람이 죄인으로 선고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죄인이 아닌 사람이 죄인으로 선고받은 사실이 본인에게 있어서 얼마나 억울하며 고 난이 되겠습니까? 옛날에 법정 야화라고 하는 얘기가 드라마로 많이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검사나 한 죄인을, 본인은 아무리 부인을 해도 죄인이라고 해서 결국에는 그를 감옥에 넣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폐인이 되어서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을 뜹니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나고 장례를 치루고 나서 빈 무덤에 어떤 사람이 와서 꽃을 두고 갑 니다. 바로 죄인이라고 선고를 내렸던 그 검사가 양심에 가책을 느껴서 이제 억울하게 죽어 간 그 사람을 위해서 꽃을 놓고 가는 이제 법정야화, 그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아마 종종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죠. 죄인이 아닌데 죄인이 되었습니다. 요즘에 선거를 앞두고서 후 보자들의 전과를 공개한다고 폭로한다고 그러는데 그것을 공개하니까 다 억울하다고 그러지 잘못했다고 그러는 사람은 별로 없더라구요. 분명한 전과 기록인데도 불구하고 그걸 가지고 억울하다고 얘기하고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뭐 국민이 심판을 해달라나요. 이미 법 에서 심판을 받은 분, 분이라고 해야 할지 놈이라고 해야할지 참 구분이 안 갑니다. 이 사 람들이 억울하다고 국민이 심판을 하면 된다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변명도 없었습니다. 변호도 할 수 없었습니다. 변호할 사람조차도 없었습니 다. 왜냐하면 주님을 변호해야 될 사람들이 주님의 제자들인데 제자들이 다 도망가고 없으 니 누가 주님을 변호하겠습니까? 변호도 안 하시고 변호할 사람조차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 님에 대한 죄에 대한 문제도 뚜렷치 않은데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정치적인 죄가 포함되 어 있기는 했는데 그것도 징역 몇 년이 아니라 아예 사형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는 끝났다. 이 사람은 죽을 죄인이다. 매를 맞아라. 매를 맞아도 싸다는 것입니다. 채찍질 하라는 것입니다. 채찍질 자체도 무서운 형벌입니다. 그 채찍을 만드는 것은 여러분이 영화 를 봐서 알겠습니다만은 이제 가죽끈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끝에다가는 납덩이를 답니다.

아니면 짐승의 뼈 같은 것을 이렇게 조각을 해 가지고 그 끝에다가 답니다.

그리고 죄인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매달아 놓거나 아니면 기둥에다 붙잡아두고 채찍질하게 됩니다. 로마 병정들은 워낙 채찍질하는 것이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채찍을 휘두르게 되 면 이 채찍이 몸에 휘감기게 되겠죠. 그 정도 아픈 것은 괜찮은데 그 다음에 잡아당길 때 그 채찍 끝에 있는 납덩이가, 아니면 뼈 조각이 바로 가죽을 살가죽을 뜯어내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채찍 형벌 때문에 사형언도를 받지 않았는데도 죽은 사람이 허다하다고 합니다.

채찍을 몇 대 맞고 정신이 미친 사람도 많이 있다고 그럽니다. 그야말로 이것은 죽음의 전 주곡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난이요 공포, 그 자체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채찍 그 자체가 주는 아픔도 중요한 것이지만 여기 더 쓰라린 아픔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은 이 고난과 이 채찍이 인간의 버린 비겁과 무책임으로 주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만족과 다른 사람의 만족을 위한 비겁한 일 때문에 그리고 '이게 무슨 내 책임인가?' 하는 무책임 때문에 이런 고난이 주어 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비겁함과 무책임, 제자들의 비겁함과 무책임, 주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군중들의 비겁과 무책 이것으로 이런 채찍의 고난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정의도 없습니다. 양심의 가책도 없습니다. 진리의 호소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 려워함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주어진 고난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것은 채찍으로 페어 지고, 채찍으로 찢어지고, 채찍으로 상한 고난, 오히려 더 큰 고난이며 비참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고난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냥 매를 맞는 것은 그냥 터지는 것은, 그냥 피를 흘리는 것은 차라리 고난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숙제를 안하고 그 다음에 뭐라고 그러죠? '까짖거 그냥 가서 몸으로 때우지 뭐!' 선생님한테 가서 매 몇 대 맞으면 끝난다 이거예요. 그러고선 숙제 안 하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교사를 할 때 한번은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숙제를 안 해온 아이가 있었어요. '너 아 버지 이름이 뭐냐?' 그랬더니 이 아이가 돌아서서 울더라구요. 왜냐하면 아버지 이름이 망 신당한 것이 부끄러운 것이죠. 차라리 선생님이 때리면 맞는 거로 때우려 그랬는데 몸으로 때우려 하게 하지 않고 '너 아버지 이름이 뭐냐?' 그러니까는 이 아이는 철이 좀 든 아이인 지 눈물을 흘리더라구요. 주님이 채찍으로 맞으신 고난보다 더 큰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가시면류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시 면류관을 엮어서 머리에 씌웠습니다. 고난의 아픔으 로 얘기 한다면은 채찍이 훨씬 아픈 것입니다. 채찍의 고통이 훨씬 더 큰 것입니다. 가시관 도 그 고통은 어려운 것이죠. 가시로 만든 관을 이 머리 위에다가 이렇게 씌울 때 가시가 여기에 박히거나 또 혹은 이렇게 찢기면서 피가 흐르고 고통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것은 한번의 아픔이지만 채찍은 얼마나 오랫동안 아팠겠습니까? 그러나 바로 이 가시면류관 에 더 큰 아픔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조롱과 멸시와 희롱의 아픔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비슷한 모양을 만들어 놓고 장난감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거리에 지나가다 보면은 요즘에도 그게 있는지 모르겠는데 망치가지고 두더지 잡긴가 하는 것이 있죠? 그런데 그 앞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김일성 머리 치기' 그래가지고는 탁 치 면 삑 올라오고 탁 치면 삑 올라오고 우리가 김일성의 모양을 만들어 놓고 김일성 머리를 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실제로 김일성이가 우리에게 맞지는 않았어도 우리를 통해서 얼마나 조롱과 비난을 많이 받았겠습니까? 군대가면 제일 먼저 하는 구호가 뭡니까? '때려 잡자 김일성' 여러분 지금 예수님에게 가시관이 씌어졌습니다. 이것은 무얼 말하는 것입니까? 왕을 상징 하는 것입니다. 왕이 가시관을 썼습니다. 자색옷을 입혔는데 홍포라고 하는 것입니다. 임금 과 귀한 사람은 붉은 옷을 입습니다. 사실은 실제로 옷을 입혀 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놀 리기 위해서 로마 병정이 입고 있는 망토 가운데 하나를 벗어서 이 망토를 예수님의 어깨에 덮어준 것입니다. 그야말로 놀림감이죠. 이거 입고 왕노릇 한 번 해 봐라. 그리고 다른 성 경에 보면은 예수님의 손에 갈대를 쥐어 줬습니다. 임금님의 홀이라는 것이죠. 그들은 예를 했는데 어떻게 했습니까? 그분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그분의 얼굴에 머리를 쳤습니다.

그리고 절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 가장 불행한 자리와 가장 고통스러 운 자리와 가장 모욕적인 자리에 사람을 앉혀 놓고 '평안하라.' 여러분 이러한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부인하 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사랑과 따뜻함의 진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너는 가짜다. 너는 위선이다. 너는 허위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더욱 고난으로 하는 것이며 실패를 더욱 실패로 하 는 비참함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순간에, 어떤 때에 갑자기 어느 자리에서든지 어떤 자리를 물론하고 나는 인 정받지 못하고 있다. 나는 무시당하고 있다. 이런 생각될 때 얼마나 억울하고 배반감이 크 겠습니까? '나는 자식들이 인정을 안해, 나는 우리 집에서 더 이상 부모가 아니야. 그 때의 부모님의 마음이 얼마나 쓸쓸하고 슬프겠습니까? 나는 더 이상 인정받을 수 없어. 우리의 존재가 부인되고 우리의 존재가 무시되고 그 동안 내가 땀흘리고 수고한 것이 다 무시될 때 얼마나 억울하고 고통이 있겠습니까? 바로 오늘 말씀에서 주님이 당하는 더 큰 고난은 바로 이 가시면류관이라고 하는 조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로마 병절들이 예수님을 이 렇게 놀리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이 사람들에게는 다른 악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조 금 있으면 죽을 사람을 그러나 이 예수님에 대한 부정은 이미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죠. 그리고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했죠. 그 부인했던 현장에 주님과 베 드로의 눈이 마주 쳤는데 주님이 이 베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 혹시 주님이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시지 않았을까요? '베드로야 정말 너도 그러 냐? 정말 너도 나를 모른단 말이냐? 정녕 모른단 말이냐?' 결국 이러한 부인의 행태는 그리 스도 자신에 대한 부인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분에게 큰 고통이었습니다. 큰 비참이었습니 다. 꼭두각시가 된 고난이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흔적 그 속에 나타나는 채찍과 면류관은 엄청나고 심층적인 고난이었음을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데 우리는 이 고난에만 머물러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고난의 흔적을 넘어 서 더 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채찍에서 살펴봅시다. 채찍 속에서 그 고난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됩니 다. 그것을 이미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서 56장에서 이렇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가 징 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안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 말을 현대어 번역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하게 되도록 그가 징벌 받으셨 고, 그의 매 자국으로 우리가 나았도다.'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는 이 주님의 채찍의 고통 속에서 우리를 고치셨다. 우리를 낳게 하 셨다. 나음을 입게 하셨다는 것을 치료하신 은혜의 고난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 다. 질병을 고치시고 간구를 고치시고, 시험을 이기시고, 죄인을 온전케 하신 치료란 것입 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증거를 이런 찬양 가사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빌라도의 군인들이 때린 채찍에 찢어져 피로 물든 주님 등허리, 온 인류의 질병을 속하셨으니 치료의 강물에서 넘쳐흐르네' 주님의 채찍의 고통, 주님의 찔리신 그 고난의 흔적 그 자리에 바로 치료의 생 수, 치료의 강물이 넘쳐 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이 이 치료의 강물에서 상처를 씻을 수 있습니다. 우리 지금 치료의 강물에 우리의 상처를 씻읍시다. 우리의 어리석음을 씻고, 절망을 씻고, 고통을 씻고, 고독을 씻고, 눈물을 씻고, 병을 씻읍시다. 우리의 죄악 을 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주님은 이 모진 고난 앞에서 우리가 때론 염치없는 것 같지만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그 은총을 덧입도록 우리는 기도하고 그 분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범죄 했습 니다. 간음죄를 범했습니다. 책망 받았습니다. 그랬을 때 그는 '맞아 나는 죽일 놈이야. 하 나님 나를 죽여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그런 일이 있죠. 한 번은 우리 아이가 어렸을 땐데 뭘 좀 잘 못했어 요. '너 잘 못했지.' '네 잘못했습니다.' '어떻게 할래?' 그랬더니 이 녀석이 '아빠! 때려 주십시오' 때려 달래 자기를, 그래서 '얼마나 맞을래?' '마음대로 때려주세요.' 그러니까 못 때리겠더라구요. 그런데 제가 어렸을 때 그와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제가 뭘 좀 잘못했 어요. 근데 저희 삼촌이, 저의 아버지가 안 계셨으니까, 삼촌이 '너 잘못했지?' '잘못했습 니다.' '어떻게 할래?' '맞겠습니다.' '몇 대 맞을래' '적당히 때려주세요' 그러면 될 걸 ' 열 대 맞겠습니다.' 그랬더니 말이죠. 그 옛날에 장작개비 있지 않습니까?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땐데 그 장작개비를 가지고 엉덩이를 열대나 때리시더라구요. 우리 어머니는 말리지도 못하고 돌아서서 눈물만 흘리시더라구요. 참 미련했다.

다윗은 범죄 했습니다. '주님 죽여주십시오.' '주님 때려주십시오.' 그게 아니였습니다. ' 주님 말갛게 씻어 주십시오. 나를 씻겨 주십시오. 우슬초로 씻겨 주십시오. 깨끗하게 씻겨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채찍에서 '얼마나 아프셨을까? 얼마나 고통 받으셨을까?' 이런 감상적으로 생각보다는 '주님 그 상처에서 나오는 치료의 광선으로 치료 의 강물로 그 아픔으로 나를 고치소서, 나를 위로하소서 나의 억울한 것을 주님께서 제하소 서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는 이렇게 의지하며 승리해야 할 줄을 믿습니다. 바로 이것을 보 아야 하는 것입니다. 치료의 강물에 우리를 적시는 은총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가시 면류관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피 흘리시고 나약하시고 매맞 는 예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엎드려 절하고 섬길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냥 맞으시고 피 흘리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왕이시라 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왕이 왜 가시관을 쓰셨을까요? 왜 조롱을 받으셨을까요? 그 분은 겸손하신 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섬기는 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용서하시고 화해하 시는 왕이시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 분은 주관하시고 다스리시고 뽐내시고 부리시는 이런 왕이 아니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우리들이 홍포와 침 뱉음만을 보지말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면서 너희의 왕이로다 하시는 이 하나님 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빌라도의 입을 통해서 말씀했지만, 그분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의 왕입니다. 그 앞에서 우리의 면류관을 벗어버립시다. 우리의 헛된 교만을 벗어버립 시다. 우리의 세상 욕심을 벗어버립시다. 우리의 신발을 벗어버립시다. 왜냐하면 그 분이 계신 곳은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왕이시면 나는 섬기는 종이 됩니다. 그 분이 내 집의 왕이시면 우리의 집은 초가집이라도, 사글세, 월세 방이라도 궁궐이 됩니다. 그 분 이 왕이시면 십자가도 영광이 됩니다. 그 분이 왕이시면 채찍도 치료가 됩니다. 그 분이 왕 이시면 가시관도 승리의 면류관이 되는 줄을 믿습니다. 그 분이 왕이시면 우리는 그 분에게 철저하게 순종하고 철저하게 충성해야 됩니다.

우리는 영국의 왕을 얘기하면 늘 엘리자베스를 말합니다. 엘리자베스 Ⅰ세 Ⅱ세 이렇게 얘 기를 많이 하는데, 실제로 엘리자베스 Ⅰ세는 아주 어린 나이에 왕이 됐습니다. 그 분의 할 머니가 영국 역사 가운데 아주 흔히 할 수 있는 말로 여걸이라고 하는 그런 왕이었습니다.

힘이 있고, 대가 세고 통치권이 있는 그런 왕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그의 아들에게 왕의 자 리를 물려 줬습니다. 아들은 왕의 자리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금방 세상을 떠나게 되었 습니다. 그래서 어린 소녀가 우리 역사에서의 단종과 같은 어린아이가 왕이 되었습니다. 우 리는 어린 왕 된 거 쫓아내고, 죽인 일 역사상에 많이 있죠. 할머니가 가만히 이제 왕관을 쓴 자기 손주, 손녀가 왕관을 쓰고 있는 모습을 보니 불쌍하기도 하고, 딱하기도 하고 '저 게 어떻게 왕 노릇할까?'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그래서 그 어린 손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여러 가지 위로하는 편지를 쓰면서 그는 맨 마지막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폐하를 사랑하 는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로부터' 그는 당당했던, 권위 있던, 대왕대비 같던, 그런 할머니 의 모습으로, 대왕대비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폐하를 사랑하고 폐하에게 충성스러 운 신하입니다. 가냘픈 소녀에게 나이 어린 소녀에게, 연약한 어린 왕에게 그렇게 말했습니 다.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이 사람이 유명한 엘리자베스 Ⅰ세가 된 왕입니다.

십자가의 주님, 피 흘리신 주님, 그러나 그 분은 나의 왕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서 다시 한 번 확신해야 됩니다. 고백해야 됩니다. 주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심을 믿습니까? 나는 그 분의 충성스러운 신하임을 인정하십니 까? 그러면 그 앞에 엎드립시다. 그의 이름을 높여 드립시다.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합시 다. 영광의 찬양을 드려야 됩니다. 그 분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나의 왕으로, 나의 창조자 로, 나의 치료자로, 나의 구원자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이 왕 앞에 고백합시다. 주 예수여 오소서, 나를 다스리소서, 나를 치료하소서, 그리고 나의 왕에게 진 실하게 하소서, 이 왕에게 충성하게 하소서, 나의 왕이신 주님이 나의 영광이 되소서. 이를 위해 주의 채찍과 가시면류관을 잊지 않게 하시며, 이를 위해 나를 갈보리로 인도하소서. 우리는 영광 받고 대접받고 화려하고 권세 있는 이 자리에서 그 자리에서 주님을 왕으로 부 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자리에서 채찍 맞는 자리에서, 피 흘리는 자리에서 누가 조롱 을 해도 '아닙니다. 당신은 나의 왕이십니다.' 이를 위해서 나는 주님의 채찍과 가시 면류 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를 갈보리 길로 인도하소서. 하나님은 우리를 승리케 하실 줄 로 믿습니다. 그리고 치료하실 줄로 믿습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우리 이 시간 주의 이름을 높이는 마음으로 이 찬양을 함께 드리면서 말씀을 정리하십시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2006-02-26 23:00)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