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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의 그 사랑 (요 12: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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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이날은 예수님이 공생애 3년을 마치시고 그동안 수없 이 반복하여 말씀하셨던 최후의 죽음을 맞이하시기 위하여 드디어 죽음을 5일 남겨 놓으시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게 되었을 때 제자들과 군중들이 종려나 무가지를 꺽어 흔들며 주님을 환영했던 역사적 사실로 이날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날은 예수님이 대환영을 받으셨기에 주님께는 매우 기 쁜 날일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은 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 로 이날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주간이라 함은 오 늘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금요일을 지나 무덤에 계셨던 토요일까지 계속됩니다. 예수님의 전생애가 다 그랬었습니다만 특별히 이 기간은 예수님 이 하나님으로서의 자존심을 다 버리시고 가장 낮아지시는 데까지 겸손하셨던 기간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고난주간은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며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매우 특별한 기간이요, 특히 고난주간의 클라이막스인 금요일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각별한 날입니다. 우리가 매일같이 말하고 찬양하고 기독교의 상징으로 되어있는 십자가는 바로 이 날 등장합니다. 십자가는 원래 아름다운 것도 아니요, 찬양할 만한 것도 아니요, 교회 지붕마다, 강대상 마 다 내걸만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지금이야 십자가로 목걸 이도 만들고 귀걸이, 반지 혹은 집안의 장식품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원래 이 십자가는 사형도구중의 하나였으며 그것도 가장 끔직하고 무시무시한 형틀이 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끔직했던지 법으로도 이 십자가가 처형을 극도로 제 한하여 왔고 그것도 로마 자국민에게는 어떠한 죄이건 십자가처형을 금지해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로마 식민지 사람들은 그 잔인함과 끔직함을 직접 보 고 들었기에 '십자가'라는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며 두려워 했다고 합니다.본 문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모습을 간단 명료하게 서술하고 있으나 이때의 장면은 너무나도 처절한 장면이었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까지는 그리 먼거리는 아니었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기 에는 너무 너무 먼거리였습니다. 평탄한 길도 아니거니와 더군다나 골고다 언 덕은 십자가를 메고 올라 가기에는 너무나도 가파른 언덕이었습니다.약 250Kg 이나 되는 엄청난 무게의 십자가를 지시고 가시자니 엎어지고 쓰러지고 또 일 어나고, 엎어지고 쓰러지고 또 일어나고, 엎어지고 쓰러지고 또 일어나고... 무려 일곱번이나 쓰러지셨다가 다시 일어나셔야만 했습니다. 잔인무도한 로마 병정조차도 너무나 처참했던지 구경하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끌어다가 십자 가를 대신 지웁니다. 그만큼 우리 주님의 십자가 행렬은 처참 처참 처참했습 니다. 자욱자욱마다 피요, 엎어질때마다 십자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뼈가 이그러지는 고통이 옵니다. 그뿐입니까? 넘어지기라도 하면 로마병정의 손에 들려있는 아홉가닥의 쇠가죽 채찍이 사정없이 예수님의 등을 내리칩니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예수님의 몸에서는 아홉점의 살점이 뜯겨져 나가면서 피가 철철 넘처 흐릅니다. 제가 아무리 좋은 언변을 가지고 여러분들께 이 모습을 설명한들 그 처절함을 어찌 다 설명할 수 있겠으며, 그 상황을 어찌 다 묘사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처절한 과정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 좋습 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내려오신 것'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 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데 있어서 십자가가 꼭 필요했느냐는 것입 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주재자 이신데, 하늘과 땅의 창조자시요, 주관자시요, 섭리자신데, 없는 것도 있으라 하시면 있고 있는 것도 없으라 하시면 없게 하 시는 분이신데, 이렇게 하셔도 그 누구도 입 벙긋 못하는 절대 주권자 하나님 이신데..., 지구를 태양주위를 돌라 하시면 돌고, 지구를 자전케 하시매 자전 하고, 달과 지구의 거리를 24만 마일로 정하시매 그대로 떨어져 있습니다. 하 나님이 그렇게 하라 하셨으면 됴지 누가 무슨 이의를 제기합니까? 이러한 절 대 주권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신데 인간이 설사 죄를 범했다고 해도 '엥다 모르겠다. 너희 죄는 몇월 몇일 부터 무죄다.'라고 선고만 하시면 됴지 구태 여 왜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여 죽였느냐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일국의 대통 령도 국경일에 입한번만 벙긋하니까 전국의 형무소가 문을 활짝 열고 푸른 수 의를 입었던 죄수들을 쏟아내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한번 선언만 하시면 됴지 왜 굳이 십자가에서 자기희생을 하고 계시느냐는 것입니다. 그 고통의 십자 가, 그 잔인한 십자가, 그 처절한 십자가... 하늘도 무심할 수 없어 해가 빛 을 읽고, 땅도 무심할 수 없어 바위가 터지며, 죽은 자도 무심할 수 없어 무 덤이 터지던 그 십자가, 왜 하필이면 이런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시 는 방법을 택하셨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 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의미를 찾 아보고자 합니다.

1.사람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인간과 바른관계를 맺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를 맺는 방법은 오직 믿음 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믿어 주어야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 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는 말씀을 여러분은 잘 아실겁니다.

우리가 늘 이 말씀에서 강조받는 부분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에 독생자를 주셨다'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마다 이 구절은 단골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첫부분이 아니라 차라리 끝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만 멸망치 않고 영 생을 얻는데 그 바른관계를 맺는 방법은 오직 믿음뿐임을 말입니다. 바른 관 계란 어디서 옵니까? 서로 믿는 관계가 되어질 때 비로소 바른 관계가 되어지 는 것입니다. 사랑도 믿음 다음이요, 이해도 믿음 다음이요, 순종도 믿음 다 음이요... 믿음이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친구간에도,부부간에도,부모자식 간에도 하나되는 교제가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만일 믿음이 없는 관계라면 그 관계는 형식적인 관계요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비밀을 우리가 오 늘 깨닫는다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시는지 그 이유를 알것 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아담이 생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에 부응했었더라면 과연 인간 의 죄와 고통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아담은 의심으로 이 믿음을 파괴하고 말았습니다. 노아시대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구리뱀을 쳐다보지 않았던 사람 들이 그랬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최후의 방법을 동원하십니다. 극 단의 방법으로 희생하여 사람들이 믿지 아니할 수 없도록 접근하여 오신 것이 바로 십자가의 희생인 것입니다. '자기희생'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하 나님을 믿도록 사용하신 최후의 방법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자기의 진 실, 정직, 순결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자기희생'을 택한 경우는 예로부터 많 이 있어 왔습니다. 어떤 여인이 어떤 누명을 썼을 때 은장도로 자결하는 것으 로 자기의 순결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얼마전 어떤 여학교에서 2학년 학생이 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동기인즉, 학급에서 도난사건이 있었습니다. 친구 들이 모두 자기를 의심합니다. 아무리 변명해 보아도 소용 없었습니다. 선생 님까지도 자기를 다구칩니다. 너무나도 억울해서 그 학생은 결백유서만을 남 기고 그만 자살하고 맙니다. 물론 자살한 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 른 방법으로는 자기를 믿어주지 아니하니까 자살이라는 극단적 자기희생의 방 법으로 자기의 결백을 선생님이나 반 친구들에게 증명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이 왜 십자가에 달려 스스로 희생하셨습니까? '내가 너희를 이처럼 사랑하노 라'는 사실을 자기 희생으로 증명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저 십자가 위 에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만하면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알겠지?' '내가 너희를 이만큼 사랑하니 이제는 너희들이 나를 믿겠지?' 십자가의 의미는 이렇듯 자기희생으로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어 바른관계를 맺 도록 하시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요 마지막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2.공의의 속성을 만족하시기 위해 십자가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을 사랑함에 있어서 걸리적거리 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죄입니다. 이 죄문제를 하나님은 어떻게 다루셨 습니까? '인간들아, 이 죄를 어떻게 너희들이 좀 해봐라.그것만 너희듬이 해 결하면 그 다음에 너희를 사랑하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죄의 문제는 인 간이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없음을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친히 십자가에서 그 죄문제를 해결하시고자 자기희생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두번째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입니다. 그리 고 공의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사랑하시지만 인간속에 있는 부패된 죄악성 은 결코 사랑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악성을 심판하시자니 사랑 하는 인간이 죽겠고, 인간을 살리자니 공의의 속성이 만족지 못하고...어쩔수 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고민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로 하나님의 자 기희생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희생을 통해 그 죄값을 스스로 받으셨습니다.

그 심판을 스스로에게 내리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젠 다 됴다. 내게 오라' 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번 여러분께 말씀드렸기에 이 예화를 기억하실 것 입니다. 왕이 선포한 특명을 어겼던 왕자, 이 명령을 어기면 두눈을 뽑히는 형벌을 받아야만 했던 법 때문에 그 죄인 왕자의 두눈은 왕의 사랑하는 외아 들임에도 불구하고 두눈이 뽑혀져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왕자 대신 자신 의 눈을 뽑음으로 법도 지켰고 사랑도 지킬수 있었던 자기희생이야말로 바로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3.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간절한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십자가가 필요했 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세 불리나 속수무책으로 죽으신 것이 아닙 니다. 12영이 더되는 천군천사들이 중무장하고 대기하고 있었기에 명령만 내 리시면 일시에 저들을 진녈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묵묵히 묵묵히 로마 병정들의 포승을 받은 까닭은 무엇입니까? 묵묵히 빌라도의 재판을 닫으신 까 닭은? 묵묵히 그 더러운 놈들의 손에 뺨을 맞으신 까닭은? 묵묵히 묵묵히 침 밸음을 당한 까닭은? 십자가에 살이 찢겨 지고 피가 쏟아져 희생의 제물이 되 어서 묵묵히 묵묵히 감수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저 십자가에 달려야만 죄값 이 청산되고, 그래야만 너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맺어 질 수 있으니 이 방법만이 너희를 사랑하는 증거가 되니 그래서 묵묵히 묵묵히 십자가의 형벌 을 기꺼이 받으셨던 것입니다.

어느 새댁이 첫애를 낳은지 얼마후 애기를 들쳐업고 친정에 갑니다. 친정이라 야 산 두어개만 넘으면 되는 거리였습니다. 친정에서 반갑게 부모님과 대면한 후 하루밤을 지나고 이튿날 아침 시댁으로 돌아가려고 싸립문을 나섭니다. 그 런데 그때 눈이 천천히 내리기 시작합니다. 눈이 많이 쌓이기 전에 빨리 돌아 가야겠다며 만류하는 친정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부지런히 길을 나섭니다,. 얼마쯤 가다가 보니 내리던 눈이 함박눈으로 변하더니 산하나를 채 넘기전에 눈보라로 변해버렸습니다. 얼마나 바람이 불고 눈이 많이 오는 지 이제는 길 조차 보이질 않습니다. 한편 친정에서는 딸이 무사히 도착했는가 저녁 무렵에 시댁에 연락해 봅니다만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큰일났다 싶어 어두운 산길을 친정 동네 시댁 동네 할것없이 젊은 사람들이 모두 찾아 나섭니다. 눈 이 쌓여 길이고 뭐고 도저히 분간할 수 없습니다. 조심조심 길을 찾아 나서는 데 어디선가 애기 울움소리가 들립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눈속 어디에선가 나 는 소리입니다. 주위를 돌아보니 무덤같이 눈이 쌓인 것이 보입니다. 발로 툭 차보니 옷자락이 나옵니다. 헤쳐보니 어머니가 입은 옷은 벗어서 애기에게 감 싸주고 안은채 엎드려 죽어있었습니다. 사정인즉, 그 무인지경에 눈보라는 몰아 치고 길도 사람도 보이질 않습니다. 길을 잃고 산속을 헤메고 있는데 설 상가상으로 뒤에 업은 애기는 춥다고 웁니다. 할수없어 어머니의 겉옷을 벗어 애기를 감쌈니다. 조금가노라니 애기는 더욱 보챕니다. 다른 옷을 벗어서 감 싸줍니다. 한꺼풀 한꺼풀 벗어서 애기를 감싸줍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다 죽 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애기를 쌀 수 있는 모든 것으로 애기를 감싸고 애기를 안고 엎드립니다. 눈을 피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시간이 지나 눈은 두 모자를 덮었습니다. 어머니는 얼어 죽었고 어머니의 희생때문에 애기 는 그때까지 땀을 흘리며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사랑이 자기희 생으로 자식을 살린것,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가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이 아닙니까? 여기에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어디있겠습니까? 십자 가는 가장 극악무도한 자만 죽이는 극형입니다. 왜 예수님이 하필이면 극악무 도한 자만이 죽는 저 십자가에서 죽으셨단 말입니까? 그것은 어떤 극악무도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십자가앞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인은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 다. '인간들아, 어떤 극악한 죄인이라 할찌라도 나는 다 용서할 수 있다'라는 의미의 엄청난 선언인 것입니다. '강도야, 너도 나는 용서할 수 있다.' '창녀 야, 너도 나는 용서할 수 있다.' '살인범아, 너도 나는 용서할 수 있다.' 는 어떤 경우라도 극악한 자들 모두 용서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너희죄 흉악하나 눈과같이 희겠네 너희죄 흉악하나 눈과같이 희겠네 죄의빛 흉악하나 희게 되리라 주홍빛 같은네죄 주홍빛 같은네죄 눈과같이 희겠네 눈과같이 희겠네 너희죄 사해주사 기억아니 하시네 너희죄 사해주사 기억아니 하시네 불쌍한 사람들아 오라하시네 너희죄 사해주사 너희죄 사해주사 기억아니 하시네 기억아니 하시네 극악한 죄인이 당하는 극형으로 죽으신 예수님이 셨기에 이 고백과 찬송이 가 능한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주님이 지금 여러분들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악한죄 벗으라고 주님너를 부르네 악한죄 벗으라고 주님너를 부르네 하나님의 크신사랑 한이 없어라 악한죄 벗으라고 악한죄 벗으라고 주님너를 부르네 주님너를 부르네 4.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간접적으로도 할 수 있지만 그 사랑이 너무나 다급했기에 직접으로 찾아오신 사랑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황제페하께서 용상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한 신하가 다급히 달려와 '황태자 저하께서 지금 물에 빠져 사경을 헤메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합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황제가 맨발로 뛰어나가려고 합니다. 이 때 국무총리가 붙잡고 만류 하기를 '아이고 존귀하신몸, 가볍게 움직이지 마시옵소서. 우리가 나가서 하 겠습니다.'라고 합니다. 내무부 장관이 또 붙잡고 만류합니다. '지엄하신 몸 이신데 어찌 손수 나가시렵니까? 우리가 하겠습니다.' 치안국장이 붙잡습니 다. '영어로운 몸이신데 용상에 그저 앉아 계십시오, 우리가 하겠습니다.' 라 고 만류합니다. 이때 페하가 대답합니다. '아니다. 내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 그 누구에게도 맡길수 없구나. 내가 몸소 가겠노라'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 미입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데 있어서 천사를 시키실 수도 있습니다. 돌을 들어 명하시면 능히 그리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하지 아니하시고 직 접 임마누엘 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는 다른 구원의 방법도 있으려 만 사랑하는 아들이 죄로 인해 사경을 헤메고 있음을 보시고 하늘나라 하나님 보좌에서 하나님 노릇만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 황제의 고백은 하나님의 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아니다 아니다. 내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을 누구에게 맡길수 없구나 내가 몸소 내려가마' 이러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 그 것이 곧 십자가의 의미인 것입니다. 스폴젼 목사님이 미국으로 집회를 갔을 때 자동차를 타고 길을 달리는데 자기도 모르게 고개가 자꾸 남쪽으로 기울여 지더랍니다. 왜그런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시집간 막내딸이 바로 남쪽에 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딸이 자기가 온것을 알턱도 없고 설사 안다하더라도 그림 자인들 보일턱도 없지만 딸이 그 방향에 산다는 것 때문에 고개가 자꾸 창밖 으로 돌아가더랍니다. 어버이의 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그림자라고 합니다. 어 버이의 심정이 이러할진대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하지 않겠습니까? 임 마누엘 하신 이유를 아시겠습까? 이 십자가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나위하여 십자가에 중한고통 받으사 대신죽은 주예수님의 사랑하신 은혜여 보배로운 피를 흘려 영영죽을 죄에서 구속함을 얻은 우리 어찌찬양안할까 (2006-02-26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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