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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의 재발견 (요 19: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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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유대나라 세울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백성들이 종려 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겉옷을 벗어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에 펴고 호산나 찬송을 부르며 환영했던 날입니다.
머지않아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내다보시는 주님에게 있어서는 너무도 화려한 수난의 서곡이었습니다. 선지자로 오신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전하시다가 오늘 왕으로서의 나귀를 타고 찬송을 받으며 입성하셨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이기에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야 했습니다. 이 종려주일의 화려한 서곡에 대해 예수님의 고난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절정을 이루고 운명하여 무덤에 갇힘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이디오피아는 주후 3세기부터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나라로서 지금도 전 인구의 3분의 2가 교인이며, 매년 세례식 때면 공동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최고의 큰 명절이 있는데 그것이 '마스칼'이란 절기입니다. '마스칼'이란 말은 이디오피아말로 '십자가의 재발견'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를 발견한 날이라고 해서 온 국민이 큰 명절로 지킵니다. 우리 주위에 십자가는 많지만 진정 주님의 십자가를 잊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십자가 없는 교회는 없지만 진정 십자가 중심의 교회는 얼마나 되는지요? 교회 종탑이나 강단과 제단에 십자가 마크가 선명하지만 나의 마음, 나의 가정. 내 교회 생활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희미하지 않은지요?
이 시간 우리는 종려주일을 지키면서 주님의 십자가의 뜻을 재발견하여 주님의 수난에 만분의 일이라도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십자가에서 우리는 인류의 죄악의 깊이, 곧 내 죄가 얼마나 무섭고 치명적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영광스럽고 존귀한 것이지만 주님 당시 십자가란 로마나라 사형수를 집행하는 형틀이었습니다. 나무로 만든 십자가 형틀로써 죄인을 매질하고 그에게 지워서 형장까지 끌고 가게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형을 위에 옷을 벗긴 죄수를 십자로 눕히고 두 손 벌려 나무에 못을 박고 두 발을 모두어 못박은 다음 일으켜 땅 위에 바로 세워 죽을 때까지 내버려 둡니다.
주님께서는 빌라도가 말한 대로 아무 죄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머리에는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씌워 이마에서 붉은 피가 흐르며 손과 발에 못박혀 매어 달리신 몸무게로 찢어지는 아픔을 왜 받으시고 왜 당하였을까요?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는 우연히 부득이 해서 지신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죄를 속죄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죄값을 치루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속죄의 어린 양으로 희생하시어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면 안 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곧 우리의 죄의 깊음과 무서움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책임을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릴 수 없습니다. 내가 죄를 짓고 있고 내가 죄인인 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장본인은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우리들입니다. 나의 죄악의 깊음이 십자가를 골고다 언덕에 높이 세우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죄가 얼마나 무섭고 치명적이며 깊은가를 보여 줍니다.
2. 주님의 십자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크기를 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하나님이 인류를 향하신 크신 사랑의 높이를 우러러보게 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표식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의 참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도, 가장 억울하고 비참한 죽음을 죽어 가시면서도, 타락한 군중들의 발악의 틈바구니에서도 저주나 앙갚음 대신 하나님께 자기를 해치는 무리의 죄와 무지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크고 숭고한 사랑의 발로입니까? 참으로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완성이요, 확실한 증거입니다. 언제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날 때면 정신을 가다듬고 십자가를 높이 바라보십시오. 아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는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은 뒤 어느 날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면서 '오 주님, 제가 죽기 전에 꼭 두 가지의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먼저 저로 하여금 저의 육체와 영혼이 십자가의 고통을 체험하게 하시고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을 사랑하신 뜨거운 사랑을 저의 마음 속에 간직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신 오직 하나의 표상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노라고 하시는 무언의 말씀이요,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증명해 주시는 '보이는 웅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사랑의 환희를 보여 줍니다.
3.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우리의 선택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십자로를 보게 됩니다. 십자로에서 동서남북 어느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그의 가는 길과 장래가 좌우되며, 십자가 앞에 설 때 우리가 십자가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나의 앞날과 삶이 결정됩니다. 십자가를 어리석고 미련한 것으로 보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당하고 영원히 죽을 것이요, 십자가를 구원의 지혜로 선택하는 사람은 참 영원한 삶의 승리를 누릴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우리 인생에서 있어서 생사의 기로이며, 누구나 십자가 앞에서 생사의 기로에, 그리고 영원한 멸망과 영원한 생명의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의 죄를 대신하기 위한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믿을 때 십자가는 우리에게 구원의 능력으로 참 삶의 길이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속죄의 도리를 믿지 못할 때 내 죄 값으로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가 거침돌이 되는 사람도 있고, 구원의 빙거가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버리느냐, 소중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구원을 받고 생명의 승리를 얻느냐, 못 얻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귀중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십자가는 날마다 시간마다 나에게 결단을 강조합니다.
 
 (2006-02-26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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