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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스라엘의 위로 (눅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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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위로 (눅 2:25)

며칠 전에 제가 이메일 한 통을 받았습니다. 스팸 메일이나 광고 메일이 많이 오기 때문에 제목만 보고 지워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제목이 눈에 확 띄는 것이었어요. 제목이 뭐였는가 하면 '위로의 하나님이 계시니'였거든요. 보낸 사람 이름을 보았더니 저의 누님이에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서 메일이 오는 수도 종종 있기 때문에, 50대 중반의 아줌마가 이메일을 보냈으리라는 생각보다는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이 보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열어보니, 누님이 보낸 게 맞았어요.

'선아, 고생이 많지? 아이들이랑 애들 엄마는 잘 있는지, 새벽마다 너희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행복한 성탄이 되기를 바란다. 너를 사랑하는 누나가...'

저희 형제들은 가운데가 정자 돌림이기 때문에 식구들끼리는 가운데 글자를 빼고 끝자만 부릅니다. 그래서 저를 '선아!' 이렇게 부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 몇 명 되지 않아요. 그나마 이제 서로 같이 나이를 먹어가는 마당에,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은 형이나 누나는 저를 부를 때 '선아!' 이렇게 못부르더군요. '한솔이 아빠' 이런 식이지요. 그러니까 10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형님이나 누님들만 '선아!' 이렇게 저를 부릅니다. 그리고 제가 지난 몇 년 동안 외국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선아!' 이렇게 친밀하게 부르는 소리를 들어볼 기회가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선아!' 이 한 마디에 얼마나 마음이 포근해지는지, 마치 어린 시절의 고향으로 돌아간 기분이었어요.

갑자기 이 누님이 '위로의 하나님이 계시니'라는 제목으로 이메일을 보낸 것은 바로 그 전에 저와 자형이 주고받은 이메일의 내용 때문인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이 자형은 거의 30년 가까이 목회를 했는데, 한국에서 목회를 하다가 미국에 가서 한인교회 목회를 몇 년 하셨어요. 그리고 다시 돌아와 지금은 한국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내처남이 목회를 하게 되었다니 충고 겸 격려의 메일을 보내 주신 거예요. 자신도 처음에는 후회도 많이 했고, 밤새워 울기도 하고, 보따리 싸서 도망가고 싶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벌써 30년 가까이 참으며 살아왔고, 이제는 목사보다 좋은 것이 없고 최고의 보람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을 가지고 많이 기도하며 참고 사는 것이 목회의 길이라고 하셨어요. 우리가 수요일 밤에 디모데전서를 살펴보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경험많은 바울이 젊은 사역자 디모데에게 충고하고 당부하는 내용들이지 않습니까? 저의 자형이 저에게 충고와 격려의 말씀을 해 주신 것도 그런 분위기지요?

자형의 메일을 받고서는 위로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어요. 목회생활 30년을 돌아보면 그런 남모를 고통과 어려운 순간들이 정말 많았겠구나. 지나고 나서 돌이켜보면 추억일 수 있겠지만, 그 당시에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목회생활이 그런 것이라면, 나에게도 그렇게 후회하고 밤새워 울거나 보따리 싸가지고 도망가고 싶어질 때가 없으리라는 보장을 없을 텐데...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걱정이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윤목사님 하신 말씀이 생각났어요. '너는 목회도 안 했으면서 왜 속이 그렇게 썩었노?' 그러던 차에 누님의 메일은 정말 위로가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게 보따리 싸고 싶은 순간에도 참아야 할 이유와 근거가 있다는 것이지요. 무엇입니까? 바로 위로의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위로의 하나님이라는 사실, 우리가 근심 중에 있을 때 위로해 주시고 우리 눈에 눈물을 닦아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밤새워 울 때 위로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눈물을 그치고 웃는 얼굴로 아침해를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따리를 쌌다가도 위로의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다시 보따리를 풀어놓을 수 있을 거예요. 어쩌면 누님 자신도 그러한 상황에서 위로의 하나님을 만났었기 때문에 그러한 위기들을 극복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하나님이 말로만 위로의 하나님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어떻게 그의 백성을 위로하고 돌보셨는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여기 보니까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 시므온이 누구인지, 나이는 얼마나 되었는지 잘 모릅니다. 전후 문맥으로 보아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이라는 분위기가 감지되기는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 시므온은 유대 역사상 최고의 율법학자 가운데 하나였던 힐렐의 아들이며, 예수님 당시 최고의 스승이었던 가말리엘(바울의 스승)의 아버지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본문에 나오는 시점으로부터 상당한 기간동안 생존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성경은 이 시므온의 신분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의롭다는 것은 사람들에 대한 태도이고 경건하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그야말로 완벽한 사람이네요. 만약 이 사람이 힐렐의 아들이며 가말리엘의 아버지라면, 그 역시 학문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그만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이 시므온의 신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 채 그를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말이야말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위로의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그의 백성 이스라엘이 고난과 위기 가운데서 허덕이며 부르짖을 때 구원으로 다가오셨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구원이야말로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최상의 위로였지요.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살아온 역사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 이스라엘의 위로가 분명하게 나타났던 때를 몇 번 꼽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가 되어 고통 속에서 부르짖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낙이라는 게 없었어요. 그저 죽지 못해 살고 있었을 뿐입니다. 상황이 호전될 기미나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제는 오로지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구원해 주실 것만을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구원자 모세를 보내셔서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위로하셨습니다. 또 유대족속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머나먼 타국으로 붙잡혀간 적이 있었습니다. 국가공동체는 붕괴되었고 하나님의 언약공동체가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상처입고 무너진 이스라엘의 마음을 하나님은 어떻게 위로하셨습니까? 고레스라는 페르시아 왕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삼으셔서 그들을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하셨던 것이지요.

시므온이 살던 역사의 현장 역시 하나님이 위로해 주셔야만 회복될 수 있는 절박한 현실이었습니다. 주변 열강들의 세력다툼 속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그래도 독립왕국을 건설하며 옛날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할 꿈을 가졌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계제국인 로마가 등장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자존심과 긍지는 여지없이 박살나고 말았습니다. 로마의 꼭두각시인 헤롯 왕조는 이스라엘 변방의 별 볼일 없는 이두메 족속 출신이었습니다. 오랑캐를 왕으로 받들어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비애를 어디에 비기겠어요? 또 로마의 압제와 폭정도 그들의 고결함이나 특별한 존재라는 주장을 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특수한 신분의 근거가 되었던 여호와 종교 역시 세속권력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을 뿐이었지요.

이러한 때, 시므온과 같이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 바라고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어둠이 깊어갈수록 아침이 기다려지듯이, 어둡고 고통스러운 현장에서 그들은 메시야가 오시리라는 희망만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애굽 땅에 모세를 보내셨던 것처럼, 바벨론에서 고레스 왕을 사용하셨던 것처럼, 이제 하나님이 그의 메시야를 보내실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자기 백성을 위로하실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야, 하나님의 구원, 이스라엘의 위로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그래서 고통 속에 절규하는 이스라엘에게 '아, 이제 살았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게 하는 싸인이었습니다. 마태는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마 4:16)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이스라엘에게 위로가 되시는지를 설명했습니다.

29절에서 시므온이 이렇게 말하지요?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모든 사람들이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저 막연하게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에게는 죽기 전에 자신의 눈으로 그 메시야를 보게 되리라는 약속이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메시야를 눈으로 볼 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눈을 감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행여 무슨 먼지바람만 불어도 메시야가 기병대를 거느리고 나타난 것은 아닌가 하고 긴장이 되었습니다. 어디서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것을 보기만 해도 혹시 메시야가 나타난 것은 아닌가 가슴이 뛰었습니다. 늘 이러한 긴장과 기대 속에 살던 시므온이 마침내 메시야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태어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아기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시므온의 소원은 이루어졌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약속도 이루어졌습니다. 마침내 메시야가 오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구원이 선포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아니, 이미 선포된 것입니다. 바로 그 이스라엘의 위로를 시므온은 보고 있습니다. 그 메시야를 자기 팔에 안고 축복하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그 아기 예수가 시므온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요? 이제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기 민족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해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사실 이 메시야는 그를 알아본 시므온 뿐만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위로였습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메시야는 이스라엘 민족의 메시야가 아니라 온 세상의 메시야였습니다. 시므온은 그것을 알았어요. 30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하지요?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혹독한 압제 아래서 신음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머나먼 바벨론에서 민족과 국가의 회복을 위해 부르짖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져버린 것으로 인해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리던 이스라엘처럼, 온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며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이 왕노릇하는 곳에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입니다. 메시야의 오심을 전하러 왔던 천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

이 땅에 메시야로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위로를 가지고 오신 분이었습니다. 깨어지고 어그러진 세상을 위로하셨습니다. 그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구원자는 동시에 우리 각 개인의 구원자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단체로 그 구원에 휩쓸려 들어가게 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영혼 하나하나를 개별적으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개인적인 구세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슬픔과 고통에 귀기울이시는 분이세요. 세상에 하나님의 위로를 가지고 오셨던 그분은 우리 각자 개인의 삶에도 위로를 가져다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번민과 고뇌로 밤을 새워야 했던 적은 없으십니까? 이것저것 모두 포기하고 인생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던 때는 없던가요? 제어할 수 없는 죄악과 욕망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해 처참해진 자신의 모습에 몸서리를 쳐야 했던 적은 없었나요? 여기 위로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바라보십시오. 그 위로를 사모하십시오.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여러분의 슬픔과 고통, 고난과 고독, 그리고 죄와 사망으로부터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 아기 예수의 탄생에 온 피조물이 환호하고 기뻐하며 위로를 받았던 것처럼,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찾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여러분의 인생에 사막에 생수가 흐르는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 예수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눈물이 웃음으로 변하고, 그 예수를 만남으로 인하여 여러분의 절망이 환한 희망으로 바뀌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기쁘고 복된 성탄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우리 마음에 위로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위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축복을 다같이 누리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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