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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신 목적이 죽음이었던 그리스도 (마 16: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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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신 목적이 죽음이었던 그리스도 (마 16:20-23)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조용히 불러모으시고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예수님의 이 질문은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많은 논쟁과 연구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과연 그는 누구였는가? 그저 팔레스타인 변방에 출현하여 짧은 기간 군중의 인기를 누리다가 체포되어 처형된 한 죄수였는가? 세계 4대성인의 반열에 오를 만큼 위대한 생을 살다 간 인류의 스승이었는가? 아니면 참으로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였는가? 이 질문에 대한 여러 가지 대답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들은 인류의 역사와 철학과 문화 등 많은 부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질문은 모든 인간, 각 사람에게 가장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예수님의 아이덴티티를 규명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이 지금까지 수집한 정보를 내놓습니다.
“네, 어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라고 하더군요.”
세례 요한을 죽이고 나서 무척이나 찜찜해하던 헤롯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상당히 긴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하는 얘기가 그는 바로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헤롯이 무척 두려워하고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어쨌든 그런 소문이 당시 꽤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출현을 보고 큰 희망을 가졌을 터인데, 갑자기 그렇게 억울하게 죽는 것을 보고 못내 안타까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출현을 보고 그에게 요한에게 가졌던 기대와 희망을 투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을 엘리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있는 것 같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에서 엘리야의 위치는 매우 독보적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시대가 끝나면서, 즉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서 하나님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엘리야를 다시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말 4:5). 특별히 엘리야는 죽지 않고 바로 하늘로 들려 올라갔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내시면 언제든지 다시 올 수 있는 사람으로 백성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많은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사람들은 충분히 엘리야가 왔다고 믿었을 수가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보내겠다고 하신 엘리야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예레미야 같은 그런 위대한 선지자임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선지자의 역사라고 할 만합니다. 백성 가운데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백성을 가르치는 것은 선지자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의 모습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선지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지? 그럼 너희들은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러자 성미 급하고 나서기 좋아하는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대답에 예수님은 매우 만족하셨습니다. 지금까지 3년 동안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친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 제자들은 졸업시험에 합격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하산할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라는 그 반석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시면서 그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즉 이 신앙의 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를 통해서만 하나님나라에 올 수 있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시험에 합격했고, 남은 것은 주님께서 구속의 사역을 마무리하시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마침내 처음으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이 졸업시험에 합격하고 하산할 때가 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군요. 새로운 가르침, 다음 단계의 레슨이 이제 시작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이 새로운 레슨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실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의 아이덴티티를 확실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고백에 의해 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이 새로운 레슨, 즉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가서 붙잡혀 고난을 당하고 죽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아직까지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줄 모르고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느니, 엘리야가 왔느니, 위대한 선지자가 나타났느니 하는 사람들에게 섣불리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려서는 안 됩니다. 당시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야의 개념과 정작 그 메시야로 오셔서 주어진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나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은 백성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고백한 제자들마저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자마자 베드로가 달려들어 예수님을 붙잡고 하는 말을 보십시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3년 동안이나 동고동락하며 정들고 사랑하게 된 스승님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니 누가 그것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나려고 한다면 자신이 목숨을 걸고라도 스승님을 보호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명이기도 합니다. 필요하다면 동네 사람들을 모아서 의병이라도 일으킬 용의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베드로, 의리의 사나이 아닙니까? 인간이 이렇게 신의가 있어야죠. 우리 주님께서 그 베드로를 보시며, “그래, 베드로, 고맙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 이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야.” 이렇게 말씀하실 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염려해서 나섰던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아주 극단적인 책망만 받고 말았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치 마른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겠지요? 베드로의 고백에 금방 그렇게 칭찬해 주셨던 주님이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베드로라는 그 반석 위에 자기 교회를 세우겠다고까지 하셨던 주님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드린 말 한 마디에 이렇게 심하게 책망을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까? 베드로는 그야말로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기분이 아닐 수 없군요. 어쩌면 마음의 큰 상처를 받았음직도 합니다.

그리스도, 즉 메시야의 사역과 역할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가 이처럼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커다란 긴장을 야기했던 것입니다. 당시 백성들이 이해하고 기다리던 메시야는 그들을 해방시키고 정치적 독립을 이루어줄 왕이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다윗의 왕국을 재건할 강력한 통치자를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만일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이 알려진다면 온 백성들은 그를 왕으로 모시고 민중봉기를 일으켜 로마의 압제와 싸우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생각하는 메시야는 그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키고 구원하러 오셨고, 그것은 오로지 자신이 스스로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으로 달성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고 왕으로 옹립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본연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비록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충성심에서 주님이 고난당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지만, 결국 그것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와 계획에 저항하는 행위가 될 뿐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유일한 목적은 고난을 받고 죽으시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된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이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스승님이 저 무자비한 군병들에게 체포되어 고난당하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내가 대신 붙잡히든지, 함께 싸우다가 칼에 맞아 죽는 것은 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뭐가 부족해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은 그렇게 죽임을 당해야 할 만큼 힘이 없는 분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힘없이 붙잡혀 죽임을 당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게 죽으셔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오로지 이 목적을 가지고 주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고 의리를 지키려다 보니까 베드로는 결코 주님의 죽으심을 용납할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인간적인 면에서는 참 고맙고 기특한 일일지 모르지만, 인류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는 그것을 방해하려는 사탄의 공작일 뿐입니다. 사탄은 인간의 연약함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망치려고 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가장 가깝고 가장 충성스러운 제자였습니다. 또 방금 그렇게 칭찬했을 만큼 믿음직한 베드로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바로 베드로의 사랑과 충성을 통로로 삼아서 사탄의 유혹이 다가왔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도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사탄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마치 하와를 통해서 아담을 타락시켰던 것처럼 말입니다. 모든 재산과 자녀들까지 잃고 극심한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던 욥에게 그의 아내가 다가와서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기보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럴 때는 사탄의 유혹을 간파하고 물리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아담은 실패했지만 욥은 거기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주님처럼 가까운 사람을 통해 다가오는 사탄의 유혹에 그렇게 무정할 정도로 대처해야 할 때가 있을지 모릅니다.

죽음을 몇 시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주님의 모습을 기억하십니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이 피가 되어 떨어졌을까요? 얼마나 두려웠으면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셔서 온 인류의 죄악을 한 몸에 짊어지고 그 대가로 처절하게 심판의 고통을 당해야 했던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셨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와 동일한 인간의 연약함을 가지셨던 주님에게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육체적인 고난을 걱정했는지 모르지만, 예수님에게는 결코 죄를 용납하실 수 없는 하나님으로서 그 모든 죄를 짊어져야 하는 것이 더 큰 고통이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난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베드로의 만류가 예수님의 두려움과 연약함을 부채질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비록 스승님이 그렇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을 아무런 대책없이 바라만 보아야 했던 베드로의 가슴이 찢어질지라도, 그 방법 외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고백 위에 자기 교회를 세우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들의 손에 붙잡혀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말도 안 되는 사실에 우리가 분노할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그 길 외에는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자기희생이었고, 그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바로 우리의 죄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특권과 은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 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몸소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고난 받으심으로 인하여 가능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은혜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그 크신 사랑에 사로잡혀 사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함으로 인하여 우리의 죄악된 성품이 죽고 우리의 악한 습관이 죽고 더러운 언행과 심사가 죽어 날마다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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