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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마 27:62-2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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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마 27:62-28:15)

어떤 사람이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 한 가지는 그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 보이고 교회 일에 열심인 사람이라도,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지 못한다면 아직 진짜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이고, 그것은 예수께서 인간의 구원을 완성하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만약 부활이 없다면 우리 기독교인들이야말로 가장 불쌍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고전 15:19).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전 15:20)가 되셨다고 했는데, 이것은 곧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처럼 다시 부활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병들어 죽거나 늙어 죽으면 그렇게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서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만약 부활이 없고 그렇게 죽는 것으로 끝난다면 예수를 믿고 소망을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가장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우리 자신의 부활을 믿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루신 우리 구원의 결과가 바로 우리가 부활해서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구원을 믿지 못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런 사람은 구원받은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기독교인의 여부, 즉 구원받은 사람의 여부를 구별하는 기준이 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비단 오늘 현대인에게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제자들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실 때마다 늘 다시 살아나실 것을 함께 말씀하셨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비로소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그렇게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처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임을 당한 후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고 했어요(마 16:21). 그런데 이상하게도 베드로의 반응은 주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반응만 있을 뿐 다시 살아나심에 대한 반응은 없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임에 반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했던 베드로의 말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지요.

그 후에도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마 17:22-23)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심히 근심했습니다. 만일 제자들이 다시 살아나신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었더라면 그렇게 심히 근심하지 않았겠지요. 예수님은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말씀하시는데, 이상하게도 듣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라는 한 가지 사실만 귀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듣는 사람들에게는 그 말이 잘 들리지 않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충격적이고 슬픈 일이라서 다른 말은 아예 귀에 들어오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자신들의 경험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부활에 관한 가르침은 수용이 되지 않고 다 빠져나가버리는 것인지 모릅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수용하고 배운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세계관과 경험이라는 선입관에 의해 어떤 것만을 취사선택해서 듣고 수용한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실수지요.

제가 지난 주간에 우리 캠프갈 장소를 찾아갔다가 한참 헤맸습니다. 나중에 물어서 겨우 찾아갔더니 바로 타운 입구에 아주 찾기 쉬운 곳이었습니다. 관리인이 하는 말이 “내가 전화로 언덕 내려와서 300미터만 오면 된다고 했잖아?”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저는 그곳에 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슨 언덕이 어디 있고 어떻게 생겼는지 아무런 사전지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 역시 자신들의 사전지식과 경험세계에 없는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그냥 흘려버렸고,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그만 놓쳐버린 것이지요.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던 사람들은 우습게도 그를 잡아 죽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빌라도에게 가서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마 27:63-64).

그러나 정작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조차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말씀을 귀담아 듣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가 있었겠어요?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이 그렇게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기다렸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을 귀담아 들었고, 그래서 제삼일에 부활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었더라면, 예수님이 부활하실 시간에 맞추어 무덤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열었겠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라면 무엇이든 믿었을 제자들마저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못했고 그래서 믿지 못했다면, 오늘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현대인들이 많다는 것, 심지어는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문자 그대로 믿지 못하고 새로운 의미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이 잘하는 일은 아니지요. 믿고 믿지 못하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기다리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예수님이 부활하신 시간 가까이 그 무덤을 찾아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입니다. 물론 이 마리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기 위해서 찾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들 역시 예수님이 말씀하신 부활을 귀담아 듣지 못했고 그래서 주님이 다시 살아나시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마침 예수님의 부활 시간에 거의 맞춰 무덤을 찾아온 것은 단지 우연일 뿐이었습니다. 이 여인들이 무덤에 온 것은 살아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장사는 매우 급하게 진행되는 바람에 시체가 썩는 것을 막기 위한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금요일 오후였는데, 곧바로 해가 지면 안식일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 전에 급하게 서둘러 장사를 지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일 동안에는 무덤에 갈 수가 없었고, 안식일이 끝나는 것은 토요일 저녁 해가 질 때입니다. 그러나 밤에는 캄캄해서 무덤에 찾아가는 일이 쉽지 않았겠지요. 그러니까 이 여인들은 안식일이 끝나고 밤이 지난 후, 즉 일요일 새벽에 동이 틈과 동시에,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시각에 향품을 들고 무덤으로 찾아왔던 것입니다. 이 여인들의 행위는 예수님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고 이제는 그 죽음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보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행위였지요.

그래도 이 여인들은 돌아가신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정성이 지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비록 예수님이 살아나실 것을 믿지 못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은 이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부활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는 기회를 얻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우연이라기보다 그 믿음과 사랑에 대한 보상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손님 대접하기를 강조하면서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게 천사를 영접한 사람도 있다고 했습니다(히 13:2). 만일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기다린 사람이 있었다면,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만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기다리지 못했다면, 동이 트기 무섭게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갈 만큼 주님을 사랑했던 이 여인들에게 그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어요?

이 여인들이 무덤에 와서 만난 것은 예수님의 시체가 아니라 천사였습니다. 그리고 천사의 안내를 받으며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천사로부터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접한 이들은 당장 그 사실을 믿었습니다. 비록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는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귀담아 듣지 못하고 믿지 못했지만, 이처럼 확실한 증거 앞에서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제야 그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시겠다고 하시던 말씀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다시 살아나겠다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당시에는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기억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기가 막힌 일을 겪고 상심해 있다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서야 제자들 역시 전에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확인되면서 부활을 확실히 믿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 증거를 확인한다고 해서 누구나 주님의 부활을 믿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유일하게 예수님의 다시 살아나시겠다는 말씀에 신경을 썼던 대제사장들, 장로들도 주님이 정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보고받았습니다. 그것도 무덤을 지키던 현장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무덤 앞 돌을 굴려내는 것을 직접 목격한 군인들로부터 보고를 받았습니다. 이보다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어요? 그렇다고 그 장로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나요? 물론 이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믿지는 않았습니다. 즉 자신들의 개인적 신앙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사실을 왜곡하고 덮어버리려고 술수를 쓰고 있을 뿐입니다.

이 군인들은 또 어떻습니까? 이들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운이 좋은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밤새 무덤을 지키다 부활의 현장을 현재진행형으로 목격하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나 그들이 주님의 부활을 믿었습니까? 크고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고 죽어서 무덤 속에 장사된 사람이 살아났다는 사실만은 이들이 확실히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비록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들과는 상관이 없는 일일 뿐인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나지도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증거가 없어서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장에서 직접 그 사실을 목격한 사람들도 믿지 못했다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군인들을 매수해서 거짓 소문을 내게 했던 대제사장들은 믿기를 거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적극적인 의지로 믿기를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과학적이지 않고 증거가 없어서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믿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을 스스로 거절하는 행위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들과 제자들처럼 처음에는 비록 합리적이지 않게 생각되어 믿지 못하다가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보여주실 때 감격과 기쁨으로 그 부활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더 배우고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될 때, 우리 역시 마음 문이 열리고 이 놀라운 주님의 부활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믿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부활은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런 상관도 없고 믿을 수도 없는 일인가요? 아니면 여러분 자신의 부활을 담보하는 실존적 사건인가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여러분의 구원을 완성하셨고 또한 여러분 자신의 부활을 가능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부활이 가져다주는 놀라운 축복과 은혜가 충만히 임하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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