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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온유한 사람의 행복 (마 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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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 관해 말씀하시던 예수님은 점점 더 이상한 말씀만 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실 때 '참 별 이상한 행복도 다 있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사람들이,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에 어안이 벙벙해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말씀에는 아예 배꼽을 쥐고 웃어댈지 모릅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많은 고난을 당하지 않을 것임이요' 또는 '인기가 많을 것임이요'라고 했다면 좀더 납득이 될지 몰라요. 그러나 온유하다는 것과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땅을 많이 가진 사람을 보세요. 온유한 대가로 땅을 차지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던가요?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며 가는 곳마다 부동산을 사들였던 김우중씨가 온유한 사람입니까? 그 책이 나오자마자 어떤 분은 이렇게 비아냥거리며 그를 비판했습니다. '세계는 넓고 먹을 땅은 많더라.' 건국이래 최대의 사기행각을 벌인 것으로 드러난 김우중씨는 지금 '세계는 넓고 숨을 곳은 많다'며 해외를 유랑하고 있습니다.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독해야 돼요. 부동산 투기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 말아먹으려고 단단히 마음먹은 사람들이 하는 짓이에요. 조상에게 물려받은 한 뙈기 땅을 밑천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그 땅을 빼앗으려면 마음이 온유해서는 할 수 없지요. 열심히 일해서 얻은 소득으로 정당하게 자기에게 필요한 땅을 사는 것이야 아름다운 일이지만, 병적인 경제구조나 악한 사회적 현상을 이용해서 진실하지 못하게 땅을 차지하는 것은 온유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국가 간에 영토분쟁이 계속되고 있는 곳이 몇몇 있기는 하지만, 국제적 질서가 거의 확립되어 있는 현재의 상태에서 영토확장이라는 개념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를 살펴보면 국제관계는 정복의 역사였습니다. 정복이라는 것은 땅을 빼앗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을 빼앗고 승자가 되는 것은 힘이 있는 자입니다. 징기스칸이나 알렉산더는 힘으로 땅을 차지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땅을 차지하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이 아니라 힘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우리 인간 세상에서 통용되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말도 안되고 이해도 되지 않는 말씀이지만, 우선 무슨 뜻인지 한번 알아봐야 하지 않겠어요? 온유하다는 것은 인간의 성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온순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말합니다. 매우 좋은 성품이지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이 온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온유의 반대는 거칠고 난폭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 행복의 조건으로 온유를 말씀하시는 걸까요? 우리는 지금까지 심령이 가난한 자의 행복과 애통하는 자의 행복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심령이 가난한 자는 애통하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의 행복과 애통하는 자의 행복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행복론을 팔복이라고 해서 여덟 가지 행복한 사람을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이 여덟 가지 행복이 따로 따로 개별적인 행복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천국을 소유하는 복만 받고, 심령이 가난하지는 못하지만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천국을 소유하지는 못할망정 하나님을 보게 되는 복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겠어요? 애통하는 것은 내 취향에 맞지 않으니까 그것은 포기하고, 그 대신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복이나 받아야겠다는 것도 말이 됩니까? 결국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행복은 하나인 것입니다. 그 한 행복의 여덟 가지 측면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대할 때는 자신의 영적 파산, 무가치함을 깨닫고 전능자 앞에서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가난한 심령입니다. 이 행복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대할 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그야말로 추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발견했을 때 슬피 울지 않을 수 없지요? 그래서 행복한 사람의 자신과의 관계는 애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행복한 사람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무엇이 될까요? 하나님 앞에서 심령이 가난해지고 자기 자신을 보면서 슬피 울었던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거칠고 가혹하게 대할 수 있겠어요? 다른 사람이 조금 잘못했다고 쉽게 분노를 터뜨릴 수 있겠어요? 다른 사람이 나보다 좀 약하다고 그 위에 군림하고 윽박지를 수 있나요?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온유하지 못합니다. 폭력이란 약자에 대한 강자의 불만이 구체화된 것입니다. 스스로 강하다고 믿는 사람,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사표시로 폭력을 사용하게 됩니다. 거칠다는 말이지요. 말 한 마디를 해도, '야 임마, 까불지 마!' 거칠고 위협적이지요. 폭력배들의 몸에 밴 습관을 보세요. 그것 자체가 폭력의 과시입니다.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얼굴은 일부러 험상궂은 표정을 짓습니다. 이러한 거친 모습은 두려울 것이 없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됩니다. 그렇다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심령이 가난해지고 자신의 추하고 악한 모습에 심하게 애통하게 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이렇게 거칠고 폭력적으로 대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연히 온유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는 심령이 가난해진 결과이며, 애통한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온유한 자의 행복 역시 첫 번째 행복, 두 번째 행복과 하나인 것이지요.

주님은 온유해야 행복하다고 하시는데, 과연 우리는 얼마나 온유한가요? 우리의 언어생활은 얼마나 온유함을 내포하고 있습니까? 평소의 우리 얼굴에는 온유함이 몇 퍼센트나 반영되고 있나요? 때로는 우리가 온유하고 싶어도 세상이 우리를 온유하게 내버려두지 않기도 합니다. 온유해 가지고는 살기 힘든 세상입니다. 나가 싸우고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고, 그렇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거칠어야 되고 자기 힘으로 다른 사람들을 눌러야 합니다. 그래야 인정을 받고 존경도 받을 수 있고, 또 평화도 이룰 수 있습니다. 새로 미국 대통령이 된 부시가 힘에 근거한 세계평화를 부르짖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힘이 있어야 싸우는 놈들 붙잡아다가 '싸우지 마!' 하고 엄포를 놓아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말로 아무리 화해를 시키려고 해도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과거에 카터 대통령은 인권외교를 내걸고 국제사회의 양심과 도덕에 호소했다가 가장 무능한 대통령이 되고 말았습니다. 국제질서 속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몇 사람 모인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저 사람은 성질이 고약하니까 조심해야 돼. 비위를 거슬리게 해서는 안 돼. 반면에 이 사람은 성품이 온순하고 부드러우니까 좀 함부로 해도 괜찮아. 좀 섭섭해도 참고 그냥 넘어갈 거야. 우리가 보통 그렇게 되지 않던가요? 온유한 사람은 손해보는 세상이고 무시당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온유는 세상 살아가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되는 덕목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러나 주님 말씀은 온유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한다고 하세요. 땅을 차지하는 것은 가장 강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온유한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온유한 사람을 꼽으라면 모세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세를 생각하면 온유한 사람이라는 인상은 별로 없지요? 오히려 바로와 대결했던 강력한 지도자, 광야와 같은 거친 이미지가 먼저 떠오릅니다. 그런데 모세 자신이 스스로를 '온유함이 지면에서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는 말이에요. 모세가 자신에 대해서 언제 이런 묘사를 했는가 하면 누님인 미리암과 형님인 아론이 그의 지도자로서의 권위에 도전할 때였습니다. 모세만 백성 위에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할 이유가 무엇이냐? 하나님이 모세한테만 말씀하시느냐? 우리도 만나주시고 말씀하시지 않느냐? 그렇다면 우리도 모세와 동등한 지위와 권위를 가져야 할 것 아니냐? 그러면서 모세를 공격하는데, 벌써 40년이나 지난 모세의 결혼을 문제삼아 인신공격을 합니다. 저런 구스 여인을 아내로 데리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받은 지도자로서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정말 비겁한 인신공격입니다. 그의 지도자로서의 자격에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모세에 대한 하나님의 신임과 모세의 지도력은 여러 차례에 걸쳐 검증되고 확인되었습니다. 모세의 지도력에 반기를 들었다가 몸이 성했던 사람이 없었어요. 더군다나 허물이 있어도 서로 덮어주고 감싸주어야 할 가장 가까운 피붙이들이 어떻게 모세를 흔들어 떨어뜨리려고 할 수가 있습니까? 모세가 얼마나 허탈했을까요? 얼마나 속이 상하고 분노했을까요? 모세가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그들을 잠잠하게 하고 벌을 내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분명히 모세에게는 그런 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어떻게 했는가 보세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분노를 터뜨리지도 않았고, 원망하지도 않았어요. 모세는 자신의 그런 모습을 가리켜 지면에서 모든 사람보다 승한 온유함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유함은 연약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힘이 없어서 굽신거리는 것을 보고 우리는 온유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온유함은 힘이 컨트롤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힘이 있다고 있는 대로 쓰는 것은 온유가 아니지요. 온유는 분노가 다스려지고 있는 현장입니다. 분노가 있는 그대로 폭발하는 사람은 온유함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란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잠언 기자는 말하기를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고 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힘으로 땅을 정복하는 사람보다 더 강한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유한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땅의 개념과 의미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있던 1차적 청자(聽者)인 군중들이 생각할 수 있는 땅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 말씀을 기록한 마태가 염두에 두고 있는 유대인 독자들은 땅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유대적 관점에서 땅은 하나님의 언약의 매개체입니다. 맨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후 이 땅은 하나님의 언약에서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에서 땅이 빠지지 않아요. 땅이 없이는 하나님의 언약이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애굽에 내려간 이스라엘 백성은 이 약속의 땅으로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배반한 백성이 징계를 당하여 포로로 끌려가 있는 동안 죄악으로 물든 이 땅은 회복이 되고, 기한이 찬 후에 하나님의 백성은 언약에 근거해서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을 대하는 이스라엘의 태도는 매우 각별한 것이었습니다. 땅은 힘있는 자가 싸워서 빼앗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받는 것입니다. 땅과 관련된 토지제도 역시 매우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레 25:23)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것, 즉 언약에 충실한 것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실 때, 거기 있던 군중들이나 마태가 기록한 복음서를 읽던 독자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겠어요? 오래 전에 선조들에게 언약을 맺어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언약이 나에게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삭에게서 그 언약이 성취된 것처럼, 요셉에게서 그 언약이 성취된 것처럼, 모세를 통해서 그 언약이 성취되고, 여호수아로 말미암아 그 약속이 성취된 것처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이 나의 인격과 삶을 통해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나에게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상을 구원하기로 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 교회를 통해서 성취되고 있을 때, 우리는 땅을 기업으로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 각자의 믿음은 언약의 땅을 기업으로 받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믿음을 가지고 계시나요?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생애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즉 땅을 기업으로 받은 사람들은 온유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온유함으로써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자신과 올바른 관계, 다른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은 땅을 기업으로 받고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며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찌 거칠고 난폭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이 온유하십니다. 하나님의 온유하심처럼 우리가 온유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 주님이 온유하시지 않습니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운다는 것은 우리도 그렇게 온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유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셔서 그 결과로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여러분의 실제 생활 속에서 이 성령의 열매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가정에서, 자녀에게 또는 남편이나 아내에게 얼마나 온유하세요? 여러분의 온유함에 가정의 행복이 달려 있지 않습니까? 직장에서는 온유함으로 행복한 그리스도인임을 증거하고 있나요? 교회 안에서 온유함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고 있는 현장을 가꾸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셔서 온유하게 변화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무심코 내뱉는 말 속에 감추어져 있는 날카로운 비수가 꺾이고, 눈빛 속에서 불타는 분노가 사그라지고, 표정 속에 드러나는 격한 감정이 조절되어서, 어느 때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온순하고 부드러운 사람,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참된 행복 속에 살아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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