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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에 보내는 편지 (마 06: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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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보내는 편지 (마 6:9-15)

매튜 헨리라는 주석가는 이 주기도문을 땅에서 하늘로 보내는 편지라고 했습니다. 수신자는 누구입니까? ‘우리 아버지’가 되겠지요? 주소는 ‘하늘’입니다. 그리고 몇 가지 편지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 다음에 마지막 인사가 있어야겠지요? 그것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송영 부분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아멘’은 봉인입니다. 편지를 써서 보내는 날짜가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오늘날...’ 즉 오늘입니다. 이제 보내기만 하면 되겠네요.

누가복음에 보면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기 마태복음에서는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기도 행태를 지적하신 후에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기도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어쨌든 이 주기도문은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이 짧은 기도가 우리 모든 기도의 모범이 됩니다. 기도의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우리의 기도는 이 주기도문의 틀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기도의 대상이 있어야겠지요? 우리가 기도를 드려야 할 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입니다. 천사나 위대한 성자들은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아니에요. 가톨릭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중요한 기도의 대상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따지고 보면 성모 마리아가 최종적인 기도의 대상이 아닙니다. 마리아에게 기도를 하는 이유는 어머니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도가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어머니가 부탁을 하면 예수님이 거절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주 사용되는 성경의 근거는 예수님이 처음으로 이적을 행하셨던 가나의 혼인잔치 사건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처음에는 내켜하지 않았지만 결국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은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입니다. 우리와 사이가 서먹서먹하거나 거리가 있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우리가 직접 말씀드리기에 거리감이 있어서 자애로우신 성모님께 청탁을 해서 접근해야 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란 말이죠. 물론 아이들이 아버지한테 직접 얘기해서 통하지 않을 때는 엄마에게 말을 해서 아버지에게 압력을 넣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은 말이 안 통하는 분도 아니시고, 안 되는 것을 누구의 청탁에 따라 들어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아버지라고 부르는 매우 친밀한 관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그보다 더 가까울 수가 없는 관계라는 뜻입니다. 이 아버지는 포악하고 무서운 아버지가 아니에요. 바울 사도가 뭐라고 했나요?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우리는 종의 영이 아니라 아들의 영을 받았어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대할 때 종이 주인 대하듯 하지 않고 아들이 아버지를 대하듯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른다고 했는데, 여기서 아바라는 말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던 아람어로 ‘아빠’라는 말이에요. 우리 한국말과 아주 비슷하네요. 그런데 누가 실제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했는지 아세요? 바로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어요. 십자가의 고통을 앞두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그렇게 기도하셨어요.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그런데 바로 우리에게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 것입니다.

누가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릅니까?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는 그런 관계에서 아빠라는 호칭이 나올 수 있나요? 그럴 때는 아버님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러나 아버지 등에 올라타고 깔깔거리면서 서로 장난치는 아이가 아버지를 아버님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거기서 사용되어야 할 호칭이 바로 아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사용하는 호칭은 아버님이 아니라 아빠라는 말이에요.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 아빠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언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빠는 어린 아이들의 언어입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아빠라는 단어 자체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렇게 친밀하고 사랑하는 관계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들의 언어인 아빠라는 호칭으로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처럼 어린 아이와 같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하나님을 부를 때, 우리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고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받기 위한 그런 상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무슨 격식을 차리고 절차를 밟아서 하나님을 알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 청탁을 해서 접근할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렇게 부르기만 하면 돼요. 그렇게 부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다음으로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입니다. 유대인들의 정신세계에서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말이죠. 신적인 권위와 영광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할 때 저 멀리 계신 하나님이라고 공간적 거리를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늘과 연결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세계로 우리가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나아간다는 거예요. 아직 육신에 매여 있는 우리가 그 영적인 세계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우리의 삶을 하늘과 연결시키는 통로가 되는 거예요. 따라서 기도할 때 우리의 삶은 하늘을 반영하는 삶, 하늘의 모습을 증거하는 삶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기도야말로 얼마나 위력적이고 놀라운 것입니까? 또 성도의 삶에서 얼마나 필수적인 것입니까?

자, 이제 구체적으로 기도의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보세요. 첫째로 구해야 할 것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윗사람을 찾아뵙는다면 가장 먼저 인사를 드려야겠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인사를 드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드리는 인사는 어떤 것이 가장 적합한 것일까요? 끼니를 때우는 것이 쉽지 않았던 시절에는 ‘식사하셨습니까?’라는 인사가 적합했습니다. ‘밤새 평안하셨습니까?’ 하는 인사는 밤에 도둑이 든다거나 위험한 일이 종종 발생할 때 적합한 인사일지 모르겠군요.

우리가 하나님께 인사를 드린다면 ‘식사하셨습니까?’ ‘밤새 별고 없으셨습니까?’ 이런 인사는 적합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인사는 하나님께 해당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인사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하는 것보다 더 적합한 것이 어디 있겠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거룩하신 분에게 합당하도록 그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고 존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 모든 피조물들로부터 창조주의 영광과 존귀를 마땅히 인정받으셔야 할 분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그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고 존중한다는 신앙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나 자신은 정작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 다음으로 기도해야 할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나라이’라는 말은 문법상 잘못된 것입니다. 고어에서는 그렇게 사용되었겠지만 현재의 맞춤법에 의하면 ‘나라가’로 되어야겠지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세례요한이 처음 선포한 메시지는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이었습니다(마 3:2). 예수님의 첫 번째 메시지 역시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이었지요(마 4:17).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럼 그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까지 오지 않아서 오늘 우리가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해야 하는 걸까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어떤 정치체제나 공간적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실 때 빌라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라는 의미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공동체가 하나님의 나라라고 이해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거기에서는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주권개념과 외형적인 정치적 조직이나 체제가 일치되었기 때문에 이해가 더 쉽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했을 때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데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이 다스리시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중요한 개념이 추출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권세 앞에 모든 것이 굴복하는 현장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나의 삶이 온전히 하나님께 굴복하고 복종하게 해 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게 해 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회 속에서 불의가 판을 치고 거짓과 죄악이 하나님의 의를 향하여 대항하고 있다면 이 사회는 하나님의 나라와 거리가 먼 것이겠지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 기도입니까?

그 다음에 또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당연히 하나님의 뜻이 시행될 것입니다. 그처럼 이곳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우리는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라면 당연히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이든지 진행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의 뜻을 주장하고 관철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앞에 겸손히 굴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이요 자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내 뜻을 구하는 기도라면 의미도 없고 제대로 기도했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참된 기도, 올바른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또한 내 삶에서 이루어지고 시행되기를 원하는 기도입니다.

어린 자녀에게서 선물을 받아보신 적이 있으세요? 기분이 어떻던가요?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위한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는 어떤 기분이 드실까요?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기도를 할 줄 알게 될 때 우리 믿음의 수준도 한층 높아질 것이고, 또한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채워주시는 은혜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더 중요하고 우선적인 가치는 우리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그분의 의가 선포되고 시행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참된 만족과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모습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 하나님께 영광 돌려 드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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