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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리새인은 세례 받으면 안 되나요? (마 03: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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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은 세례 받으면 안 되나요?

400년 만에 출현한 선지자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은 대단했습니다. 회개하라는 세례 요한의 외침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을 세례 요한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이처럼 세례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11절에서 요한은 말하기를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는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는 의식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세례라고 하면 씻는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그러니까 죄를 씻는다는 상징처럼 받아들여지지요? 그러나 세례는 침례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침례라고 하면 씻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물속에 잠긴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불세례의 개념에서도 불침례라고 하면서 불속에 잠기는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요? 성령 세례라고 할 때 성령으로 죄를 씻는다거나 성령 속에 잠긴다는 개념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세례를 씻는 것이라는 주장과 잠기는 것이라는 주장을 가지고 논쟁하는 것은 사실 별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세례라는 의식이 구약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씻는 의식은 구약에서 많이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으면 큰 일이 나는 줄 알 정도로 씻는 데 큰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씻는 의식은 하나님 앞에서의 정결과 결부되어 시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도 구약에서의 씻는 의식의 개념이 많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어쨌든 세례 요한이 베푼 세례는 죄의 회개의 표시였습니다. 회개하라는 요한의 메시지에 많은 사람들이 나아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예수님도 세례를 주심으로 세례는 기독교의 주요 의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초창기 기독교에서 세례는 기독교로 개종하는 의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는 세례에 대한 언급이 많습니다. 그러한 구절들을 통해서 세례의 본질과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선 새로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은 세례라는 외적인 의식을 거쳐 내적인 변화를 표시했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에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에디오피아에서 온 내시는 빌립으로부터 예수님에 대해 설명을 들은 후에 세례를 받겠다고 자청합니다. 또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초청을 받아 가서 설교할 때 성령이 그 사람들에게 임하시는 것을 보고 즉시 세례를 베풉니다. 이처럼 세례는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외적인 확인 또는 공적 승인의 표시입니다. 즉 세례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에 회원으로 가입하는 필수적이고 유일한 세레모니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 5절에서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라고 말함으로써, 세례를 기독교 공동체의 기초석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하고 신비로운 영역 안으로 들어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진심으로 믿지 않으면서 세례를 받을 수는 없을까요? 또 그렇게 엉터리로 세례를 받아도 하나님의 교회에 포함되는 영광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흔히 군대에서 숫자 채우려고 사역병 모아가지고 세례받게 한다는 얘기 많이 하잖아요? 세례라는 외적인 형식 자체가 우리의 구원을 담보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천주교에서는 그런 경향이 있어요.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믿기 때문에 누군가가 임종하는 순간에는 긴급상황을 감안해서 사제가 아니더라도 세례를 베풀 수 있습니다. 구원은 세례로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것이고, 세례는 그 믿음의 외적 형식입니다. 내용과 형식을 혼동하면 그런 오류에 빠지게 돼요.

그러면 믿으면 됐지 형식에 불과한 세례를 굳이 받아야 하느냐고 고집을 피우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거예요. 맞아요, 중요한 것은 믿음이지요. 그렇지만 그 믿음을 세례라는 그릇에 담아서 내놔야죠. 에디오피아 내시가 한 말을 보세요.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행 8:36). 믿음에 대한 확신이 있으니까 당연히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치 아닌가요? 세례는 믿음의 표시니까요. 그런데 내용이 중요하지 형식이 왜 필요하냐고 굳이 따지는 사람들의 속셈은 사실은 거리낌이 있기 때문이지요. 세례는 받으면 좋고 안 받아도 상관없는 단순한 형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명백하게 주어진 믿음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 28:19)고 하셨잖아요?

그러면 성경은 세례라는 의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 왜 세례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표시로 사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또 중요하겠지요? 무엇보다도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합니다. 거기에는 먼저 죽음이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함께 장사되었다(롬 6:4)고 말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고, 우리의 옛사람이 죽습니다. 그렇게 죽은 후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던 우리는 다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새 생명을 얻게 되고 새사람이 됩니다. 골로새서에서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2).

그러므로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옛사람이 죽고 새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을 상징하는 영광스러운 절차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셔서 ‘너는 내 것이라’고 선언하시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성찬과 더불어 세례를 거룩한 예식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외치는 소리에 많은 사람들이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고 있었는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세례를 받기 위해 왔습니다. 그것을 본 요한이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소리를 지릅니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아주 끔찍한 말이지요? 우리 한국말에는 개새끼라는 욕이 있어요. 영어에는 개새끼라는 욕은 없고 대신 son of bitch라는 험한 욕이 있습니다. 이처럼 언어마다 문화마다 욕의 내용도 다른 것 같은데, 유대인들의 문화에서 독사의 자식이라는 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것은 우리말의 개새끼나 영어의 son of bitch에 해당하는, 어쩌면 더 심한 욕인지도 모릅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뱀은 특별한 상징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이 뱀의 모습으로 하와를 유혹해서 인류를 타락에 빠뜨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뱀은 저주를 받았잖아요. 즉 그들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한 것은 저주받을 사악한 인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왜 요한은 세례 받겠다고 나온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그런 심한 욕을 퍼붓고 있을까요? 그들의 잘못이 너무 커서 회개하고 용서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까? 용서받을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고, 어떤 사람들은 용서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살펴봅시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집단입니다. 새두개인이라는 말은 의로운 자들이라는 뜻인데,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 사독의 이름을 딴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세오경만을 인정합니다. 그러니까 유대 전통의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제사장 전통과 선지자 전통 가운데 선지자 전통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유대 전통에 충실하기보다 헬레니즘에 동화되었습니다. 로마의 지배를 지지하는 대가로 유대의 종교권력을 보장받았습니다. 유대의 최고 종교적 권력기구인 산헤드린 공회는 주로 사두개인들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모세의 율법에 철저하게 매달렸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해석하고 실생활에 적용하는 과정에 있어서 사실은 율법의 정신을 몹시 훼손한 장본인들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바벨론에 끌려가는 징계를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율법을 지켜야 하는데, 실생활에서 율법을 손쉽게 준수할 수 있도록 수많은 규범과 조항을 만들면서 실제로는 율법과 거리가 먼 율법주의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율법의 시행규범들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경멸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을 아주 싫어하셨고 책망하셨었지요. 자기들은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가장 노엽게 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권력과 백성들의 존경을 누리고 있었지만, 위선과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태도로 하나님의 저주를 자초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속성으로 볼 때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세례 요한을 결코 선지자로 인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요한이 세례 주는 곳에 나타난 것도 회개하고 세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슨 조사 같은 것을 하기 위해 나왔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 사람들이 아무한테나 쉽게 머리를 숙일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요한은 이들을 책망합니다.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입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는 말은 “너희가 무슨 근거로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설령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다 할지라도 진정한 뉘우침이 없이 형식적으로 받는 세례라면 그 세례가 그들에게 닥친 진노를 피할 수 있게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회개는 그에 합당한 열매가 동반되어야 진짜 회개입니다. 아무리 회개를 해도 돌아서면 하던 짓을 똑같이 한다면 누가 그 회개를 진짜라고 인정하겠어요? 그러니까 앉은 자리에서 입으로 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닌 것입니다. 잘못했다고 생각되는 것이 회개의 전부가 아니에요. 회개는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눈물 몇 방울로 회개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으로 삶이 변화되어야 회개의 열매가 맺혀질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을 해도 남들 보이기 위해서 하고 기도를 해도 사람들 많이 모이는 곳에서 했던 바리새인들의 행태를 본다면 회개와 세례 역시 그들에게 닥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동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례 받았다고 자동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회개하지 못하는 양심은 우리를 파멸로 이끌어갑니다. 문둥병은 고통이 없습니다. 그래서 손가락을 잘라내도 발가락이 떨어져나가도 아프지 않아요. 괜찮은 것 같아요. 우리가 죄를 범하고 있는데도 우리의 양심이 침묵한다면, 그래서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지도 모르고 회개하지도 않는다면, 결국 도끼에 찍혀 불에 던지우는 나무가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믿어도 그대로 살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지불할 능력이 없는 부도난 수표일 뿐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나타나는 삶으로 우리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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