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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의 소금과 빛 (마 0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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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소금과 빛, 또는 빛과 소금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어떤 종교나 철학적인 가르침에서는 이상적인 삶의 행태가 세상을 떠나서 혼자만이라도 고고하고 깨끗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세를 떠나 깊은 산속에 거한다든지, 권력이나 명예를 거부하고 동굴 속에 은자로 숨어 산다든지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은 악하고 더러운 곳이기 때문에 순결함을 지키기 위해서는 세상과 분리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물론 그렇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악하고 더러운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효과를 기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혼자 잘 믿고 조용히 살다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부대끼고 뒹굴면서 성실하고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그러한 삶으로 세상에 선한 영향을 끼치고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까지 어떤 사람들이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의 말씀은 청중들을 향합니다. 여기서부터는 “너희는”이라는 2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십니다. 지금까지 말한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의 범주에 포함되려면 너희가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소금과 빛이라는 삶의 양식(樣式)을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는 말씀에서 주님은 청중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즉 3인칭의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과 2인칭의 청중들이 이미 동일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우리는 이미 그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의 범주에 속하게 되었고, 천국을 소유한 사람은 마땅히 세상의 소금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소금의 의의는 짠 맛을 내는 것입니다. 소금이 가치 있고 중요한 이유는 짠 맛을 내기 때문입니다. 소금의 용도는 오로지 그 짠 맛을 이용하는 것뿐입니다. 이 짠 맛으로 음식의 간을 맞추기도 하고 또 부패하는 것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소금의 생명은 바로 이 짠 맛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살면서 뭔가 다른 면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금을 물에 집어넣으면 짠물이 되는 것처럼, 이 세상에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가면 그 사회와 집단에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물 속에 모래를 집어넣었을 때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래는 물을 짜게 하거나 성분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모래가 아니라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뭔가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부패하고 썩은 집단에 그리스도인이 들어가면 뭔가 충돌이 일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부패를 그대로 수용하고 거기에 동화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타락과 부도덕이 판치는 곳에 그리스도인이 다가가면 거기서도 무슨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마치 곪은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것처럼 부대끼고 밀어내고 하는 소동이 벌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소독작용, 정화운동이 일어납니다. 고기만 넣어서 끓인다고 설렁탕이 되지 않습니다. 그 상태로는 맛이 없어서 먹을 수가 없지요. 거기다가 소금을 쳐야 비로소 맛있는 설렁탕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던 곳에 복음이 전해지고 믿는 사람이 생겨나면 그곳에서도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짐을 나누어지고 나보다 상대방을 낫게 생각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요청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긴장과 갈등이 있는 곳에 그리스도인이 들어가면 이런 변화들이 일어나야 하지 않겠어요?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어디서나 그 특유의 맛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표시가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 상식으로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맛을 잃은 소금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오늘 우리처럼 바닷물을 정제한 소금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바위에서 채취한 소금을 사용했습니다. 바위 속에 소금이 녹아 들어있는데, 어쩌다가 이것이 비라도 맞는 날이면 소금기는 녹아 빠져버리고 바위성분만 남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맛 잃은 소금입니다. 짠 맛이 있어야 소금으로서의 가치도 있고 역할도 하는 것인데, 짠 맛이 없으니 그냥 모래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소금은 소금으로서 아무 쓸모없는 것이 되고,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맛 잃은 소금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짠 맛이 없는 소금은 모양만 소금이지 사실은 소금이 아닙니다. 이것을 아무리 물에 집어넣어도 맹물 그대로입니다. 이것이 아무리 많아도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모양이 소금이라고 해서 소금이 아니라 짠 맛이 있어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소금의 본질은 모양이 아니라 맛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맛 잃은 소금은 소금으로 대우를 받을 수 없고 그저 모래로 간주되고 모래처럼 대우를 받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모양만 그리스도인이고 맛이 없어서 예수 믿는 표시도 나지 않고 자신이 속해 있는 곳에서 그리스도인의 맛을 내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양만 그리스도인이 아무리 많아봐야 세상을 감동시키거나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이들은 지금까지 말씀하신 천국을 소유한 사람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런 모양만 예수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하지 않고 발에 밟히는 모래처럼 간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발에 밟힌다는 것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맛을 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 보시기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버려져 발에 밟히게 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구원에 포함되지 못하고 버려진다고 보아도 좋겠습니다.

주님은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빛의 존재양식 역시 소금의 존재양식과 동일합니다. 즉 어디 있으나 표시가 난다는 것입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하는 이유는 밤에 불을 켰을 때 쉽게 눈에 띄기 때문입니다. 또 빛의 존재가치와 의미는 그 빛을 비추는 데 있습니다. 등불을 켜서 커다란 바구니 같은 것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불을 켜는 것은 어두움을 밝히려고 하는 것인데, 바구니로 덮어놓을 바에야 뭐 하러 불을 켜겠어요?

그렇게 불을 켜 놓으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춰지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나타나면 바로 표시가 나야 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을 억지로 감추면서 마치 안 믿는 것처럼 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나 나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 믿는 표시가 전혀 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것과 똑같이 행하고 믿는 사람에게 기대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거나 아니면 빛이 있으되 그것을 스스로 감추고 있는 상태가 되겠군요.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예수 믿는다는 것을 숨기고 비밀리에 믿음을 지켜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극심한 곳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주님은 지금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맛을 잃은 소금이라면 버려져 발에 밟힐 것이고, 빛을 스스로 감추는 행위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용납되지도 않는 일이지요. 빛의 존재 목적 자체가 널리 비취기 위한 것인데, 그 존재 목적에 위반되게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 목적을 상실한 것이고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한 달란트 받은 종이 그것을 땅 속에 감추었던 것과 같은 행위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비취기를 거부하는 빛, 이것은 논리적으로나 실존적으로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소금과 빛은 어디서나 표시가 난다는 것 외에 그 표시가 좋은 쪽으로 영향을 끼친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늘 표시가 나는 것이 소금과 빛뿐이겠습니까? 독한 가스도 노출되자마자 강력한 표시가 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결과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거나 목숨을 앗아가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소금과 빛은 맛을 내고 썩는 것을 막고 또 어두움을 물리치는 선하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표시를 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빛을 다른 사람들 앞에 비췬다는 것과 우리의 착한 행실을 동일시하십니다. 즉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사람들 앞에 우리의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의 눈에 어떤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습니까? 이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 전체의 문제이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걸린 문제입니다. 상당히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와 기독교인에 대한 이미지와 평판이 썩 좋지는 못합니다. 교회 안에 부도덕한 일이 발생하고 교회가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게 되면서 교회는 생명을 잃어버리고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빛을 사람 앞에 비취는 삶, 즉 착한 행실을 나타내는 삶을 살도록 요청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다 간 사람들이 많아요. 캘커타의 빈민굴에서 평생을 가난한 사람들의 어머니로 살다 간 마더 테레사 같은 분도 있고, 한국의 슈바이처라는 별명을 얻은 장기려 박사 같은 분도 있습니다. 정말 밤하늘의 별처럼 살다 간 분들 아닙니까? 착한 행실을 나타내라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역시 그러한 삶을 살도록 요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의 그러한 착한 행실로 우리가 영광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도 칭찬을 받고 경우에 따라서는 표창장을 받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빛 되는 삶을 살 때 궁극적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분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결국 교회와 하나님에 대한 칭찬과 영광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향한 책임과 기대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웃과 세상에게 정말 필요하고 유익한 사람들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의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을 사는 사람, 또한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오늘 하루, 이 한 주간도 세상의 빛으로, 세상의 소금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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