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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요 01: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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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요한복음 1:14-18)
 
우리들이 사랑하고 존경하고 믿고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라 성자나 훌륭한 사람, 또는 종교의 창시자라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죄인이 죄인을 구원하겠습니까? 어떻게 물에 빠진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선행, 도덕, 철학, 종교심만으로 인간은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의 실체

그러면 성경에 쓰여진 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거짓말 같지만 확실히 구원받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천국 간다는 사실이 믿어집니까? 이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하나님이라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도, 죽었다 살아나는 것도 문제없습니다. 2천년 전에 태어났다는 분이 현재 여기 사신다 한들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여러분,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일 수가 있습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 대로 지음받았다’는 말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이다’라는 말은 대충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깊이 묵상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구원의 능력, 구원의 실체가 나타납니다.
구원과 믿음에 있어서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하나님이신가?’
성경은 ‘그분이 하나님이다’라고 단언합니다. 1장 14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은 다른 해석을 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선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말씀은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날마다 가슴에 새기고, 묵상하고, 찬양하고, 뛰고, 기뻐해야 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성경은 하나님을 비인격적인 분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돌멩이, 지푸라기, 해, 달처럼 하나님을 어떤 물질적인 것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막연한 종교적인 대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묘사할 때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언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 인간이 해석할 수 있는 언어의 극치로 한 단어를 선택했는데, ‘그 분이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어떤 종교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표현입니다. 우상적인 개념이 전혀 없는, 인격적이고 영원한 표현입니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자기가 만든 물질 속으로 하나님이 들어오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위대하고 영원하고 무한하신 그분의 위상을 포기하고 자기가 만든 인간 속에, 자기가 만든 물건과 같은 형태로 인간이 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육신으로 오신 ‘말씀’

예수님이 하나님이란 말은 매우 충격적인 말입니다. 우리와 똑같이 ‘육신’이라는 옷을 입고 태어난 한 인간, 2천년 전에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 33년 살았던 한 청년이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말하지만 이 말이 얼마나 충격적이고 기막힌 말인지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일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 저를 보십시오. 여러분이 아무리 제 허물을 다 덮을 것 같은 사랑의 눈으로 쳐다보아도 제 안에는 죄가 있고, 미움과 분노가 있고, 배신이 있고, 저주와 죽음의 그림자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아서 죄를 덜 짓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도덕적인 인간으로 변한다 한들 어찌 인간이 신이 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을 이해하는 열쇠는 하나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으면 성경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다 풀립니다. 그것을 믿지 않으면 의심이 생기고 갈등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성경을 보기 시작하면 신약에 나오는 모든 기적, 구약에 나오는 모든 기적, 이해되지 않던 말씀이 모두 다 해석됩니다. 예수는 본래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부활과 승천도, 그 분이 마지막 날 역사의 주인으로 다시 오시는 재림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신데. 역사를 주관하고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분이요,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이신데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뛰어 넘는 것이 어려우시겠습니까?
예수를 사생아라고 하는 인간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자신이 죄와 타락의 경험밖에 없기 때문에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예수님을 보기 때문입니다. 흠과 티가 없고 죄가 없는 완전한 인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 속에 이런 새로운 상상력이 생기길 바랍니다. 그런 가능성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가 하나님이셨다면 그는 일 점 일 획의 틀림도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실수가 없으십니다.

세가지 증거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 속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는데 거기에 증거가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대개 많은 사람들이 절대자이신 하나님은 우리와 떨어져 멀리 계신 분으로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같이 천하고 더럽고 죄 많은 인간의 삶 안에 들어 오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십니까?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죄인 가운데 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장 14절 말씀에서 ‘육신’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지금 만지고 있는 ‘육신’과 같은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면 ‘물질’입니다. 하나님이 물질 안에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 시간 안에,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 공간 안에, 물질을 만드신 분이 물질 안에, 육을 만드신 분이 육 안에, 영이신 하나님이 물질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겁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요, 핵심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의 본질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몸을 입고 자기를 포기하신 것이 구원의 본질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자기 포기입니다. 기독교가 세상 속의 영웅으로, 세상의 권력으로 등장하면 이미 기독교 자체의 모습은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말씀을 성경적으로 보면 구약에서부터 찾을 수 있는 데 이것이 성막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막 안에 법궤가 있습니다. 성막에서 제사 드리는 여러가지 법이 있습니다.
성막 안에 들어간 사람은 짐승을 죽여서, 피를 뿌려서, 죄를 씻어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통해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제사장은 염소나 송아지를 죽여서 그 피를 가지고 성막에 들어가서 그곳에 임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요, 하나님께 용서받는 장소요, 회복되는 장소요, 구원 받는 장소요,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얻는 장소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막을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막을 통하지 않고, 예수님이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성막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시고 당신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말씀 안에는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고, 짐승의 피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친히 죽으심으로 성막의 휘장을 가르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독생자의 영광

14절에서 알 수 있는 두 번째 증거는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이요’에 나타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영광의 광채가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영광’이라는 말은 ‘빛’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빛이 아니라 하나님의 빛을 예수의 얼굴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 마다 그분의 얼굴에서 나타나는 영광의 빛을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얼굴의 영광의 빛은 치유의 광선이요, 구원의 광선입니다. 예수님께 ‘영광의 빛’이 없다면, 그분은 보통 인간일 뿐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영광의 빛을 그 얼굴에 가지셨다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예수의 얼굴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는 것입니다.
‘빛’은 그림자도 어두움도 없습니다. 죄가 없습니다. 빛은 빛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는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는 어두움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는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습니다. 인간의 얼굴에는 우울함도 있고 여러 가지 어두운 그림자도 있고 어떤 때에는 웃고 있어도 고독한 모습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얼굴은 아주 진실한 것 같지만 때로는 뭔가를 감추며 거짓을 말할 때도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두 세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얼굴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빛이요, 영광입니다. 그 영광은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분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독생자의 영광’이라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중에서 성자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하나님은 높고 예수님은 그 다음이다’ 이렇게 여호와의 증인식으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아들과 아버지와 성령은 하나이십니다. 아들의 영광이 있느냐, 아버지의 영광이 있느냐 그 차이일 뿐입니다. 본질에 있어서는 다 똑같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들의 영광’이라는 말의 원어를 좀 더 다른 각도에서 보면 ‘독특한 영광’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라고 하는 것은 독특한 위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는 것은 다른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하고 특이한 영광이 예수님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완벽한 미인의 얼굴을 보면 그에게 빠져들어갑니다. 그렇지만 천사 같이 예쁜 얼굴의 미인도 마음 속에는 흉악한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얼굴이요, 죄가 없는 얼굴입니다. 그분의 얼굴은 영광의 얼굴이며, 독생자의 얼굴이요, 독특한 얼굴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누구든지 그 얼굴을 보면 감격이 있습니다. 예수에 대한 감격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의 독생자의 영광의 광채 안에 여러분이 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예수 믿는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도를 받고 예수 믿어도 삶이 공허한 것은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믿었다가 한달 후에는 못믿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믿음을 갖지 못하고 의심하며 방황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의 영광을 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실체를 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분과 살아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의 영광의 얼굴을, 독생자의 영광을 경험할 수 있는분이십니다.

무제한의 사랑

세 번째,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의 영광가운데에는 두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생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 독생자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 영광에 우리는 놀라고 깊이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영광 속에는 두 가지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은혜와 진리’입니다. ‘은혜’는 쉬운 말로 사랑입니다. 영원한 사랑, 조건없는 사랑, 무제한적인 사랑, 주어지는 사랑, 항거할 수 없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이런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이 무조건적으로 우리에게 쏟아지는 것입니다.
저는 며칠전 텔레비전에서 통영 근방의 납도라는 곳에 사는 모녀의 얘기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감동을 했습니다. 혼자 힘으로는 살아 갈 수 없는 쉰 여섯살된 정신지체 1급 장애자인 딸과 단 둘이 사는 일흔 다섯 노모의 이야기였습니다.
늙은 어머니는 도시에서 살면 딸을 잃어버리게 될까봐 섬으로 이주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전기조차도 없는 곳에서 딸을 위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일흔 다섯의 그 할머니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건강한지 모릅니다. 백치나 마찬가지인 딸은 어머니가 없으면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딸에게 밥 세끼를 따듯하게 해 먹이고, 불에 델까, 물가에 갈까 애지 중지 합니다. 아들 다섯은 다 할머니 곁을 떠났지만, 딸 하나를 위해서 인생을 던져서 외딴 섬에서 고독하게 단둘이 살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목사도 없는 교회가 있었고, 할머니는 항상 거기서 기도를 드립니다. ‘내가 죽으면 이 딸을 누가 돌보나?’ 마지막까지 딸을 위한 기도를 합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살만한 가치가 없는 나 같은 죄인을 낮이나 밤이나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영광에는 이렇게 막을 수도, 조건도 없이, 절대적인, 희생적인, 일방적인 사랑을 쏟아주는 은혜가 있습니다.
또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는 ‘진리’가 있습니다. ‘진리’는 ‘사실’이라는 말입니다. 거짓이 없고 과장이 없고 속임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의 저울은 다 속임수가 조금씩 있습니다. 인간의 학문과 지식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얼굴은 진리요, 진실입니다. 얼굴에 은혜와 진리가 영광가운데 있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십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니라 하니라

세례요한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속의 은혜와 진리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곁을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보며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글을 쓴 사도 요한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에게서 영광을 보았다. 그 영광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했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발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수 십년 동안 교회에 다니면서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누려보지도 경험하지도 못한다면 세월 낭비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우리는 예수님을 발견하는 순간에 하나님을 발견하는 기막힌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17절, 18절을 보십시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이런 분이기에 여러분이 구원 받았다고 말할 수 있고, 영생을 얻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분 때문에 희망을 가질 수 있고, 이 분 때문에 위로와 격려를 받는 것이고 기적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런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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