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님의 제자들 (마 10:1-4)

첨부 1



예수님의 제자들(마 10:1-4)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자신과 세상 변화시킨 제자들
믿음·사랑의 지경을 넓혀 사람과 세상 섬기는 제자 돼야
영광스런 순교자로 작은 예수님처럼 살았던 믿음의 선배들처럼 주님의 마음을 덧입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로 멋지고 아름답게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위대한 사람 옆에는 언제나 훌륭한 동역자가 있습니다. 모세 곁에는 아론이 있었고 다윗은 요나단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꿈을 품어도 마음을 알아주는 진정한 동역자를 둘 수 없다면 그 비전을 온전히 이룰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영원하신 기업을 함께 이뤄나갈 동역자를 찾으십니다. 모든 것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갈 동역자를 선정하십니다.

부족한 사람을 불러 제자로 세워
주님은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열두 명을 뽑아 사도로 세우십니다. 주님께서 선택하신 사도들의 이름을 한번 불러보겠습니다.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한 사람씩 그 면모를 살피면, 우리가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보통 사람들입니다. 어떤 분이 아주 재미있는 조사를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열두 명의 이력서를 경영 컨설팅 전문 회사에 의뢰해 자격 판정을 받은 것입니다.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사렛 목공소 아들 예수 귀하! 당신이 의뢰한 열두 명의 이력서를 검토하고 심리 테스트와 직업 적성검사 자료를 모아 컴퓨터에 넣어 결과를 뽑았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귀하가 계획하는 새 단체의 간부 사원으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전반적으로 학력이 낮고 단체 생활을 할 능력이 없으며 협조 정신이 약해 경영 관리자로서 부적합합니다.
시몬 베드로는 정신적 안정성이 결여돼 있고 성격이 과격해 지나친 부분이 많습니다. 안드레는 한마디로 무능력합니다. 다른 사람을 지도할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회사의 이익을 제쳐놓고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기에 급급한 사람들입니다. 도마는 매사에 부정적이고 많이 질문하지만 추진력을 갖고 일 할 사람은 아닙니다. 마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위인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두 사람은 사회 혁명을 노리는 과격분자들입니다. 불온 사상에 감염돼 귀하가 이룰 온건한 기업에는 합당치 못합니다. 귀하가 추천한 열두 명 중 긍정적인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능력 있고 사회에 대한 지식도 풍부합니다. 경영 감각이 있고 상류층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는 예의와 기품도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 경영상담소는 유다 한 명만 추천하고 나머지는 다시 찾을 것을 권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부족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잘 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족한 사람들을 뽑으신 영적 원리를 깨달을 때, 우리는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기준에 맞는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신 동역자들은 가난하고 학력도 낮으며 사회적인 지위도 형편없었습니다. 어부, 세리, 열혈당원 등으로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비범하고 뛰어난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배격하신 것이 아닙니다. 보잘 것 없고 미련한 사람들을 선택해 훈련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음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스스로 ‘나는 성도는 될 수 있어도 집사는 못돼’하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음을 주님께서 증명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경험과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람 안에 잠재된 가능성으로 판단합니다. 과거로 판단하지 않고 미래를 통해 판단하십니다.
대개 사람들은 ‘겸손이라는 우상’ 안에 자신을 감추고 숨기를 좋아합니다. 특히 종교적 성향이 짙은 사람일수록 그렇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겸손은 숨는 게 아니라 앞장서서 직면하는 것입니다. 판단하는 자리가 아니라 판단 받는 자리에 있습니다. 지시하는 자리가 아니라 지시 받는 자리에 있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보냄을 받기 위해 훈련받은 제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보는 것이 달라집니다. 베드로는 어부였습니다. 그는 어부로서 자신의 삶을 보았습니다. 바다를 보았고 고기를 보았고 그물을 보았습니다. 어부 이상의 생각을 품지 못했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주님께서 제자로 부르십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제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하십니다. 보는 것은 생각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보는 것은 생각하는 것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대로 보는 게 아니라 보려고 하는 대로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전에 열두 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냅니다. 열 명의 정탐꾼은 본대로 “그들은 거인이고 우리는 메뚜기입니다”라고 보고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그들의 신은 그들을 떠났고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라고 보고합니다. 무엇을 보느냐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자신들이 본 것으로 인해 죽음을 넘어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위대한 삶을 살게 됐습니다.
사람은 보는 것만큼 일합니다. 곧 보는 것이 그 사람의 크기입니다. 베드로가 어부로서 자신을 볼 때 삶의 의미와 소망이 없었습니다. 익숙한 어부 생활은 베드로를 편하게 만들었지만, 한편으로 권태롭게 했고 무의미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베드로를 주님께서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달리 정의할 수 있습니다. ‘보냄을 받기 위해 훈련받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주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3년 동안 훈련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신을 보도록 훈련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밤이 맞도록 수고했으나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해변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의 배 사용을 요청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배를 내어 드리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말씀을 마치고 주님은 “베드로야,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려라”고 하십니다.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베드로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으로 깊은 곳에는 물고기가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합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의 말씀을 의지해 내가 그물을 내립니다”고 대답합니다. 곧 그는 엄청난 양의 물고기를 건져 올린 후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하고 엎드렸습니다. 베드로는 자연만물을 주관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죄인된 자신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시각을 바꿔 주셨습니다. “두려워 말라. 이 후로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주님은 한낱 어부에 불과했던 베드로를 만나 자아를 바꾸시며 미래를 보게 하셨습니다.

믿음·사랑의 눈으로 보는 훈련
주님은 ‘오병이어 사건’에 이어 ‘바다 위를 걸어오신 사건’을 통해 믿음을 훈련시키십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어도 이 산이 들리어 바다 위로 옮길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보이는 대로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베드로는 믿음의 눈으로 물 위를 걷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주위를 돌러본 순간 갑자기 겁을 먹고 물에 빠집니다. 베드로는 때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때로는 연약한 믿음으로 인해 고통을 겪으면서도 끊임없이 주님의 가르침으로 훈련받습니다. 주님은 평범한 베드로를 부르셔서 사도로서 적합한 사람이 되도록 ‘보는 훈련’을 시키십니다.
베드로가 결정적으로 ‘믿음의 눈’을 갖게 된 것은 쓰라린 실패를 통해서입니다. 주님께서 잡히시는 날 밤에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고 떠나가리라.” 이때 베드로는 큰 소리를 쳤습니다. “다 주를 버릴 지라도 나는 어느 때든지 주님 곁에 있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야,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하며 말을 맺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말을 듣고 더 주님을 따를 것을 결심합니다.
그러나 그는 대제사장 집 뜰에서 계집종의 물음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나중에는 저주하고 욕합니다. 그때 닭이 울자, 베드로는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을 포기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의 눈으로 사람을 볼 것을 포기합니다. 그런 후 “동료들과 함께 디베랴 바다로 돌아가 물고기나 잡겠다”고 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신을 버리고 떠난 베드로를 다시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묻습니다. 반복되는 세 번의 질문을 통해 베드로는 주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닫고 주님께서 주시기 원했던 믿음의 눈, 사랑의 눈을 뜨게 됩니다.
이제 무엇을 할 수 있거나 없는 것을 기준으로 자신을 대하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의 눈’으로 영혼을 바라보게 봅니다. 사랑은 평범한 것을 비범한 것으로 바꾸는 능력입니다. 영혼은 가르침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의해 감화될 때 변화합니다. 말하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헬렌 켈러는 설리반 선생님의 사랑으로 삶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사랑을 깨달을 때 사람은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느 목사가 에이즈로 죽어 가는 여인을 방문해 위로했지만, 여인은 냉담하게 반응했습니다. “나는 버림받은 영혼입니다. 내 인생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행복까지 망친 사람입니다. 나는 지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목사는 환자의 침대 위에 있는 옷장에 매달린 귀여운 아이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저 아이는 누구인가요?” 곧 여자는 표정이 밝아지면서 “제 딸입니다.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요. 그 아이는 제게 남은 유일한 보석입니다.” “만약 저 아이가 얼음물에 빠지면 자매님은 도와주겠습니까?” “그럼요, 저는 이 아이를 위해서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 “아이가 잘못해도 용서해주겠습니까?” “그럼요. 저는 아이가 무슨 일을 하든지 용서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묻습니까?” 목사는 대답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침대 곁에도 당신의 사진이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사랑의 시각’으로 모든 영혼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들이 사랑의 시각으로 보기를 원하십니다.

가치관·성향이 다른 사람들로 소그룹 구성
주님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도저히 함께 생활할 수 없는 사람들이 열두 명 안에 포함돼 있습니다. 마태와 시몬을 보십시오. 당시 사람들은 마태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조국을 팔아먹은 매국노라며 욕하고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가나안 시몬이 있습니다. 시몬은 젤롯당, 열심 당원이었습니다. 열심당 사람들은 신성불가침한 자유 속에서 하나님만이 지배자요, 주님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서 테러도 불사했던 사람들입니다.
아마 시몬이 예수님을 통해 마태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를 살해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열심 당원이 마태와 같은 사람을 살해하는 것은 민족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사회 분위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소그룹’으로 엮어 놓았습니다. 교회가 그런 모습이 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이 함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미워하는 자와 함께 하신 예수님의 뜻을 되새기면서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는 법칙을 배우게 됩니다.
심지어 예수의 제자들 중에는 유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다를 부르실 때 그가 배반할 줄 알았을까요?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유다와 같은 사람을 선택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구원에 차별이 없는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로 세워지는 것에도 차별이 없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제자로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유다뿐 아니라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끊임없이 배반해 왔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때 원수도 품을 수 있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다를 품으신 것에서 중요한 영적 진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다는 것과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신비요, 축복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알았기에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자신을 욕하고 저주하는 사람들도 품고 용서하고 동역자로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들은 내가 복음을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로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기뻐하리라.”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선하거나 악한 것도 친구나 원수도 가난이나 부요도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그 어떤 하나라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우리에게 미칠 수 없습니다. 욥을 간섭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도 개입하셔서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도 제자로 택했습니다. 어둠이 없다면 어찌 빛이 있겠습니까? 믿음이 없다면 어찌 사랑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가 없다면 어찌 부활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비록 원수라 하더라도 동역하여 오직 사랑과 용납과 거룩함과 진리로 교회를 세워나가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보좌할 열두 명의 구성원들은 정말 별 볼 일 없고 형편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미래를 보시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덧입혀 주셨습니다. 사랑의 조각가이신 예수님은 모난 제자들을 하나님의 사람들로 다듬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예리한 칼로 깎고 때로 불 속에 넣어 연단하며 선한 일을 이룰 도구로 빚어 가십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시는 하나님께서 열두 제자를 사랑의 손길로 다듬고 성장시키셨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킨 작은 예수들
제자들이 주님을 만났을 때 인생에서 엄청난 변화와 반전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의 죽음은 그들의 생애가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 삶이었는지를 잘 말합니다. 초대 교회사를 보면, 베드로는 박해를 피해 로마를 빠져나가려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돌아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야고보는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안드레는 그리스 마드레아에서 엑스(X)자형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습니다. 요한은 끓는 가마 속에 빠뜨려졌지만 죽지 않고 밧모섬으로 유배돼 그곳에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빌립은 소아시아에서 교수형을 당했다고도 하고 돌에 맞아 죽었다고도 합니다. 바돌로매는 알마니아에서 피부가 벗겨져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마태는 에티오피아에서 칼로 죽임을 당했고 도마는 인도에서 창에 찔려 죽임을 당했으며, 다대오는 메소포타미아에서 활에 맞아 죽었습니다. 작은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돌과 몽둥이로 맞았으나 살아나는 바람에 톱에 잘려 죽었다고 합니다. 시몬은 페르시아에서 폭도들의 습격으로 죽었습니다. 단지 유다만 예수님을 배신하고 자살했을 뿐입니다.
평범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돼 영광스런 순교자로 죽음도 초월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현재 삶의 울타리 안에서 그럭저럭 살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제자가 돼 그분의 뜻을 품고 하늘나라를 확장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 것인가? 여러분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멋지고 아름다운 삶을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