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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마 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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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2일, 일본은 우리 한국을 강제로 합병하였습니다. 평화롭게 살고있는 우리 나라 우리 백성을 총칼로 점령한 다음, 가장 먼저 한국말을 없애버리고 일본어를 사용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이름을 다 없애고 일본 이름을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전 세계를 향해 '조선 사람들은 일본에 합방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선전을 하였습니다. 이제 한국이라는 나라, 그토록 찬란한 역사와 아름다운 전통을 자랑하던 한국이라는 이름은 이 지구상에서 영영 사라져버리는 듯 했습니다.
당시에 게일 선교사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한국, 그것은 이제 사라졌는가, 먼 옛날 중국인마저도 어르신네의 고장이라고 불렀던 나라, 선비와 책과 붓의 나라, 아름다운 가문(歌文)과 많은 거울의 나라, 시(詩)와 수화(秀畵)의 나라, 효자열부(孝子烈婦)의 나라, 숨은 도인의 나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종교적 환상의 나라, 이제 그 나라는 사라졌는가.'
그러나 그 나라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도 우리 민족은 내일 다시 떠오를 태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민족을 위해 십자가를 걸머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조선의 초대 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국 내 기독교가 정치에 간섭할 마음만 없다면 신교의 자유는 존경되고 전도활동도 보장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유연한 말로 들리지만 사실은 기독교를 탄압할 명분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1909년에 한국교회에 대부흥운동이 일어났고 이 부흥운동이 100만인 구령운동으로 확대되자 총독부는 이것이 정치적인 운동이라는 구실을 잡아서 본격적으로 교회를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첫 번째 사건이 바로 '105인 사건'입니다. 당시에 평양을 비롯해서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는 수많은 교회가 세워졌고 기독교가 부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제는 기독교가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가장 주된 세력으로 판단하여 기독교를 말살할 계획을 세우고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 사건'이라는 것을 조작하였습니다. 1910년 12월 27일 데라우치 총독이 압록강 철교의 낙성식에 참석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가다가 선천역에 잠시 머무는 순간에 암살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의 주모자로 기독교 지도자들을 지목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전국에서 500여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체포되었으며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당시에 고문을 달했던 선우훈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저들은 두 손가락 사이에 쇳대를 끼우고 손끝을 단단히 졸라맨 후 문턱 위에 높이 달아매고 때때로 줄을 잡아 당겼다. 온 몸이 저리고 쏘고 사지가 끊어져 오고 땀은 줄줄 흐르고 숨결은 가빠지고 견딜 수 없어서 몸을 잡아 이리 틀고 저리 틀었다. 가슴에는 불이 붙고 코에서는 불길이 확확 타올라왔다. 독사 같은 형리들이 또 다시 줄을 잡아당기니 손과 팔이 다 떨어지는 것 같고 달리운 몸은 무거우니 쇳대에 잘킨 손가락은 뼈가 드러났고 피는 흘러서 온 몸을 적시었다. 눈보라가 치는 혹한 삭풍에 몸은 얼기 시작하여 동태같이 되었다. 부젓갈을 달궈서 다리를 지졌다. 담뱃불로 얼굴을 지졌다. 혀를 빼고 목구멍에 담배연기를 불어넣었다. 발끝이 땅에 달락말락하게 늦추어 놓고 수백 대의 매를 몰박아친다. 발길로 이리 저리 차 굴린다. 머리털을 잡아 이리저리 줄줄 끌고 다니다가는 머리가 부서져라고 돌 바닥 위에 함부로 부딪쳤다. 최후의 수단으로 코에다 물을 붓는 것이다.' 이렇게 모진 고문을 통해서 있지도 않은 일을 허위로 자백을 받아내었습니다. 그리고는 105인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유죄를 선고하였습니다.
그러나 꺼져도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교회는 날로 성장해 나갔습니다. 주일날만 교회에 모이는 것이 아니라 기도회로, 사경회로 모여 조국을 위한 뜨거운 기도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자 일제는 더욱 기독교를 탄압하여,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 이긴 내용이나 여호수아와 갈렙이 믿음으로 가나안땅에 들어간 이야기, 그리고 기드온의 300명 용사가 미디안 족속의 대군을 싸워 이긴 이야기 등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약한 한국이 강한 일본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비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신사참배를 통해서 교회가 우상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박해 속에서도 한국교회는 오히려 뜨겁게 뭉쳐서 전진해 나갔습니다. 장로교와 감리교, 그리고 그 외의 교회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협력하여 신앙을 지키기에 힘썼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 헐버트 선교사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때가 올 것이다. 기독교가 끼친 문명의 영향이 일제의 탐욕과 억압을 쳐 부셔버릴 때가 오고야 말 것이다. 기독교는 정의, 청결, 친절 공익의 정신, 애국심, 협조, 그리고 교육을 위해서 분연히 투쟁할 것이다.' 과연 이 예언대로 교회는 일어섰습니다. 우리 나라가 독립국이며 우리 민족이 자주민임을 온 세계에 알리는 삼일독립운동의 거사를 이루어 냈습니다.
삼일운동은 가장 먼저 일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른바 '2.8 동경 유학생 독립선언식'입니다. 2월 8일 일본의 동경 YMCA에서 400여명의 유학생들과 교민들이 모여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일본정부와 각국 공관, 그리고 언론기관에 보내서 한국의 독립을 온 세상에 알렸습니다. 이 일은 결국 한국에 있던 기독교인들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고 삼일독립운동을 추진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당시에 일본총독부는 20만 명의 정탐꾼을 전국에 풀어놓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일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적발하고 감시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당시에 큰 사건을 적발하면 20만원 상금을 주었고 공무원이면 2계급을 특진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20만 명의 정탐꾼들은 전국 방방곡곡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삼일만세운동을 추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교회의 힘이었습니다. 전국에 세워져있는 교회가 삼일운동의 본부였고, 모든 교인이 삼일운동을 준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민족대표 중 16명이 기독교인입니다. 또한 삼일운동의 날짜도 기독교인들에 의해 정해졌습니다. 본래는 3월 3일이 고종황제의 장례식이기 때문에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모일 것으로 예상하고 3월 2일에 거행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2일은 주일날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아무리 독립운동이라 해도 주일을 어길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고 결국 3월 1일로 결정된 것입니다.
또한 1905년에 발행된 찬송가 '찬미가' 1장과 10장, 그리고 14장에는 당시에 불렀던 세 종류의 애국가가 실려있었습니다. 이 세 가지 애국가는 모두 나라의 독립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산놉고 물고흔 우리 대한뎨국 하나님 도으사 독립부강' '우리 나라 우리 님군 황천이 도으사 국민동락 만만세에 태평독립하세'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 만세' 교회는 우리 민족을 깨우고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독립선언서를 읽어보면 부분 부분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담겨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서 세계만방에 고하야 인류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차로서 자손만대에 고하야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노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만드셨습니다. 구약성경에도 보면 안식년과 희년제도가 있습니다. 이웃에게 빚을 준 것이 있으면 칠 년째 되는 해에는 면제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종을 샀어도 칠 년이 되면 놓아주라고 하였습니다. 더욱이 안식년이 일곱 번째 되는 해 50년이 되는 희년에는 모든 종을 다 놓아주고 본래 자리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꺼내주셨을 때와 똑같이 더 가진 자도 없고 덜 가진 자도 없는 평등한 상태로 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만인 평등의 사상을 독립선언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병자수호조규 이래 시시종종의 금석맹약을 식하엿다 하야 일본의 무신을 죄하랴 아니하노라.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가는 실제에서 아조종세업을 식민지시하고 아문화민족을 토매인우하야 한갓 정복자의 쾌를 탐할 뿐이요. 아의 구원한 사회긔초와 탁락한 민족심리를 무시한다하야 일본의 소의함을 책하려 아니하노라'
무슨 말인가 하면 병자수호조약 이래 일본이 수없이 약속을 어긴 것과 사회 곳곳에서 우리 나라를 식민지로 여기고 우리 민족을 깔본다고 해서 그것을 책망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합니까? '자긔를 책려하기에 급한 오인은 타의 원우를 가치 못하노라. 금일 오인의 소임은 다만 자긔의 건설이 유할 뿐이요, 결코 타의 파괴에 재치 아니하도다.'
남을 탓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남의 잘못을 따지고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를 탓하고 나 자신의 미래를 건설하기에 힘쓴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독립선언서는 과거의 일에 매달려 원망하고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소망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공약 삼 장의 첫 번째는 '금일 오인의 차거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하는 민족&45965;요구니 오직 민족&45965;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45965; 감정으로 일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일본에 대해 배타적인 감정으로 하지 말고 오직 민족의 자유를 위하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지도자들은 군중들에게 이렇게 호소하였습니다. '당신들은 무엇을 하든지 일본인들을 모욕하지 말고 돌을 던지지 말고 주먹으로 치지 말라. 이런 짓들은 야만인들의 짓이다. 누구든지 그런 행동을 하는 자는 독립운동에 위해를 가하는 것이요, 그러므로 이것은 위험천만한 일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예외 없이 이 점을 극히 유의해야 할 것이다'
삼일운동은 일본에 대한 증오와 복수를 위한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삼일운동은 철저히 비폭력운동이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삼일운동이 인도의 간디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삼일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 간디는 인도에서 군인 신분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있었습니다. 삼일운동이야말로 세계 최초의 비폭력운동이었습니다.
삼일운동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대해 승리하신 방법이었습니다.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어린양처럼 입을 열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진 그 분의 뒤를 따르는 길이었습니다.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총으로 쏘면 총에 맞고 몽둥이로 때리면 몽둥이에 맞았습니다. 그렇게 한국교회는 예수님처럼 말없이 민족을 위해 십자가를 걸머지고 나아갔습니다.
삼일운동을 준비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70명의 민족 대표가 모여서 독립선언서를 준비하고 마지막으로 서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계획에는 70명이 전부 서명하기로 되어있었는데 이때 함태영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선언서를 한번 뿌린다고 해서 우리 나라가 즉시로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 분명히 일본경찰이 우리를 다 잡아다가 죽일텐데, 우리가 다 죽으면 독립운동은 누가 계속합니까?' 그래서 셋으로 나누기로 했습니다. 70명중에 1/3이 서명을 해서 먼저 죽고, 그 다음에 또 1/3이 서명하고 죽고, 마지막으로 1/3이 서명하고 죽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25명이 서명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전부 먼저 죽겠다고 나섰습니다. '나도 먼저 죽는다. 나도 첫 번째에 죽겠다' 그래서 나중에 33명까지 서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거사를 결정한 후에 그 다음에는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교회에 이 계획을 알리고 전국에서 동시에 만세운동을 펼쳐나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일본경찰은 스무 살이 넘은 사람은 조금만 수상해 보여도 몸수색을 했습니다. 더욱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는 사람은 스무 살이 안 넘어도 무조건 몸수색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시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스무 살이 안된 여학생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세운동의 계획을 전국에 알릴 스무 살이 넘지 않는 여학생들을 모집했는데 62명의 여학생이 자원했습니다.
이때 삼일운동의 지도자들은 남의 귀한 자식들을 사지로 몰아내는 것이 너무나 괴로워서 한참을 말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을 말하기 전에 먼저 말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려는 일은 죽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죽고, 나도 죽고, 다 죽는 일은 하는 것인데 죽을 각오가 없는 분은 여기서 나가도 좋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은 한 사람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서는 백 번 죽어도 좋습니다. 어서 할 일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래서 이들은 삼일운동의 거사를 알리는 편지를 몸에 지니고 전국으로 흩어졌습니다. 당시에는 택시도 없고 버스도 없던 시절입니다. 기차에서 내려서 50리, 60리를 걸어 다리가 온통 붓고 피가 나면서도 교회를 찾아 삼일운동의 계획을 알렸습니다.
드디어 2월 28일, 이제 내일이면 거사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삼일운동의 지도자들이 세브란스 병원에 환자로 가장하고 모여있었습니다. 그런데 12시가 되도록 함경도로 갔던 여학생 세 명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12시 반이 지나자 두 명의 여학생이 다리를 절룩이면서 들어왔습니다.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하고는 팔을 내미는데 그 팔에는 편지를 받았다는 내용을 붓으로 써놓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마지막 한 여학생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걸어오는 것이 아니라 기어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사명 완수' 이 한 마디하고는 쓰러져 버렸습니다.
이렇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한 사람들에 의해 삼일운동은 그 준비를 마쳤습니다. 드디어 날은 밝아 1919년 3월 1일 정오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습니다. 같은 시간 파고다공원에서도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고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졌습니다. 이 만세운동은 그후 6개월 동안 계속되어 전국의 모든 국민들이 만세운동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만세운동으로 인해 교회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수원에 있는 제암리교회 사건입니다.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계속되던 4월 15일 오후 2시, 일본군 중위 '아리다'의 인솔로 일본 군인들과 경찰들이 제암리교회로 들이닥쳤습니다. 30여명의 교인들을 손을 꽁꽁 묶어 예배당 안으로 밀어 넣은 다음 밖에서 문을 잠갔습니다. 그리고는 불을 질렀습니다. 불길을 피해 뛰어나오는 사람들을 여자와 어린이를 가리지 않고 총으로 쏘아 죽였습니다. 이때 제암리교회의 참상을 목격한 미국의 여선교사 '월콕스 노블'은 그의 일기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 터에는 재와 숯처럼 까맣게 타버린 시체뿐이었고 타 들어간 시체의 냄새는 속을 메슥거리게 할 정도였다.'
삼일운동으로 인해 교회는 많은 피해를 보았습니다. 1919년 10월 4일에 평양신학교에서 소집된 장로교 총회에서는 교회의 피해상황을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체포된 목사와 장로 134명, 기타 기독교 지도자 202명, 남자 성도 2,125명, 여자 성도 531명이 감옥에 갇혔으며 사살된 자 41명, 매맞고 죽은 자 6명, 매맞고 풀려난 자 2,162명, 파손된 교회 12곳, 이렇게 보고되었습니다. 총회의 목사들이 전부 감옥에 갇히는 바람에 선교사들이 그 업무를 대신 감당하였고 신학생들이 전부 감옥에 갇히는 바람에 신학교가 임시 휴교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기독교인인가 묻고 기독교인이라고 대답하면 무조건 잡아 가두었습니다. 이러한 핍박으로 인해 교회는 커다란 상처를 입게되었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이렇게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삼일운동의 십자가를 져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교회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세상이 썩어갈 때에 그 세상에 다시 한번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것이 교회입니다.
일본제국주의로 인해 우리 나라는 날로 썩어들어 갔습니다. 헐버트선교사는 '일제는 한국의 사회 구석구석을 부패하게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나라가 힘을 잃고 국민이 힘을 잃었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대 속에서 모두들 삶의 의욕을 상실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마치 병든 환자처럼 그 온 몸이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 교회는 일어섰습니다. 민족을 위한 십자가를 등에 지고 우리 나라가 독립국임과 우리 국민이 자주민임을 온 세상에 선포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이 썩어갈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처해있는 그 자리에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조국의 미래를 위해 작은 십자가라도 질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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