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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실존의 벽을 뛰어 넘어' (요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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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96년 전인 1910년에 영국의 에딘버러에 전 세계의 교회 지도자들과 선교부 대표들이 모여서 세계선교대회를 열었습니다. 이 대회에서 YMCA 창설자 존 모트(John R. Mott)라는 사람이 주제 강연을 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이 살아 있는 동안 전 세계의 복음화는 가능합니다. 함께 일어나십시다. 여러분이 죽기 전에 이 세계 전체의 복음화는 가능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중국입니다. 중국 대륙의 선교만 끝나면 전 세계는 완전 복음화 됩니다. 지금 중국 선교가 불길처럼 일어나고 있으니, 중국은 곧 기독교적인 나라가 될 것입니다.'

1910년이면 우리나라는 을사조약 이후 일본에 합방된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은 에딘버러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 교회를 대신하여 두 사람이 참석했는데, 한 사람은 연세대학을 세운 언더우드 목사이고, 또 한 사람은 감리교의 아펜젤러 선교사였습니다. 우리 성결교회는 1907년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어 1921년에 “조선 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조직했기 때문에 1910년에는 아직 교회의 형태를 갖추지 않은 때였습니다. 1910년 당시, 서유럽에서는 낙관주의가 창궐하고 진보주의 사관이 판을 치며 산업혁명의 여파로 모든 산업이 발전했습니다. 교회도 '우리가 노력한 결과 이 세상은 하늘나라를 닮아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때 모였던 사람들은 5년 후에 다시 모여서 '세계선교협의회'라는 기구를 만들기를 결의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5년이 되기 한해 전인 1914년에, 바로 낙관주의와 진보사관과 인간의 이성과 능력에 대한 믿음이 최고조에 달했던 유럽은 철퇴를 맞고 말았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인간의 낙관적 진보사관이 지배하던 유럽 한복판에서 터졌습니다.

5년 전 1910년에, 에딘버러에서 소리 높여 외쳤던 꿈, '우리가 죽기 전에 전 세계를 복음화 할 수 있다.'는 꿈은 불과 4년 만에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4년 동안 이렇게 급변했던 것입니다. 지금부터 96년 전에 세계 교회의 대표들이 모여서 이렇게 엄청난 꿈을 꾸었던, 낙관적 세계관이 창궐하던 그 당시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중국 선교가 끝나면 세계의 복음화는 끝날 것이다.' 모두들 벅찬 가슴을 안고 선교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 끔직한 전쟁이, 세계대전이 두 번이나 발생했고, 지금도 테러를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많은 세월 동안, 인간의 이성이 타락하고 물질문명 때문에 인간의 심성이 타락하는 현실을 보고 인간화를 부르짖었습니다. '인간화만이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하고 인간화를 부르짖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니 인간화 속에 인간이 없었습니다. 복음화를 외치는데, 전 세계를 복음화하자고 외치는데, 복음이 없습니다. 한국 땅이 교회로 뒤덮인 듯한데, 진정한 교회가 없는 것 같습니다. 신앙을 소리 높여 말하는데, 신이 있을 곳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2천년 전에 이미 이런 상황을 맛보셨습니다. 인간세계가 너무 악하여, 아들 예수를 통해서 세상 속에 한 자리를 마련하여 인간들과 함께 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나 인간 세계는, 인간들은 그분에게 한 곳의 자리도 내어드리지 않았습니다. 몸 누일 데도 없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세상 속에 누울 자리가 없어서 말구유에 누우셨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가 살아야 할 자리를 확보하며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자리가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살고 있는가, 죽어 가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살아 있다고 할 때, 내가 살아 있는 그 자리는 어디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용어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독일어 전문용어로 Sitz im Leben, 삶의 자리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지나서 한 연못가를 향해서 가고 계십니다. 그래서 38년 동안 병으로 고생하는 이에게로 가십니다. 38년 동안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이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 저 연못에는 가끔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요동치게 하는데, 그때 연못에 먼저 들어가기만 하면 병이 낫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병이 너무 심해서 못에 빨리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낫고 싶으냐? 그렇다면 그대가 앉아 있는 자리를 아예 걷어 가지고 일어나 걸어가거라.' 일어나서, 그냥 가지 말고 자리를 몽땅 들고 가라는 것입니다. 그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의 자리를 몽땅 걷어 가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이 38년 동안 질병에 시달린 사람의 삶의 자리는 하나님이 없는 자리였습니다. '생명도 없는 자리, 움직일 수도 없는 자리, 이 자리를 들고 일어나면, 살아계시고 움직이게 하시는 하나님이 그대와 함께할 것이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가라.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병이 나아, 일어나 자리를 들고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대의 믿음이 그대를 구하였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믿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다고 고백하는 그 자리에 그 믿음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함께하셔야 구원받는 것이지, 믿는다는 고백만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 신앙, 임마누엘이 없는 신앙고백은 가짜입니다. 차라리 그런 고백보다는 하나님이 없다는 고백이 훨씬 더 진지합니다. 진실로 하나님이 계신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제 삶의 자리에 하나님이 거하실 공간을 마련해 놓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 의미가 있는가 하면,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입니다. 제 가슴속에, 제 삶의 한복판에 지금 함께하고 계시는, 눈물을 같이 나누고, 같이 웃고, 같이 찬송하며 그렇게 계시는 그 하나님이 저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직접 인간과 함께 하십니다. 고난당하는 세계 역사 속에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고통당하는 우리 한국 민족의 역사 속에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고난의 긴 터널을 지나고 계시는 여러분들의 삶 속에도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38년 된 병자에게 침상을 걷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 받는 자 계십니까? 기도하십시오.' 그 말은 '여러분의 기도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낫게 된다는 것입니다. '즐거운 사람 있습니까? 찬송하십시오.'라는 말은 하나님이 찬송 가운데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아픈 자 있습니까? 장로들을 불러다가 기도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 기도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를 한번 들여다봅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같이 고난 받고, 같이 즐거워하고, 같이 기도하고, 같이 찬송하는 그곳이 바로 우리 중심이 되도록 해봅시다. 이 시간 우리의 중심에 한번 모셔 보십시다. 그런 다음 집으로 가시고, 세상으로 가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항상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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