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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술에 취하라 (행 전 0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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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대로 저는 목회를 하면서 제일 큰 핸디캡이 찬송을 잘 못한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때였습니다. 선생님께서 풍금으로 '과꽃'이라는 노래를 계명과 가사를 따라 부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누가 한번 불러볼 사람?'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선뜻 부르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저는 금방 한 두 번 따라했는데 계명도 외워지고 가사도 외워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요'하고 일어나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33년이 되었지만, 저는 지금도 그 노래의 계명을 다 외우고 있습니다. '미파솔 라솔미도 도시레도 라솔 라라라도 미파라솔 라솔미레미도,'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노래를 열심히 저 나름대로 부르고 있는데, 갑자기 선생님께서 늘 가지고 다니시던 대나무뿌리 매가 있었는데, 그것으로 제 머리를 '통'치면서 '오몽근 넌 임마 안돼 들어가.' 이렇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얼마나 무안했는지 모릅니다. 거기에는 제가 어렸을 때 짝사랑하고 있던 윤숙이도 제 노래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안해서 울어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고 얼굴을 붉히면서, 씩씩거리면서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이후로는 정말로 어떤 노래도 남 앞에서 한번도 불러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사실 지금까지 유행가를 처음부터 끝까지 아는, 부를 수 있는 유행가가 하나도 없는 것이 그때부터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내 쭉 아무런 노래도 부르지 아니하고, 듣지도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음악을 굉장히 좋아하게 되는 계기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로망롤렝이라는 사람이 쓴 베토벤의 전기를 우연히 읽었습니다. 거기에 보니까 베토벤은 아버지가 알콜중독자였고, 어머니가 폐결핵이 걸려서 콜록거리고, 피를 토하는데, 그 속에서 태어난 아이였습니다. 그 베토벤의 부모들은 날마다 싸우고, 남의 집의 방 하나 빌려 가지고 살면서 싸우고, 병들었다고 쫓겨다니다가, 베토벤이 열한 살 때 그 어머니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베토벤은 엄청난 고생을 했는데 극장을 돌아다니면서, 구걸음악을 하면서, 술 마시고, 주정하는 아버지 시중을 들어야 되었습니다. 그런데 베토벤은 그런 아주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음악이라면, 아주 음악에 미쳐 살았습니다. 그는 음악을 하는 동안은 배가 고픈 줄도 몰랐고, 몸이 아픈 줄도 몰랐고, 가난도 수치도 다 음악을 하는 동안은 잊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에피소드-그가 교향곡 9번을 공연할 때 모든 청중들이 일어나서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치는 데도 그는 귀가 들리지 않아서 모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렇게 귀에 완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온전히 음악에 몰두해서 살아가는 베토벤의 이야기를 저는 읽으면서 도대체 베토벤을 그렇게 만든 음악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책을 읽으면서 내내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무심코 켜놓은 라디오 FM에서 베토벤의 몇 번 무엇입니다. 하는 베토벤의 음악이라는 DJ의 코멘트가 나오면서 음악이 흘러서 난생처음으로 음악이라는 것을, 베토벤 음악을 들어보려고 마음과 귀를 기울이고 쫑긋하고 하던 일을 멈추고 음악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베토벤의 전기를 읽어서 그런지, 저는 음악이 정말 좋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피아노가 첼로가 어울러져서 무슨 탄식 같은 것을 반복적으로 계속 피아노와 첼로가 반복된 음을 탄식하면서 높아져가는데, 아 그날 저녁에 베토벤의 음악을 듣는 제 가슴속에 소낙비가 막 내리는 것 같았고, 제 조그마한 방안이 가득 바닷물이 출렁거리는 것 같은 굉장히 충만한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 뒤로 이해 못하는 음악도 있지만, 음악 듣는 것을 아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음악을 싫어하던 제가 음악을 좋아하게 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음악 속에는 그냥 사랑의 목소리나, 그냥 소리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음악 속에 그 음악을 만든 작곡자의 또는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자의 혼이 들어있다는 것을 저는 알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령 우리가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들어보면, 처음에 '꽝꽝꽝꽝'하고 시작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그냥 꽝꽝꽝 두드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아니라, 그것은 불행하고 고독한 사나이, 그 고독한 사나이 베토벤이 거대한 운명이라는 닫혀진 문 앞에서 그 문을 두드리는 그 비장한 도전감을 그 운명 교향곡에서 우리는 느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아마 그래서 사람들은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을 듣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 음악을 통해서 베토벤이 느꼈던 그 혼을 느끼고 싶고 밥을 굶고라도 좋아서 미치던 그 감동을 그가 만든 음악을 통해서 느끼고 싶어서 우리는 음악을 듣는 것입니다.

음악뿐만이 아니라 그림도 그렇고 시도 그렇고 합창도 소설도 무용도 모든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이 다 그런 것입니다. 그 속에 들어있는 그 혼을 전달받고 싶고 그 혼을 전달받을 때 아름답고 사람의 영혼이 움직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또 고등학교 때, 헤르만헷세가 쓴 '파브르달굼'이라는, 라틴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달리 말씀해 주실 수 없습니까?'라는 시를 읽었는데, 그 시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종은 그 몸을 때리고 소망의 절규를 하는데, 아 나는 누구의 가슴에 떨어지는 소망이 되어야할까?' 저는 이 부분을 읽다가 엉엉 울었습니다. 종은 제 몸을 때려서 그 소망을 누군가의 가슴에 소망을 주려고 제 몸을 때려서 절규를 하는 사명이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의미 없이 사는가, 나는 왜 이렇게 방황하는가, 나는 왜 이렇게 값없이 더럽게 사는가, 이런 생각에 헤르만헷세의 그 고민과 헤르만헷세의 갈등과 인생의 의미가 제게 탁 젖어들어 눈물이 흐른 것이었습니다.

사람이란 이런 인생의 감동들이 혼이 있는 경험들이 모아져서, 인생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란 뭔가 역사가 있는 일을 하려면 이런 혼이 있는 일을 해야하는 것이고, 이런 혼이 있는 일을 할 때 아름답고 귀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혼이 없는 일을 하는 것은 아주 낭비적이고, 나아가서 아주 혼이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은 보기 싫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인대요, 옛날에 아주 유명한 '비틀즈'라는 락그룹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이탈리아에서 공연을 하는데 수만 명이 몰렸습니다. 그런데 공연 도중 갑자기 어떤 사람이 무대로 뛰어올라서는 권총을 들고 그 비틀즈에게 겨누면서 빨리 그만두고 돌아가, 빨리 그만두고 돌아가라고 외친 것입니다. 당장 그만두고 돌아가지 않으면 쏘아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공연장이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잡아놓고 보니까 이 사람 괴한이 아닙니다. 깡패도 아닙니다. 알고 보니 유명한 음악학교 교수인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랬느냐고 묻자 그 교수가 비틀즈를 보고 다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네 음악에는 혼이 없어, 너희들 음악에는 혼이 없어, 그런데 혼이 없는 음악을 가지고 이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노래를 부른다는 것을 나는 참을 수가 없어 이것은 낭비야 그리고 이것은 죄악이야 그러면서 흥분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실화입니다.

조금 지나치긴 했지만 저는 충분히 그 음악교수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음악이나 문학이나 미술 같은 것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더욱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에 혼이, 혼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음악하는 사람에게는 음악에 혼이 있어야 아름다운 것이고, 그림 하는 사람에게는 그림에 혼이 있어야 그 그림이 값이 나가고 그림이 감동을 주듯이,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의 혼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혼이 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좋은 악기로 연주를 해도 그거에 혼이 없는 음악은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합니다. 여러분 사진을 찍어보세요. 사진기는 누구나 똑같은 광경을 박아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사진이 그림만큼 값이 나갈 수 없습니다. 사진은 아무리 정확해도, 색깔이 아무리 정확해도 거기에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혼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그림보다 값이 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직분을 가졌어도, 그 사람의 하는 일에 그 사람의 삶에 그리스도의 혼이 담겨져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처음 천지를 창조하실 때, 모든 것이 혼돈하고 어두운 카오스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 혼돈되고, 어두운 폭발이 일어나고 어둡고 요동하고 있는 그 천지에 하나님의 신이 그 위에 운행하시더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신이 그 카오스 상태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게 되니까 어땠습니까? 세상에 빛이 생겼습니다. 질서가 생겼습니다. 세상이 아름답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도 그냥 말씀으로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혼이 거기 모든 만상 위에 운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혼동하던 곳에 빛이 생기고 질서가 생기고 생명이 생기고 아름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우주가 이렇게 질서가 있고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혼이 함께 역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혼이 있는 곳에는 빛이 있습니다. 질서가 있습니다. 생명이 살아납니다. 아름다운 것이 생겨납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혼이 운행하는 교회는 빛이 있습니다. 질서가 있습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아름다운 기적들이 없는 것이 생겨나는 창조의 능력이 하나님의 혼이 있는 교회에는 일어납니다.

사람에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혼이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가고 접하게 되면 그 마음 속에 어둡던 마음 속에 빛이 일어납니다. 그 갈등하고 방황하고 고통스럽던 마음속에 질서가 생깁니다. 메말라가고 죽어 가는 것들에 생명이 생깁니다. 사람이 변합니다. 밝게 변하고 건강하게 변하고 예쁘게 아름답게 변하는 역사가 하나님의 혼이 그 속에 들어가면 그런 역사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혼이 어디든지 들어가기만 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어두운 것들이 밝아지고 혼돈된 것들이 질서를 찾게되고 죽어가던 것들이 생명을 얻게되며, 더럽던 것들이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혼은 창조하는 능력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평양에 유명한 최권능이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본명은 최봉석이라는 분인데, 이 분은 전도할 때 무조건 사람들을 만나면 '예수천당, 예수천당'하면서 돌아다니신 분으로 유명했습니다. '예수 믿고 천당갑시다' 이렇게 전도했습니다. 무조건 '예수천당 예수천당' 이렇게 뭐 교리설명이나 이야기 안하고 이렇게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분의 전도를 받으면 사람들이 예수를 잘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돌 징검다리를 쭉 놓고 물을 건너는데, 시냇물을 건너려는데 앞에 언덕에서 양반 하나가 담뱃대를 길게 물고 둑 앞에 떡 앉아 있는 것입니다. 최권능 목사님이 여기를 지나가시려다가 전도대장이 사람을 보고 그냥 갈 수가 없어서 담뱃대를 물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영감님에게 귀에다 대고, '예수천당'하고는 그냥 쭉 지나갔습니다. 이 양반 담배를 피우다가 누가 귀에다가 '예수천당'하니까 '저 저 저 고얀놈 고얀놈'하지만 이미 물을 징검다리를 건너가 버렸습니다. 아 그런데 이 양반이 집에 가셔서 자꾸 귀에서 '예수천당, 예수천당'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잠을 자도 자꾸 귀에서 메아리처럼 '예수천당, 예수천당' 이렇게 막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귀신 붙었다고,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했습니다. 그런데 굿을 했는데도 안됩니다. 계속 귀에서 '예수천당, 예수천당'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서양귀신은 서양귀신 들린 사람에게 가야된다고 해서 교회 나가게 되고, 예수 믿게 되었는데, 이 양반이 누구냐 하면 고당 조만식 선생님의 부친인 조을선씨였습니다. 그래서 그 가정이 예수 믿고 그 훌륭하고 아름다운 인재들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그 말이 무엇이기에 '예수천당'하면 믿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식으로 전도하면, 그런 방법으로 전도하면 수십 교회가 최권능 목사님으로 말미암아 세워졌습니다. 수십만 명이 그 최권능 목사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천당이라는 말을 듣고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을까요? 아마 여기 있는 여러분 중에 '아 목사님 그때 세상은 참 어수룩했지요. 그러니까 그 때 세상은 어수룩하고, 사람들이 좀 단순했기 때문에 그냥 예수천당만 해도 믿었지 지금 세상은 그렇게 안됩니다.' 이렇게 말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권능 목사님이 오늘도 이 나라 한복판에, 저 난장을 하고 있는 복판에 오셔서, 서울 한복판에 가셔서, 대전 한복판에 가셔서 예수천당 예수천당 이렇게 하면 전주 나라가 발칵 뒤집어지고, 서울이, 대전이 발칵 뒤집어질 것입니다. 저 죄악의 거리 술집들이 발칵 뒤집어져 버릴 것입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최권능 목사님은 짤막하게 예수천당하시지만, 그 속에는 정말 살아있는 예수의 혼 예수의 영이 최권능 목사님 속에 가득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피카소가 메모지 한 장에 그린 그림이 그 피카소의 혼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 능력이 들어있기 때문에 수천 만원 수억의 가치가 지녔듯이, 최권능 목사님의 짧은 메모와 같은 그런 한마디 '예수천당' 말씀에도 그 속에 예수의 혼이 살아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찔리고, 회개를 하고, 자복을 하고, 견딜 수 없고, 눈물이 나오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천당이라는 말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말에 논리와 지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최권능이라는 사람 속에는 살아있는 창조하는 신 하나님의 신 성령의 신 하나님의 혼이 그 속에 역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한번은 그 최권능 목사님이 신사참배 때문에 감옥에 갇혀서 매를 맞았습니다.

빠따라는 말은 일본 사람에게서 나온 말입니다. 배트를 빠따라 그랬죠? 야구방망이 같은 배트로 두드려 팬 것입니다. 그때 이 최권능 목사님 한 대 치면 '예수' 또 치면 '천당' 때려도, 때려도 맞을 때마다 '예수천당' '예수천당' 그러니까 일본순사가 우습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해서 '야 너는 매를 맞으면 아이쿠 하거나 살려줘 하고 비명을 지르지 않고 예수 그리고 천당하느냐' 하고 물어보니까 최권능 목사님이 유명한 말을 했어요. 뭐라고 했습니까? '내 속에는 예수하고 천당으로만 가득 차서 입만 벌리면 예수 천당이 나옵니다.' 그랬어요. 여러분 사실 이 말 얼마나 재미있고 위대한 말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그것은 장난이 아닙니다. 정말 진심이었습니다. 그 분 속에는 예수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 때문에 감옥에 갔습니다. 예수 때문에 양반의 족보를 버렸습니다. 예수 때문에 울고 울었습니다. 예수 때문에 수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 속에는 예수로 가득 찼습니다. 우리처럼 돈으로 차고, 자식으로 차고, 자랑으로 차고, 시기로 차고, 원망으로 차지 않았습니다. 예수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의 혼이 그의 인격과 모든 삶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분에게 권능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권능이 예수의 혼이 그 삶을 통해서 그 사람을 통해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오늘도 그 최권능 목사님이 오셔서 전주 코아 앞에서, 난장에서 '예수천당'하면 전주가 발칵 뒤집어질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초대교회는 이처럼 예수의 영으로 충만해서 펄펄 뛰는 살아있는 교회였습니다.

시장에 가보면 생선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선 값이 죽은 생선과 펄펄 뛰는 생선과는 값이 굉장히 다르고, 맛도 다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이처럼 펄펄 뛰는 살아있는 교회였습니다. 교회도 생선과 같이 사람도 생선과 같이 살아있는 교회가 있습니다. 펄펄 뛰는, 맛있는, 싱싱한 교회, 싱싱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똑같은 생선이지만 죽은, 절인 값없는 이런 생선과 이런 교회도 있습니다. 여러분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박해가 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박해가 올지라도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라면 핑계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희생하는 것을 오히려 기쁘게 하늘의 상급으로, 하늘의 면류관으로 여기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것을, 그들은 오히려 희생당하는 것을, 하나님 때문에 우는 것을, 그들은 아주 기뻐했습니다. 그런 그들이 기도하니까 각종 병자들이 일어났습니다. 날마다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간증하고 전도하면 수천의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수천 수만의 아름다운 미담들이 그 예루살렘 교회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처럼 초대교회를 살아있는 교회 능력 있는 교회로 만들었겠습니까? 본문 성경말씀에 보면 그 이유를 오순절날 저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오순절날 저희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다가 성령을 받았는데 성령을 어떻게 받았냐하면 충만하게 받았습니다. 충만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충만이라는 것은 내 인격을 지배하고, 내 자아를 지배하고, 내 욕심을 지배하고, 내 성품을 조정하는 능력이 있을 만큼 가득 받은 것을 충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보니까 이들에게 엄청난 변화가 왔습니다. 능력이 생겼습니다. 축복이 있었습니다. 열매가 있었습니다. 기쁨이 있었습니다.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내 욕심이 이제 죽어지고,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배합니다. 내 자아를 하나님의 영이 지배합니다. 내 인생의 기질, 내 성품의 기질을 하나님의 영이 지배합니다. 이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혼이 그들을 지배하게 되니까 이런 놀라운 역사들이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저들은 신들린 사람이었습니다. 성신 들린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 보고 미쳤다고 했습니다. 새 술에 취하였다고 그렇게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기 직전 사도행전 1장 8절, 9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무엇을 받고? 권능을 받고' 그랬습니다. 권능을 저들은 받았습니다. 저들은 마치 그래서 안 믿는 사람이 보면 초인간들처럼 술 취한 사람들처럼, 미친 사람들처럼 이렇게 저들은 큰 능력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베드로가 설교를 하면 그 배우지 못한 무식한 베드로가 설교를 하면 어부였던 베드로가 설교를 하면 거기 있던 사람들이 전부다 울고 죄를 내던져버리고 '우리가 어찌할꼬?' 하면서 방언이 터지고, 회개하면서 하나님을 나도 믿겠다고 하루에 3,000명이나 되는 많은 수가 하나님을 믿겠다고 달려들었습니다.

저는 설교를 하면서 사실 괴로워죽겠습니다. 제가 표현하고 싶고 여러분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것의 십분의 일도 전달할 수 없으니까 죽겠습니다. 제 설교는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고, 이렇게 설명을 하려고 하는데 사실 설명이란 지식의 변이일 뿐 혼의 이야기, 영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식은 아무리 고상하고 아무리 잘 짜여지고 아무리 합리적인 이야기라도 그 혼과 그 영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바꿀 수가 없습니다.

저는 베리 무어 목사님이라고 캐나다에 계신 목사님의 설교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광주에 있을 때, 광주에 오셨을 때, 그분의 설교를 들었는데, 그분의 설교를 들으면서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울고 가슴을 치고 그분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냥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주 단순한 복음을 전하는데 이상하게 그분의 말을 들으면 가슴이 꽉꽉 메워옵니다. 그분이 그 후 6년 후엔가 서울에 또다시 오시게 되어서 제가 그때 총회신학교에서 신문을 만드는 편집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수 분들에게 부탁해서 그분을 우리 총신에 한번 모셔서 좌담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그분에게 갈망해서 물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6,7년 전에 광주에서 목사님 오셨을 때에 설교를 듣고 아주 감동하고 이렇게 놀라왔는데 목사님, 그렇게 설교를 잘하시는 비결이 어디 있습니까?' 물었습니다.

그분이 웃으시면서 그러십니다. 자기는 하루에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일주일에 책을 3,4권씩 읽는다. 그리고 설교를 준비하는데, 다 준비하고 앉아서 쓰는 시간만 20시간을 쓴다. 그리고 그것을 쓰고 나서는, 설교를 가지고 밤새도록 설교하기 전에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자기 기도하는 자기 교회 성도들에게 기도할 때 부탁하고, 자기 아버지가 다리가 불구자여서 걸어다니지 못하는데, 침상에서 기도를 많이 하시는 아버지 목사님이 계시는데, 자기가 아버지 목사님께 꼭 자기가 설교할 때마다 전화해서 '아버지 저 지금 설교하니까 기도해주세요.' 그렇게 하면 아버지께서 자기가 설교할 때 몇 분간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설교 내내 기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말을 듣고 그분이 정말 그렇게 능력 있게 설교하는 것은 준비하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식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혼이, 성령의 역사가 그 가슴 속에 철철 넘쳐 흐르며, 그것을 뒷받침하는 하나님의 강력한 영이 레이저빔처럼 사람들의 가슴에 혼으로 파고드는 역사가 있기 때문에 그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혼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혼을 그 설교에다 담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설교에 능력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가슴을 치게 됩니다.

저도 목회자로서 소원이 있다면 뭐겠습니까? 바로 그런 설교를 해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듣고 옳다 그러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회개를 하고, 삶이 깨지고, 여러분의 가치관이 바뀌고, 초대교회처럼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혼이 있는 설교를 하는 것이 저와 목회자들의 꿈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혼에 신들릴 때 교회는 능력이 있습니다. 교회에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교회에게 기적과 많은 아름다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혼에 신들려 살아갈 때 세상에 모든 헛된 욕심들을 버리고 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혼에 충만할 때 모이기를 힘쓰고, 서로 봉사하고, 원수라도 찾아가서 손을 잡을 수가 있고, 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재산을 팔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혼에 신들릴 때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한 핍박을 기뻐하고, 도리어 주님 때문에 내가 고통을 당한 것을 감사하며 주를 위하여 죽기까지 충성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혼에 신들릴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또 뭐가 있냐? 방언이 터집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성경에 우리에게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정말 필요한 일은 뭐겠습니까? 가장 요청되는 일은 뭐겠습니까? 이 하나님의 신에 충만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또 모든 성도들 생명 속에 이 하나님의 혼이 살아있어야 되고, 제직들 속에 그 행하는 일 속에 하나님의 혼이 살아서 역사해야 되고, 우리 예배와 찬송 속에 하나님의 영이 충만함이 넘쳐서 찬송을 불러도 정말로 눈물이 흐르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기도를 드리며 '아버지' 하고 불러도 정말 하나님 앞에 간절히 내 가슴이 통하는 이런 역사가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도 그렇습니다. 우리 가정이 창조의 영, 치료하는 영, 변화하는 이 하나님의 영이 지배하게 되면 모든 우고질환이 물러갑니다. 모든 어둡던 것이 바르게 됩니다. 더럽던 것이 아름답게 됩니다. 혼돈된 것이 질서를 찾게 되고, 죽어 가는 것들에 생명의 역사가 이 하나님의 혼이 있을 때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말씀을 맺어가면서 우리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영에 충만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500 문도가 있는 곳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한 성령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약속한 성령을 받기를 기다렸습니다.

보세요. 여러분. 주님의 말씀을 믿고 약속한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처음에 모였을 때는 500명 가량이 모였다고 예측됩니다. 그런데 이제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은혜를 주시기를 기도하는데 하루가 되어도 아무 일이 없습니다. 이틀이 되어도 아무 일이 없습니다. 삼일이 되어도 아무 일이 없습니다. 사일이 되어도 아무 일이 없습니다. 오일, 육일, 칠일, 그래서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람들이 다 떠나갔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언제인지 모르니까 사람들이 다 떠나갔습니다. 500 문도라고 예측이 되는데, 500문도 중에 120문도 아니 120명만 남고 380명이 다 떠나갔습니다. 그들은 바쁜 일이 있고, 사업에 바쁘고, 핍박을 견디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120명은 끝까지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끝까지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들었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이레, 여드레, 아흐레까지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십일째 되는 날 오순절이 딱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그렇습니다. 오순절이 이르렀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갑자기 저들에게 기도하고 있는 저들에게 바람과 같은, 불과 같은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게 운행하기 시작하더니 저들의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저들이 방언이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들이 갑자기 기쁨이 생겨, 저 미워서 견딜 수 없던 원수에게 찾아가서 손을 내밀 수 있는 기쁨과 삶의 능력이 저들 속에 생겨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성령 충만함을 받습니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끝까지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끝까지 믿습니까? 끝까지 믿습니다. 우리는 이 IMF 한파라는, 이 어려운 시절을 살고 있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믿음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리라.'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끝까지 붙드는 자는, 이 말씀을 절대로, 어떤 환경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이 말씀 안에 거하는 자는 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자는 그 말씀이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진실로 그러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됩니다. 말씀이 나의 것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약속의 때가 이루어질 때까지, 내 믿음 변치 않게 해 주시옵소서. 그 말씀에 굳게 거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가 기도하고, 기도할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납니까? 성령의 충만함의 역사가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죄 많은 세상 이 시험 많고 유혹 많은 세상을 이기려면 여러분의 의지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복잡한 세상에 기쁘게 살려면, 남에게 도움이 되는 손길로 살려면, 값있게 살려면,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안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포스트모더니즘의 이 세계에 길이 수천 수만 개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한길 이 좁은 길 예수의 길을 갈려면 내 가치관, 내 노력, 내 지식, 내 의지로는 안됩니다. 성령 충만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고, 내 속에 빛이 일어납니다. 내 가정에 빛이 일어납니다. 질서가 생깁니다. 생명의 역사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의 기도의 소원, 우리의 소원, 제일차적인 소원이 '주여 성령 충만함을 주시옵소서.'라는 것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령충만주일입니다. 성령 강림주일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속에, 이런 성령의 충만함, 예수의 혼이 충만함, 하나님의 영이 충만히 있어서, 환란 많고, 풍파 많은 가운데서도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여러분, 할 일 많은 세상 속에도 값있는, 보람있는 인생을 살수가 있고, 이 유한한 세상, 허무한 세상을 살면서도 천국의 영원한 기쁨을 맛볼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대로 살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우리 교회와 여러분 자신들이 하나하나 이렇게 기도하고 이렇게 사모해서 성령 충만함 받는 우리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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