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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본 그대로 오시리라 (행 0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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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신앙은 그 내용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사도행전적 신앙이라고 한다면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적 신앙고백은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에 집약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듯 확실하고 중심적인 신앙을 떠나서 세속적이고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욕망을 앞세울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기독교인의 최대 관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나와의 관계, 예수님의 부활과 나와의 관계, 예수님의 교훈과 나와의 관계에 있고 또 그래야 합니다. 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바로 그같은 문제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면 부활사건과 재림사건 사이에 승천사건이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재림의 약속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는 그것을 강조하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리고 재림에 대해서도 비교적 많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승천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승천이야말로 재림과 부활을 다 확실하게 설명해주는 증거 요인이 됩니다. 승천사건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을 그 때문입니다.

승천에 대한 기사는 마가, 누가 등의 복음서와 이 사도행전에, 그리고 히브리서 4장 14절 등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사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오히려 그 차이를 대조해보면 승천의 역사성과 사실성을 깨닫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들 기록은 한 점 모순 없이 예수님의 승천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같이 감람산을 말씀하였고, 성령에 대하여 말씀하신 다음에 승천하신 것으로 말씀하였고, 사명을, 소위 great commission을 주시고 분부하신 다음에 승천하신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하나의 커다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의 같은 사건을 같이 체험하고, 그 체험한 것을 저마다의 스타일대로 요약하여 정리한 것들이므로 각도에 조금씩의 차이는 있다 해도 부각된 본질은 하나임을 우리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여기에는 약속이 있습니다.

저는 가끔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성경에 만일 승천을 말씀하는 기록이 없었다면 부활사건은 역사성이 희박해졌을 것이요, 철학화, 관념화해버렸을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이렇듯 승천사건은 우선 부활과 재림의 역사성부터를 확실하게 설명해주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부활과 재림의 중간에 승천사건이 못을 박듯 확실하게 자리함으로써 부활, 재림은 비로소 확실하게 구체성을 띠고, 현실성과 역사성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승천'이라고 하는 사건은 이렇듯 중요합니다.

여러분, 충분히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좀더 냉정하게 생각해보십시다.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기는 하지만 조금 비딱하게 생각하면 아리송한 구석이 없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먹고 자고 하시면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신 것이 아닙니다. 잠깐 나타나셔서 저들과 함께 지내시고 잡수시고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분명히 부활하신 것이 틀림없다 싶었는데 다시 보니 사라지시고 안보이셨다가 또다시 어떤 때에 문 잠그고 그 안에서 벌벌 떨고 있는 저들 앞에 홀연히 나타나셔서는 '평안하뇨?' 하십니다. 그러니 부활하셨다고도 할 수 없고, 안하셨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seeing body' 혹은 'spiritual body'라 합니다. 곧 뵐 수 있는 몸입니다. 뵐 수 있는 몸인 것은 확실합니다. 만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의 그 몸은 아닙니다. 신령한 몸, 부활하신 몸입니다.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고 졸리면 자야 하는,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우리 몸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차원이 아주 달라요. 이 사실을 어떻게 소화해야 합니까?

성경 상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승천하시기까지 사람들 앞에 열한 번 나타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 나타나시고 저기 나타나시고 하다가 승천하시게 되는데, 그 몸을 육체가 아니라고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의 그 예수님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아리송했기에 예수님의 수제자라 하는 베드로마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도 '알 수 없다, 알 수 없어. 고기나 잡으러 갈란다'하고 갈릴리로 돌아간 것이 아닙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옆에 계시는 것이라면 정신나갔다고 물고기 잡으러 가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나타나셨다가 없어지셨어요. 그러니 도대체 이 어른이 부활을 하신 것인지 안 하신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단 말입니다. 역사상 단 한 번밖에 없는 이 사건을 도시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물론 예수님의 육신을 직접 만져보았습니다. 함께 식사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이럴 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확실히 부활하셨습니다. 틀림없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니 사라지시고 안 계십니다. 그런가하면 다시 또, 문이 잠겨 있는데도 어디로 나타나셨는지 홀연히 저들 앞에 계십니다. 이러니 어떻게 설명 할 수 있습니까? 결국 '승천'이라는 사건이 없었다면 부활하신 주님의 존재가 한낱 환상적 존재로 비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적 존재의 현현(顯現)으로, 영적 존재가 순간순간 우리가 알아볼 수 있도록 현현된 것으로 간주하기 십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승천이라는 사건이 있습니다.

승천사건이 있음으로써 저같은 모든 의혹이 사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그 몸은 신령한 몸입니다.

'Christ affair'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체적 조건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몸입니다. 우리가 뭐라고 가름할 수 없는 몸입니다.

그 몸이 이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구름 밖으로 사라지십니다. 저들이 멀쩡히 뜬눈으로 보는 가운데 승천하십니다. 비로소 저들은 예수님의 부활은 확실한 사실이라고 믿게 됩니다. 만일 승천이라는 사건이 없이 무시로 여기 나타나시고 저기 나타나시고 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부활을 온전히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당신의 육신을 얼마동안 나타내시고는 승천을 하셨습니다. 그럼으로 부활사건에 대한 의혹은 말끔히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육체의 부활을 믿게 되고, 그 공간성을 믿게 되고 시간성을 믿게 됩니다. 승천사건이 있음으로 부활의 구체성이 분명해진 것입니다.

재림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도 오해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영으로 재림하실 것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이상한 꿈 하나 꿔놓고 예수님 뵈었다는 둥 만났다는 둥 헛소리를 하는 판입니다. 원래 약간 모자라는 사람은 꿈과 현실을 혼동합니다.

그러면 재림에 대하여 과연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이 재림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철학적이고 환상적이기에 여러 모로 문제가 혼란스럽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고맙게도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올라가실 때에 하늘로서 음성이 있습니다.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이 구절이 없었더라면 큰일날 뻔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새 보니 예수가 많아요. 저마다 스스로 재림주라고, 예수라고 합니다. 언젠가 스스로 재림주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서 네 시간이나 이야기를 해본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재림주입니까?'라고 물었더니 성경 어디를 봐도 자기가 재림주인 것을 알 수가 있다고 합니다.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덩달아 돌아버릴 것 같아서 그만두었습니다. 어쨌든 참 이상하더군요. 완전히 미쳤어요. 늘 제 귀에는 '네가 메시야다' 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성경 어디에 당신이 메시야라는 증거가 있느냐고 하면 엉뚱한 이야기만 주섬주섬 하고 앉았어요.

여러분, 성경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분부하십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이같이 말씀하시고 나서 몸이 하늘로 올리워 가십니다. 구름에 가리워 보이지 않게 되십니다. 사람은 구름까지밖에 보지 못합니다. 멀리 높이 올라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음성이 들려옵니다. '본 그대로 오시리라.' 그러니 시시한 이야기는 믿지 말 것입니다. 본 그대로 오시겠다고 하셨는데 쓸데없는 이야기가 무에 그리 많습니까? 추상적인 이야기거나 환상적인 이야기라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 '본 그대로 오시리라'-재림의 역사성, 그 구체적인 사실에 대해서, 약속에 대하여 우리는 현실적으로 믿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승천사건은 이렇듯 중요한 것입니다.

본문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승천사건은 인격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직접 눈과 눈이 마주친 것입니다. 실제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꿈꾼 이야기는 더군다나 아닙니다. 감람산에 올라가서 인격과 인격이 마주보는 것입니다. 그런 순간입니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사건이요, 가시적(watchable)인 사건입니다. 또한 특별히, 이 승천사건은 누가 혼자서 본 것이 아닙니다. 복수의 제자들이 다 함께 본 사건입니다. 뿐만아니라 영광스러운 사건입니다.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영광스럽게 하늘로 들리어 올라가십니다.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각할수록 너무나도 신비스럽습니다. 이 사건을 놓고 신심 깊은 기독교인 과학자들은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승천사건이 지금은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아서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만 머지않아서 이 사건도 충분히 자연과학적 입장에서 설명할 수 있을 때가 올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그 말을 믿고 싶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조금도 비과학적인 이야기가 아닌 것을 알 때가 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께서 앉은뱅이에게 '일어나라'하시는 한마디로 그 병을 고치시는 이적을 두고도 신기하게 생각합니다마는, 이것도 얼마든지 설명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시고 영광스럽게 하늘로 올리워 가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인격적으로, 가시적으로 경험한 영광스러운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있을 예수님의 재림 역시 인격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가시적이고 영광스러운 사건일 것입니다. '본 그대로 오시리라'-너희들이 본 그대로 역사적으로 현실적으로 개개인이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다시 오시리라 하심입니다. 재림에 대한 대망은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왔습니다. 천 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천 년같이 주님 오실 날을 간절히 기다려왔습니다. 철저하게 재림 신앙에 중심을 두어왔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서로 만나서 인사를 할 때에도 '마라나타'라고 했습니다. '마라나타'는 '주님께서 곧 이제라도 오신다는 것을 잊지 말고 사십시다'라는 뜻입니다.

언젠가 미국에 갔을 때에 척 스미스(Chuck Smith)목사님을 찾아가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우리 교회에도 한번 다녀가신 바 있습니다. 미국에 갔을 때에 그분에게 전화를 걸어서 '목사님, 새로 예배당을 지으셨다면서요? 한번 구경하러 갔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잘 찾아 오실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시더군요. '주소만 알면 직접 차를 몰고 찾아갈 테니 주소를 가르쳐주세요'하는 제에게 '잘못 찾으면 놓치고 맙니다. 교회가 교회 같지 않아서요'하시는 것입니다. 교회 같지 않아서 놓칠 것이라니, 대체 무슨 소린가 싶었지만 좌우간 알았다고 하고 주소를 받아 차를 타고 떠났습니다. 미국에서 몇 년 있어본 덕에 주소만 있으면 웬만한 곳은 찾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 말대로 정말 그냥 지나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래도 교회이니까 종탑은 보일 줄 알았거든요. 이만 명이나 모이는 교회이니 좀 큰 건물을 쓰고 있겠다 싶어서 찾아가 보면 아닙니다. 번지가 틀립니다. 그냥 지나쳐버린 것입니다. 두 번이나 왔다갔다 헤매다가 겨우 찾아냈는데 그분 말대로 아니나다를까 예배당 같지 않습니다. 꼭 서커스 천막 같아요. 서커스 천막처럼 사람만 많이 앉게 나무로 대충 간단하게 지어놓았습니다. 종탑이라는 것도 조그마한 나무로 올려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꼭대기에 '갈보리 채플(Cavaly Chapel)'이라고 교회 이름을 써놓았더군요. 그리고 그 밑에다 '마라나타 커뮤니티(Maranatha Community)'라고 적어놓았습니다. '마라나타 커뮤니티'-'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공동체'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공동체가 벽돌집을 왜 짓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기다리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란하게 벽돌집 지을 것이 아니구나 싶어요. 이 세대가 지나고 다음 세대가 오면 그 세대는 또 그들 나름대로 새로 지으려고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가 예배당 근사하게 지어놓고 거기서 살라 할 것이 있겠어요? 예배당 너무 튼튼하게 지을 것이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웬만큼만 지으면 될 것입니다. 몇백 년 가는 예배당을 지으려고 하는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골동품 만들어놓으면 생명력이 없어집니다. 어쨌든 한 가지만은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교회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척 스미스 목사님은 예배당도 그런 모습으로 지었던 것입니다. 그분이 하신 말씀 가운데 인상적인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부흥되는 교회는 예배당을 2년마다 다시 지어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신도 수가 늘어나기 때문에 작아서 또 짓고, 작아서 또 짓고……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분 스스로가 2년마다 그렇게 예배당을 늘려서 지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갈보리 채플은 아주 인상적인 건물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에 가시거든 한번 찾아가 보십시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끈기있게 기다려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 지루할 수도 있고, 재림은 없나보다 하고 실망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대망사상을 에워싸고 네 가지의 중요한 학설이 나타났습니다.

첫째는, 불트마니안 라인(Bultmannian Line)입니다. 불트만 계통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신화화해버립니다. 재림이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라, 재림이라고 하는 대망적 신앙이 있다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결국은 역사적 사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앙적 사건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대중의 믿음으로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럴듯한 설명입니다마는, 문제가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미만을 받아들이고 역사성을 부인합니다. 종말론적 신앙은 다 잃어버리고 윤리만 따지고, 기독교의 사랑, 봉사, 친교, 인격…… 이런 것만을 열심히 추구하다보면 교회는 생명력을 잃고 맙니다.

두 번째는 슈바이처의 견해입니다. 그는 종말사상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슈바이처는 자신의 박사논문에서 '기독교 신앙의 근본은 재림 대망사상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는데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하며 기다리다가 실망한 것 같다'-이 말이 문제입니다. 슈바이처를 자유신학자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셋째는 실존주의자 다드(Dodd, C.H.)의 '인식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입니다. '실현된 종말론'이라고도 합니다. 이 견해 역시 문제가 있습니다. 다드는 재림이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과 동시에 이미 실현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오셨는데 무식한 사람들이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과 오순절사건 속에 이미 오셨다고 인식합니다. 이렇듯 그들은 대망사상을 다른 의미로 승화시켜서 이해하게 되었기에 이천 년 동안 이 신앙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고, 대강 이같이 설명하는 소위 실존주의적 견해입니다. 더 길게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네 번째는 이스라엘의 영향을 받은 쿨만(Cullmann, Oscar)의 견해입니다. 쿨만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Already not Yet'-이미 오셨으나 아직 오시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오셨고 성령으로 오셨다, 그러나 앞에 있을 역사적 재림은 따로 있는 것이다. 이미 오신 그리스도께 대하여 저들은 충분히 받아들였기에, 그 약속을 믿었기에 먼 앞에 있을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 지루하지 않았다, 그래서 교회가 생명력을 이어온 것이다-이렇게 설명합니다. 너무 어려운 이야기입니다마는 그래도 이해하려는 자세로 들어주십시오. 결론이 중요합니다. 초대교회 시절부터 지금까지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는 말씀대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이천 년, 아니 삼천 년이라도 좋습니다. 그 약속을 믿었기에 죽는 순간까지 기다립니다. 믿으면서 기다리다 죽고, 믿으면서 기다리다 죽고 하면서 지금까지 이천 년을 이어왔습니다. 사람에게는 지루하고 힘겨운 시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천 년이 하루와 같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종말론을 보십시다.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신 이같은 말씀을 읽으면서 조금도 마음졸이지 말고 기다리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시절에는 예수님의 재림이 금방 있을 것이라고 여겨서 일도 안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금방 오실 텐데 일은 해서 무엇하나, 먹을 것이 없으면 남의 집에 가서 얻어먹지, 남은 것 많은데 주님 오실 때까지 나누어 먹지 뭐-오죽이나 답답했으면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라고까지 말씀했겠습니까? 이런 일이 다 재림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잘못된 사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조금도 지루하게 여기지 않고 교회는 주님의 재림을 이천 년을 한결같이 기다려왔고 또 기다려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재림을 기다림에 두 가지의 경고를 주셨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먼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재림을 정치적 태도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묻자 '너희의 알 바 아니요……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재림의 문제를 세속적으로,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정치가 혼란하고 사회가 어두울 때에는 '아, 세상이 끝나는가보다'라고, 지진이 일어날 때에는 '아, 말세가 되는가보다'라고, 특별히 자기가 병들었을 때에는 '이제 세상 끝날이 왔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마는 목사님들도 보면 젊었을 때에는 재림 이야기를 잘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이 어떻고, 정의가 어떻고, 사랑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나 합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한 쉰쯤을 넘어가면 재림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시 나이가 일흔으로 넘어가게 되면 '주님께서 곧 오시려나보다, 나는 죽기 전에 재림을 맞이할는지도 몰라'하는 교역자도 있습니다. 개인적인 경험과 주님의 재림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아무튼 재림을 정치적 태도로 받아들이지 말라 하십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경고입니다.

두 번째 경고는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하심입니다.

이 말씀이 아니었다면 어리석은 우리 인간들은 아마도 날마다 하늘을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시리라 했으니까요. 그러나 분명히 그렇게 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무슨 말씀입니까? 기독교를 명상적으로 이해하지 말라 함입니다. 기독교를 단순히 정적(靜的)인 경건으로 받아들이지 말라 함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느라 흰 옷을 입고 손을 쳐들고 있는 따위의 허망한 짓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사 뒷전에 제쳐놓고 금식이나 철야나 하면서 망연히 기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할 일은 손놓은 채 정적인 경건으로 명상이나 하며 기다리는 식의 대망사상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나가서 전파하라 하십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모든 사람으로 믿게 하라, 그래서 구원받게 하라 하심입니다. 재림을 기다리는 자세는 가만히 있는 자세가 아니라 일하는 자세입니다. 노는 자세가 아닙니다. 멍청하게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세상이 얼마나 남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개인적으로는 살 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건강은 얼마나 남았습니까? 기억력은 얼마나 남았습니까? 기억력도 나이가 들수록 자꾸 없어집니다. 하루에 이십오만 개씩의 세포가 없어진다고 합니다. 세포가 줄줄이 죽어갑니다. 그러니 기억력 좋고 총명 있을 때에 주님의 일을 할 것입니다. 언젠가 여러 목사님을 모시고 차를 대접한 일이 있습니다. 모두들 차를 다 드셨는데, 나이가 많으신 한 목사님이 그 새 잊어버리고 '왜 나는 커피를 안 줍니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잔 더 드릴가요?'했더니 '마셨다며?' 하십니다. 이 정도면 다 산 것입니다. 더는 일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무슨 일을 하겠어요? 그러니 여러분도 더 늙기 전에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일할 수 있을 때에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다리에 힘이 있고, 머리에 총명이 있고 기억력이 남아 있을 때에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젊은사람들은 열심히 공부할 것입니다. 공부도 돋보기 쓸 즈음이면 해봐야 헛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때부터 재림하실 때까지의 기간을 신학적 용어로 '인케림'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중간기간입니다. 이 기간은 사명기간이요 교회기간이요 성령기간이요 선교기간입니다. 일하는 기간입니다. 이 기간에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승천에서 재림까지, 이것이 교회입니다. 주님께서는 교회를 통해서 역사 하십니다. 성령으로 역사 하시고 말씀으로 역사 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함께 역사 하시겠다 하심입니다. 그저 너희는 본 그대로 열심히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말씀하심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는 '본다'라는 말씀이 자그마치 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강조되어 쓰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몇 사람만이 본 일이요, 게다가 제한된 공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재림은 우주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온 세계가 일시에 볼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주님의 재림을 다같이 맞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자는 영생과 기쁨과 행복으로 맞게 될 것이요, 주님을 거역한 자는 심판으로 맞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다시 한번 스스로의 경건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루라도 내게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전도할 수 있다는 것이요, 주님께서 하루라도 더디 오시는 것은 한 사람이라도 더 믿게 하려 하심이라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더디 오신다고 안달할 것이 아니라, 감사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케림'을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에 바쳐야 할 것입니다.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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