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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을 견뎌라 (계 02: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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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들을 보면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말씀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신데, 각 교회마다 그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기 서머나 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은 처음이요 나중이시며,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각 교회가 처한 상황이나 또는 그 교회에 필요한 메시지를 위해 주님의 모습이 다르게 소개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 각 성도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엊그제 홈그룹 모임에서 우리가 평소에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 보았었는데,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모습에 따라, 또 우리가 주님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충성스럽게 잘 수행하고 있는 중이라면, 인자하고 부드러운 모습의 하나님을 기대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또 만일 우리가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다면, 주님은 치유하시는 분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제가 이번 학기에 MTC에서 몇 과목 수업을 받고 있는데, 어떤 과목은 숙제를 제 때에 잘해서 냈고 또 점수도 잘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과목은 숙제를 아예 내지도 못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숙제를 내서 점수를 잘 받은 과목 선생님은 떳떳하고 기쁜 마음으로 만날 수 있는데, 숙제 안낸 과목 선생님을 만나는 것은 아주 거북해요. 그래서 그 선생님이 저쪽에 오는 것이 보이면 마주치지 않으려고 슬쩍 피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대할 때 어떤 마음으로 대하는지 모르겠어요. 또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계십니까?

저는 오늘 서머나 교회에게 주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라고 소개되고 있는 사실에 주목을 하고 싶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라는 사실이 서머나 교회에 무슨 의미가 있는 말일까요? 서머나는 현재 터키의 이즈밀입니다. 인구 600만의 대도시이지요. 서머나는 에베소 바로 위쪽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아시아 지방의 수도였던 에베소로부터 이 서머나에 복음이 전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곱 교회 중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지 않은 두 교회 중 하나이지요.

복음이라는 말은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기쁜 소식인 복음에 반드시 포함되어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고난이에요. 고난이 무슨 기쁜 소식입니까? 슬픈 소식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가져다 주신 방법이 바로 고난을 통해서였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극한 고통 가운데서 죽음을 맛보아야 했던 고난을 주님은 겪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고난을 당한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초대교회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곧 고난의 삶을 살기로 작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아야 했으니까요. 도망을 가야 했고, 지하에 굴을 파고 들어가 숨어살아야 했습니다. 칼로 죽임을 당하기도 했고, 주님처럼 십자가에 달리거나 또는 무자비하게 사자의 먹이가 되는 일까지 각오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복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고난과 복음은 두 가지 중에 하나만 선택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존재한 것이 아니라 하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아들같은 디모데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고 말했습니다.

고난이 포함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 복음은 포기할 수 없는 지고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떠한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은 고난과 죽음을 초월하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정복하는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고통과 조롱을 당했을망정 하늘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서머나 교회에 죽으셨던 분으로, 즉 온갖 고난을 당하셨던 분으로 우리 주님이 소개되고 있는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게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신 분으로 우리 주님이 소개되는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당시 서머나 교회는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고 있었거나, 혹은 그러한 고난이 임박해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안다.' 우리가 극심한 고통 중에 있을 때면,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잊어버리셨거나, 혹은 우리를 돌아보지 않으시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도대체 하나님, 뭐하시는 겁니까?' 이런 불평이 나오지요. 다윗은 고통 중에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시 44:23-24).

그러나 우리 주님은 '내가 너의 궁핍과 환란을 다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고난을 아신다는 것은 그저 그 사실을 인정하신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히 4:15)라고 주님을 소개합니다. 그분 자신이 온갖 고난을 직접 체험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안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 우리처럼 자동차를 타고 편안하게 여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갈릴리와 사마리아, 유대의 여러 동네들을 먼지를 뒤집어쓰시며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서 여행하셨습니다. 우리처럼 푹신푹신한 침대에서 주무신 것이 아니라,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되는 대로, 닥치는 대로, 때로는 산에서, 때로는 호수를 건너는 배에서, 아무데서나 그렇게 주무셔야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과 심지어는 가족들로부터도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는 고통도 겪으셨고, 사랑을 쏟았던 제자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고통도 당하셨지요. 주리시고 목마르시며 피곤하셨습니다. 우리의 연악함을 체휼하신 분입니다.

제가 아프리카에 있을 때 하루는 심한 허리 통증으로 새벽에 잠을 깬 적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아픈지 정말 허리가 부러진 줄 알았어요. 그래서 그 와중에 허리를 움직여보았더니 작동은 제대로 하더군요. 부러진 것은 아닌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렇지만 얼마나 아픈지 진통제를 먹어도 소용이 없고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어요. 누워도 아프고 엎드려도 아프고 앉을 수도 없고 서 있을 수도 없어요. 거기에 무슨 119가 있습니까? 어디 응급실이 있습니까? 집에 전화도 없었는데. 나중에는 아픈 건 둘째치고 왜 아픈지나 알아야 덜 억울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니까 통증이 가라앉았습니다. 나중에 의사에게 말했더니 담석증이라더군요. 담석증에 걸리면 그렇게 아프다더니 바로 이것이었구나. 제가 다른 건 몰라도 담석증에 걸려 고생하시는 분들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아파 보았으니까요. 우리 주님께서 담석증에 걸리셨던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러나 주님이 우리와 같은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살아 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육체 가운데 겪는 고통을 아시고 불쌍히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중에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고통을 겪는 분들이 많이 계시더군요. 또 체력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들게 일하시는 분들도 많아요. 여러분의 고통을 아시는 주님께서 그 고통 가운데 함께 계시며 함께 아파하고 계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위로를 받으십시오. 당장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아서, 다윗처럼 '주님, 그만 주무시고 일어나 나 좀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외치고 싶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고통을 안다.'

서머나 교회는 주님이 알아주실 만큼 큰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더 크고 심한 고난이 닥칠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고난을 위로하고 어떠한 환란에도 대처할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해서 주님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로 서머나 교회에 자신을 소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서머나 교회가 당했던 고난과 거기에 대처했던 그들의 믿음은 지금도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에 폴리캅이라는 감독이 있었습니다. 이 폴리캅은 사도 요한의 제자입니다. 이분의 인격과 믿음은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도 성자로 추앙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교회에 큰 박해가 닥쳤을 때 이 노감독을 살리기 위해 주위에서 피신할 것을 강력하게 권유했습니다. 그 권유를 따라 피신을 했던 폴리캅은 마음을 돌이켜 다시 돌아왔습니다. 어쩌면 요한계시록의 이 말씀을 기억했는지 모르지요.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돌아온 그는 물론 당장 체포되었습니다. 폴리캅을 체포해서 호송하던 장교가 그를 살리기 위해 길에서 얼마나 설득을 했다고 합니다. 딱 한번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부인을 하라는 것입니다. 마침내 폴리캅이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죄목은 오직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총독이 말합니다. '황제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불경함을 그치라.' 그러자 폴리캅이 원형극장을 가득 메운 군중을 향해서 외쳤습니다. '여러분이야말로 불경함을 그치시오!' 총독이 다시 말합니다. '내가 당장 너를 석방하겠다. 그리스도를 저주하기만 해라.'

폴리캅이 총독에게 대답합니다. '86년 동안 나는 그분의 종이었습니다. 그동안 그분은 나에게 한번도 섭섭하게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왕을 모독할 수 있단 말이오?' 화가 난 총독이 소리를 칩니다. '너를 맹수 우리에 던져 넣어도 마음을 바꾸지 않겠느냐?' '맹수들을 불러오시오. 어찌 좋은 것에서 나쁜 것으로 마음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야말로 잔혹함에서 정의로운 재판으로 마음을 바꾸시오.' '네가 정 마음을 바꿀 수 없다면 불에 태워 죽이겠다.' 폴리캅이 대답합니다. '당신이 나를 태우겠다고 하는 불은 잠깐 타다가 꺼지지만, 당신이 알지 못하는 불이 있는데, 그 영원한 심판의 불이 지금 불경건한 자들을 위해서 준비되어 있습니다. 뭘 망설이시오? 당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하시오.' 마침내 재판정의 관리가 군중을 향해 세 번 외칩니다. '폴리캅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백했다.' 그러자 군중이 폴리캅을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여야 한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장작더미 위에서 폴리캅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여, 보잘것없는 이 종을 오늘 이렇게 순교자의 반열에 들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잔을 마시게 하시고, 몸과 영혼이 성령의 선물인 영생을 얻는 부활에 참여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 순간 폴리캅의 몸은 화염에 휩싸여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폴리캅은 첫 번째 사망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말씀하신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서머나 교회에 대한 그 위로와 격려가 폴리캅 같은 위대한 믿음을 낳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는 죄로 사자에게 던져지거나 불에 태워지지 않습니다. 그런 고난이 닥치면 순교함으로써 믿음을 내보일텐데 그런 기회가 우리에게는 주어지지 않고 있다고 애석해 하실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하는 고난은 꼭 박해의 형태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임을 포기하고 적당하게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면 복음과 함께 받는 고난을 겪을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하고,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우선순위에 둔 삶을 영위하려 할 때 여러 종류의 환란과 궁핍이 우리에게 닥칠 것입니다. 경제적인 고난이나 인간관계에 관한 어려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을 따라 행동하려 할 때 예상되는 어려움들, 심지어 나 자신의 정욕을 무기로 삼아 공격해 들어오는 사탄과의 싸움, 이러한 모든 것이 복음 때문에 겪는 고난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고난 앞에 굴복하지 않고 인내하며 싸울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고 있다.'

폴리캅은 86년 동안 주님이 한번도 그를 섭섭하게 하신 적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살아오는 동안 주님이 여러분을 섭섭하게 한 적이 있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주님을 섭섭하게 해 드리고 실망시켰습니까? 여러분이 살아가는 동안 그리스도를 부인하라고 요구하는 것들은 무엇이던가요? 가족이었습니까? 혹은 친구들이었습니까? 아니면 돈이었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욕망이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하지는 않던가요? 이런 저런 작은 고난 앞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포기한 적은 없었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고난당하는 성도를 위로하시는 주님, 다가오는 고난에 대비하도록 우리를 격려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이 구원의 복음으로 인하여 고난도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큰 믿음을 소유한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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