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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이사께 호소하노라 (행 2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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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사께 호소하노라(사도행전 25:1-12)

베스도가 도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 새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보내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러라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미구에 떠나갈 것을 말하고 또 가로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송사하라 하니라……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바울이 가로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에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사죄를 범하였으면 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의 나를 송사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누구든지 나를 그들에게 내어줄 수 없삽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호소하노라 한대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가로되 네가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이미 우리가 공부해서 이해하고 있는 바와 같이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 총독이 있는 가이사랴 감옥에 무려 2년 동안이나 갇혀 있습니다.
그것은 벨릭스라고 하는 총독이 아주 애매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유대사람들에게는 아주 악한 사람이요, 정치적으로는 대단히 욕망이 많고 간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아무 죄가 없는 줄을 알면서도 재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렇게든 저렇게든 결정도 하지 못한 채 2년 동안이나 가이사랴에 머물러 있게 합니다. 생각하면 이처럼 헛되고 무모한 일이 있을까 싶습니다. 정말로 신앙적인 인내가 없이는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저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 2년을 허송세월, 답답하고 괴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만을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저는 종종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바울이 2년 동안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야말로 한시도 쉬지 않고,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를 가든 그 많은 핍박 속에서도 열심히 복음을 전하던 사람이 이렇듯 무력하게 감옥에 처박혀있었으니 얼마나 괴롭고 답답했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빌립보서 1장 12절을 이와 연계해서 생각합니다.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나의 당한 일이'-그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면서 이 말씀을 했겠습니까? 그리고 사도바울은 정정당당한 자유인의 몸이 아니고 쇠고랑을 찬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갑니다. 본래 이렇게 바랐던 게 아닙니다. 왜 이런 일이 있어야하는지 도대체 알 수 없어요. 그렇듯 뜻도 이유도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감옥에 가서야 비로소 압니다. 그가 체포된 약3년 후에 말입니다. 그 3년이라는 세월 동안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는 헛된 고난, 역경, 수모, 억울함…… 많은 고생을 했어요. 그리고 나서 그는 하나님의 오묘한 신비를 깨닫습니다. 오묘한 경륜을 깨닫습니다.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했는지, 그것을 이제 하나하나 알 것 같습니다. 나의 당한 일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깨닫습니다. 또 이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알립니다. '너희가 그것을 알기를 원하노라'-이 얼마나 중요한 고백입니까?
우리도 그렇습니다. 때때로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 모를 때가 있어요. 억울하고, 분하고, 답답하고, 괴롭습니다. 물론 상당 부분 우리의 잘못이 있지요. 그러나 도대체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 때문인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러다가 얼마 후에, 3년 후에 혹은 10년 후에, 아니면 그보다도 먼 훗날에 깨닫습니다. 그리고 나서 돌아보면 하나도 버릴 것이 없어요. 이건 이대로, 저건 저대로 다 소용이 있었어요. 나는 몰랐지만 하나님께는 경륜이 계시고 뜻이 계셨어요. 모순 가운데도 의미가 있었어요-이것을 시간 시간 간증하며 사는 것이 참 믿음의 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벨릭스 총독이 로마로 송환됩니다. 이스라엘사람들에게 너무도 악하게 대한 그였기에 여론이 좋지 않았습니다. 역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많은 유대사람들이 진정서를 냈다고 합니다. '벨릭스가 총독으로 있는 한 로마와 우리 유대사람들이 좋은 관계가 될 수 없노라'하고 점점 더 원성이 높아집니다. 끝없는 원한만 생깁니다. 그래 로마에 있는 가이사(황제)가 벨릭스를 소환합니다. 그 대신 베스도라고 하는 사람을 후임 총독으로 보내게 됩니다.
자, 베스도가 새로이 가이사랴 총독으로 부임했습니다. 베스도에 관해서 우리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역사가들이나 특별히 요세푸스의 록에 의하면 베스도는 정직하고 의롭고 아주 곧은 사람이라고만 간단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벨릭스가 유대사람들에게 악하게 굴어서 로마황제와 유대사람의 관계가 아주 불편하게 된 지금에 총독을 보내는 것이니까 아마도 로마는 유화정책을 썼을 것입니다. 그래 가장온건파에 속하는 사람, 지혜가 있는 사람을 보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베스도 총독은 부임한 지 2년 후에 건강이 좋지 않아서 세상을 떠납니다. 총 2년밖에는 총독 자리에 있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그는 좀 유약했지만, 그러면서 정직하고 온유한 사람이었다고 평가받고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베스도의 그런 모습을 한번 봅시다. 그는 가이사랴에 부임한 지 바로 3일 후에 예루살렘을 방문합니다. 이것만 보아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군사력으로, 군의 힘을 빌어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총독입니다. 이렇게까지 서두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총독으로 부임한 지 사흘 후에 친히 예루살렘을 방문합니다. 그만큼 예루살렘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얘기지요. 또한 총독은 언제나 군사와 함께 다니는데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곳의 사람들은 피지배자요 약소민족입니다. 그 땅은 식민지입니다. 식민지를 다스리는 총독이 마음놓고 함부로 다닐 수는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암살자가 나올지 모르는, 어디에 반란자가 있을지 모르는 곳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어디로든 한번 행차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스도는 부임한 지 사흘 후에 이렇다할 군사도 수행하지 않은 채 스스로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입니다. 그만큼 그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에 와서는 유대사람들의 최고회의인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들과 장로들을 만납니다. 지금 아주 악화된 로마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개선하여 우호관계로 이끌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 의도를 우리는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이러고 보니 총독은 우선 유대 지도자들의 소원을, 적어도 첫 소원은 들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이 같은 정치적 복선이 깔려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첫 번째로 내놓는 것인즉슨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재판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 말씀하는 대로, 그실 재판하자는 게 아니라 바울을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오는 도중에 암살해버리고자 하는 음모였던 것입니다. 자, 이러고 보면 유대사람들은 참 나쁜 사람들입니다. 보세요. 그를 죽이고자 한 것이 벌써 2년 전 얘기입니다. 그쯤 됐으면 잊어 버릴 만도 한데 아직도 원한을 품고 바울을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참 지독한 사람들이요, 악한 사람들입니다. 베스도 총독이 예루살렘에 와서 처음으로 지도자들을 만나면서 좋은 관계를 세우려고 하는 그 때에 바울의 일을 첫 번째로 내놓은 것입니다. 이 기회를, 베스도의 호의를 악으로 이용하려 한 것입니다. 베스도의 입장에서는 적어도 첫 번째 요구 사항만은 무조건 들어주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래야 관계가 개선될 것 아니겠습니까? 저들은 바로 이 좋은 기회를, 이 좋은 마음을 악하게 이용해서 바울을 죽여버리려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암살 계획인 것입니다.
참으로 지독하고 악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베스도는 지혜로웠습니다.
벌써 이 사실을 다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아니다, 필요하면 내가 가이사랴에서 다시 재판을 할 것이니 너희들이 와서 고소하기 바란다'하고 처사합니다. 이는 대단한 용기요, 대단한 지혜라 하겠습니다.
자, 이렇게 하여 바울을 재판하는 예기가 오늘의 본문 7절과 8절에 나타납니다. 여기에 보면 베스도가 8일 후에 저들이 있는 가운데 재판을 엽니다.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송사 하되 능히 증명하지 못한지라'-이래서 죄인입니다, 저래서 죄인입니다, 하고 송사 했지만 저들이 아무리 말해보았자 죄다운 죄가 없었더라는 얘기입니다. 이렇다할 증거를 댈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결국 이 재판의 결론은 바울이 말씀한대로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입니다. 이렇듯 저들은 바울의 죄를 찾지 못합니다. 바울을 정죄할 꼬투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의 중요한 대목이 여기에 있습니다.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저들에게 마음이 돌아간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재판하는 사람이라면 오직 이 사람이 죄인인지 아닌지 그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유대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그 마음을 얻으려고 저들에게 신경을 써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잘못된 것입니다. 이 사람이 죄인이냐 의인이냐, 죄가 있느냐 없느냐, 이 사실만 생각해야 하는데 '이 사람을 재판하면 내가 어떻게 될까, 내 지위가 어떻게 될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향해서 뭐라고 할까……'하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벌써 구부러지는 것입니다.
좀 우스운 예기입니다만 언젠가 제가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의사선생님이 아내와 더불어 얘기를 하는데 아내가 자꾸 남편보고쓸 데가 있으니 돈을 달라고 조릅니다. 남편이 돈이 없다고 하니까 부인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또 한 사람 째면 되잖아?' 제가 듣기에 좀 이상하다 싶어 다음에 그 의사선생님을 붙들고 물어보았습니다. '정말 돈 벌려고 수술하는 거요?' 그랬더니 솔직하게 고백하기를, 가끔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참 어려울 때가 있다고, 자기도 아리송할 때가 있대요.
예컨대 맹장 수술의 경우, 우선은 약물로 치료해도 될 때가 있답니다 그러니까 쨀 수도 있고 안쨀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수술해서 나쁠 것도 없어요. 자, 이런 때에 자기도 고치려고 째는지, 돈벌려고 째는지 아리송하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겠어요? 의사가 남의 배를 째는 것은 어디까지나 병을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것 째면 내가 얼마 받는다'라는 쪽으로 생각이 돌아가면 큰일이지요.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무엇을 가르친다고 합시다.
그럴 때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가르쳐야 하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함으로써 내게 돌아오는 이득이 무엇이냐……'하고 생각한다면 이미 진리는 무너지고 사랑도 무너지고 의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재판하는 사람은 오로지 이 사람이 의인이냐 아니냐, 죄가 있느냐 없느냐, 그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9절)'-그 마음 얻어서 무엇하자는 것입니까? 자기위치를 확고히 지키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치적 욕망이나 정치적 수단,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냉정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일에서 '이 일이 정말로 하나님 위한 것이냐, 정말로 진리를 위함이냐'-이것만이 우리의 문제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니, 사도 바울은 이 모든 상황을 보면서 이제는 안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들 앞에서는 도저히 정의를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가이사께 호소하노라(11절)' 합니다.
'난 예루살렘에 안가겠소. 뿐만 아니라 여기서도 재판 받지 않겠소. 로마로 가겠소. 난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오. 그곳에서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소'라는 것입니다. 유대사람들이 있는 이곳에서는 안되겠다 함입니다. 어떻게든 저들이 없는 로마에 가서 재판 받을 생각입니다. 이리하여 그는 로마 가이사 황제에게 호소하게 됩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 11절에 심각한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사죄를 범하였으면 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의 나를 송사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누구든지 나를 그들에게 내어줄 수 없삽나이다'-아주 담대하고 똑바른 태도입니다.
'내가 옳으냐 그르냐, 내가 죄인이냐 아니냐, 이것만 판단하시오. 만일에 내가 죄가 없다면 나를 저들에게 내줄 수 없소. 누구도 그럴 수 없소'-이것은 법 위에 양심이 있고, 양심 위에 하나님의 뜻이 계심을 말씀함입니다. 그래서 '죄인이면 죽어야 하겠으나 만약 죄가 없다면 누구도 나를 저들에게 내줄 수 없다'라고 담대하게 말씀함입니다.
헨리 피쳐라고 하는 목사님이 인디애나폴리스의 어느 교회에 새로 부임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아하니 그 마을 사람들의 윤리 의식과 생활이 아주 엉망인 것입니다. 심지어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까지도 그저 시간만 있으면 술과 도박을 즐깁니다. 마을사람 전부가 아예 술과 도박에 찌들었습니다. 목사님은 곧바로 엄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술도 안되고 담배도, 도박도 안됩니다. 이것들은 다 죄악입니다'하며 도박과 술의 죄악성을 시간시간 설교했습니다. 교인들은 이에 감동이 되어 술도 도박도 끊고 정결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마을사람들이 차츰 달라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이 설교하고 있는데 술집 주인이 들어와 총을 들이대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로 마을사람들이 달라지고 자연히 술을 못 팔아먹으니까 교인들 앞에서 목사님을 협박합니다. '설교를 고쳐라. 술이 왜 나쁘고 도박이 왜 나쁘냐? 계속 이렇게 설교하면 죽여버리겠다.' 그 때에 피쳐 목사는 서슴지 않고 '나를 쏘시오'하고 태연하게 나섰습니다. 결국 술집 주인은 총을 쏘지도 못 했을 뿐더러 이 일로 인해서 그 교회와 그 마을이 완전히 새로워졌다고 해요.
참으로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긴 용기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당당하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저들에게 내어줄 수 없다, 나는 로마에 상소하리라-바울이 이렇게까지 생각한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좀더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순교자 혹은 순교사를 연구해보면, 이 순교라는 문제가 아주 미묘하다고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그실 순수한 목적으로 순교한 것 같은데 때때로 정치적으로 설명될 때도 있고, 아무튼 순교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정말로 참 순교자는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가만히 보세요. 분명히 신앙적 사건인데도 이것을 정치화해서 정치적 문제로 다루게 됩니다. 순수한 신앙의 이유로 순교하는 게 아니라 정치적 이유로 죽게 되면 순교라고 볼 수 없어요. 그래서 순수한 순교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순교의 두 번째 문제는 무지와 무모입니다. 모르고, 무지해서 어떻게 어떻게 끌려가다가 빠져 나올 수도 없고, 그냥 그대로 죽게 되는 것, 이 역시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리차드 김이 쓴「순교자」라고 하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책은 소설일 뿐, 역사를 기록한 것은 아니라고 제가 직접 작가에게 들었습니다. 그 내용은 어떤고 하니, 예수 믿는 사람들과 다니던 어느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그들이 순교하게 될 때에 같이 끌려가서 죽게 됩니다. 이 사람은 자기는 안 죽으려고 '아닙니다, 나는 예수 믿지 않아요'하고 발버둥칩니다. 하지만 누가 그것을 인정합니까? 그대로 그는 죽임을 당합니다. 순교할 때에 이런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말려 들어가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렇게 무지하고 또 무모하게 죽임을 당했을 때, 피할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죽임을 당했을 때에는 순교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유대사람들이 바울을 암살하려고 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이송될 때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여버리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베스도 총독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 암살 당하는 것은 순교성이 희박합니다. 정말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 죽으려거든 똑바로 많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며 스데반처럼 죽어야지, 이송될 때 암살 당하면 그게 순교인지 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아시겠지만.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은 암살 당하는 따위의 순교를 하고 싶지 않았어요. 죽고 살고는 개의치 않아요. 그러나 암살 당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로마로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사건을 가만히 보세요. 예수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참으로 여러 번 죽을 뻔했지요. 하지만 그 때마다 예수님께서 피하셨습니다. 왜 비겁하게 피했나 하겠지만 그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입니다. 암살 당해서 만인의 구주가 될 수는 없어요.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당당하게 공개적으로 죽어야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를 굳게 결심하신 예수님께서는 벌써 십자가가 앞에 있는 것 다 아시고 이를 여러 번 예고하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예루살렘으로, 골고다언덕까지 가십니다. 다 알고 가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몰라서, 어쩌다가 그만 죽는 것은 순교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자신이 무능하여 피하고 피하다가 이제 더는 피할 수 없어서, 도피하지 못해서 죽었다면 그것도 순교가 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어느 순간에라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죽어야 순교입니다. 순교하는 그 시간에'아이구 내 팔자야'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혹은 나를 죽이는 사람들을 노려보면서 '이놈들 두고보자'하고 저주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도 순교가 아닙니다. 순교자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또 자기를 죽이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스데반처럼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순교입니다. 능력이 없어서, 피치 못해서 불가피하게 죽는 것은 순교라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고난을 당해도 그렇습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고난이란, 당당하게 알고 확실하게 당해야지, 무지하고 무능해서 당하고, 억울하게, 분하게 당한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고난답지 못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의 시간의 문제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참 엄숙한 것이 아닙니까? 누구에게나 이것이 기도 제목이예요. 죽는 것도 근사하게 죽어야 하겠더라고요. 죽는 것도 잘 죽어야지 잘못 죽으면 안되겠습니다. 내죽음의 장소와 시간과 장면이 아주 엄숙한 하나의 작품으로 되어야 합니다. 오래 전 일입니다. 한 성직자가 죽었어요. 그런데 어디서 죽었는고 하니 하필이면 창녀 집에서였어요. 그래가지고 「TIME」지에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죽는 장소도 제대로 택하여 죽어야지요. 시간, 장소…… 다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곧 양을 잡는 날을 선택하셨습니다. 유월절은 이제 양으로 오신 주님께서 죽으신 시간입니다. 장소는 예루살렘,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골고다 언덕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만민을 대신해서 장엄하게 제물로 바쳐진 것입니다.
이제 한번 생각해봅시다. 바울은 어떻습니까? 그 역시 여러 번 죽을 뻔했었는데, 이제 아무래도 안되겠다 하던 중에 로마를 선택합니다.
이방인의 사도로서 로마에서 죽으려고 합니다. 나중에 정말로 그는 로마에서 죽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우리가 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로 계속 기도할 제목입니다. '하나님이여, 나에게 이러한 죽음을 죽게 해주시옵소서'어떤 모습이어야 할지는 여러분이 알아서 기도하십시오. 자, 분명히 죽기는 죽을 것인데 어떤 모양으로 죽어야 하겠습니까? 일일이 제가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제 설명대로 못 죽는 사람은 다 잘못 죽은 것 같이 되니까 말입니다.
저는 저대로의 계획이 있습니다. 아무튼 바르게 죽어야 하겠습니다.
제가 이름은 대지 않습니다만 박 목사님이라고 하는 분을 저는 늘 기억합니다. 제가 북한에 있을 때, 그분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자전거를 타고 40리길을 가서 이렇게 말씀드렸지요. '목사님, 빨리 남한으로 피하십시오. 이제 더 계시면 위험합니다.' 배를 다 준비해놓고 부탁을 했는데도 목사님은 '안 된다. 아직 교회 문을 닫지 않았는데, 아직도 주일날이면 우리가 모일 수 있는데, 이 양들을 버리고 내가 어디로 간단 말인가'하시며 끝내 듣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버티고 계시다가 순교하셨어요. 모두들 다 이리저리 도망쳤어도 박 목사님은 끝까지 계셨습니다. 아직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이게 순교예요. 남한으로 도망하다가 총 맞아서 돌아가신 분도 있지요. 얘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바울은 지금 자기의 순교지를 로마로 선택한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 같은 모순된 현실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길이 평안하게 열린 것이 아닙니다. 정치적인 사람들의 혼탁성, 거짓 종교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 이 복잡한 상황 속에서 오직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그저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감옥에 있으면 감옥에서, 개인을 만나면 개인에게, 법정에 서면 법정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지금의 우리처럼 방송으로 전하고, 강단에서 전하고, 광장에서 전하고…… 이렇게 열려진 게 아닙니다. 심한 악조건 속에서 줄기차게 복음을 전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로마로 가겠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는 23장 11절 말씀을 마음에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네가 예루살렘에서 증거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거 하리라, 걱정 말아라, 너는 로마까지 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로마에 갈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로로 가는지 몰랐습니다. 감옥에서 나와 좀 자유롭게 가기를 바랐지요. 그러나 그 길은 2년이 지나도록 열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는 이제 자기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택합니다. 바로 죄수의 몸으로 가는 것입니다. 자유인으로 가는 게 아니라 죄수의 몸으로 쇠고랑을 차고 로마로 가는, 미상의, 미지의, 불확실한 길을 택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계시를 생각하면서 이렇게 결단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전도자의 겸손이 필요합니다. 오묘한 지혜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궁극 목적은 언제나 하나님께 있고 선교에 있습니다. 다만 그 방법을 우리는 알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모름지기 하나님의 방법을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사는 이 모순된 현실을 통하여 뜻을 이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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