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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요한 교회 (계 03: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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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요한 교회(요한계시록 3:14-22)

지난주간에 우리 교회는 교회창립 21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역사만 깊어간다고 해서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해마다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오늘은 계시록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예수님께서 일곱 교회에 보내신 편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빌라델비아 교회는 가장 칭찬을 많이 받았고, 라오디게아 교회는 가장 많이 책망을 들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가 책망을 받은 이유는 이렇습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미지근한 믿음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라오디게아교회 근처에 온천이 있었다고 하는데 제 생각에는 아마도 그 온천물이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고 미지근한 물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미지근하다는 비유를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다.'는 것은 도무지 반응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아, 이것은 내게 주시는 말씀이구나.' 하면서 회개하는 눈물이 없었습니다. 전부 '이 말씀은 아무개가 꼭 들어야 되는데 왜 하필이면 오늘따라 안나왔나.' 이런 생각을 하고 앉아있다는 말씀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듣고서는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만약 우리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하고 생각만 하지 그 사랑을 실천에 옮기려는 열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기력하고 나약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망설이다가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들이 차라리 차가운 사람이었으면 좋았겠다, 다시 말해서 저 이방인들,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소망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이처럼 미지근한 믿음을 가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말씀하기를 라오디게아 교회가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도다.' 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말씀합니다.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는 마음이 이들로 하여금 미지근한 믿음을 갖도록 한 이유입니다.
당시 라오디게아 지역은 오늘의 홍콩과 마찬가지로 상업과 경제의 중심지였습니다. 그 당시에도 수많은 은행이 있었고, 커다란 극장과 경기장, 그리고 목욕탕이 설치된 체육관이 있었습니다. 오늘과 비교해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화려한 도시였습니다.
더욱이 라오디게아에서는 의학이 발달하여 여러 가지 약을 생산했는데 그 중에서도 시력이 약한 데에 바르는 안약이 전국적으로 유명했습니다. 또한 지역의 특산물로 검은 양을 많이 키웠는데 그 털이 윤기가 나고 부드러워서 매우 인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는 그 당시에 가장 부유한 도시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한번은 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파괴된 적이 있었는데 로마정부가 보내준 복구비용을 거절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돈이 많은 부유한 도시였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이렇게 물질적으로 부유한 것 때문에 영적으로도 부유하다고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큰 교회는 예배당도 아름답게 지을 수 있습니다. 예산을 많이 세워서 학교도 세우고, 개척 교회도 하고, 선교사도 보내고, 구제도 하고, 여러 가지 사업을 펼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생각하기를 우리 교회는 돈이 많아서 이런 일들을 했고, 저 교회는 가난해서 아무 일도 한 것이 없으니까 우리가 영적으로도 더 부요한 교회라고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요한 것과 영적으로 부요한 것을 동일시하기 쉽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한국에서 교회에 다니다가 오신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제가 '한국에서 어느 교회에 다니셨습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큰 교회에 다니던 분들은 '네, 목사님도 잘 아시는 아무 교회에 다녔습니다.' 이렇게 자신 있게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네, 그냥 동네에 있는 작은 교회에 다녔습니다.' 하고는 교회 이름도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한에서는 오히려 작은 교회에 다니다가 오신 분들이 더 믿음이 있고 열심이 있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크냐 하는 것과 내 믿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다니던 교회가 얼마나 크냐, 내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은 얼마나 훌륭하고,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는 얼마나 훌륭한 일들을 많이 했는지 모른다, 이런 것하고 정작 내 믿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요한 교회가 영적으로도 부요한 것은 아닙니다. 예배당이 큰 교회가 믿음도 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물질인 부요함과 영적인 부요함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빌라델비아교회를 보십시오.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켰다.' 칭찬을 하셨습니다. 빌라델비아교회는 작고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충성되이 지키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 크기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충성되이 지키는 교회가 큰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가 부자교회이고, 부요한 교회입니다.
여러분이 보통 '내가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 이런 생각을 하는 때가 언제입니까?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은 뻔합니다. 건강과 돈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이 두 가지만 있으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건강하다고 하는 것이 실제적으로 무슨 유익을 가져다주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건강해서 하고 다닌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건강해서 팔팔 거리고 돌아다니면서 남 흉이나 보고, 건강해서 밤새워 비디오나 보고있지 않습니까?
건강해서 밤새워 철야기도 한다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앓아 누워서 성경 보는 사람은 많이 보았어도 건강해서 매일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건강하다고 하는 것이 언제 우리에게 인생을 생각하게 만들고, 영적인 문제를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습니까?
몸이 아파서 병원에 누워있는 사람하고 병 위문을 한다고 찾아 온 사람 중에, 누가 더 낫습니까? 누워있는 사람이 훨씬 더 낫습니다. 누워있는 사람 머리 곁에는 성경책이 놓여있는데 찾아간 사람 손에는 오렌지주스 깡통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환자를 향해 안됐다고 하고, 불쌍하다고 합니다. 지금 여러분 손에 지금 주스 깡통밖에는 들려있는 것이 없는데 어째서 성경책을 읽고 있는 환자보다 내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까?
또 돈이 많은 사람이 부자라고 하는 것만큼 잘못된 생각은 없습니다. 여러분 호주머니에 돈이 생기면 그 다음부터는 진실된 친구를 사귀기가 참 어렵습니다. 돈이 많아서 평생을 외롭게 사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친한 친구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두 개의 금덩어리를 발견하고는 사이좋게 하나씩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런데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한 친구가 갑자기 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가 '아니, 왜 그 아까운 것을 왜 강물에 던지느냐?' 물으니 대답하기를 '내가 이것을 얻기 전에는 너와 함께 있는 것이 그렇게 즐거웠는데, 이 금덩어리가 생기니까 내가 왜 혼자 길을 떠나지 않고 너하고 같이 떠났는가 하는 생각이 자꾸만 나서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네, 그래서 버렸다네.' 그러자 친구도 '나도 역시 그런 생각을 했다네.' 하면서 금덩어리를 강물에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의 돈이라고 하는 것이 절대로 우리를 부요하게 만들어 주지 못합니다. 돈만큼 인간을 망하게 하고, 인간의 영혼을 흐리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누군가가 밉거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저 사람에게 돈벼락을 내려 주십시오.'
여러분이 생각하는 건강과 돈, 이 두 가지가 우리를 영적으로 부요하게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잘못하면 이 두 가지 때문에 영적으로 더 가난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적으로 부요해 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본문 18절은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부요해지는 것은 세상의 금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불로 연단한 금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위해 시련을 겪은 사람만이 진정으로 부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 많은 고생을 겪었습니다. 남의 집 종살이를 하다가 또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합니다. 요셉은 10년 이상을 노예로, 죄수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는 애굽의 총리대신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통해서 7년의 풍년이 있은 후에 7년의 흉년이 다가올 것을 내다봅니다. 그래서 잘 준비를 하였다가 자기 가족들과 모든 애굽사람들을 기근에서 구원해 내었습니다.
이것이 부요한 사람입니다. 나 혼자서 세상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가난하게도 되고, 주님을 위해서 고생도 하고, 그래서 결국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주는 자가 되는 것, 이것이 진정으로 부요한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는 올해에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작년에 20주년을 맞이하면서 몇 가지 사업을 계획했는데 한 가지 미루어둔 사업이 있습니다. 바로 20주년 기념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20년 전에 우리 교회에 이곳 홍콩에 세워져서 오늘날 많은 사역을 감당하는 것처럼 우리도 빚을 갚는 심정으로 해외에 교회를 세움으로 또 하나의 역사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하나 세우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많은 노력과 예산이 들어갑니다. 생각해 보면 교회를 세우는 것보다는 우리 교회를 확장하는 것이 더 시급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을 나누어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요한 교회입니다. 내가 써야 할 것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누어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다해도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고통을 나누어지는 교회가 부요한 교회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로 연단되어 진다는 말씀입니다. 불로 연단되어지는 것을 싫어하는 교회는 칭찬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있는 교회는 결국 책망을 받게됩니다. 우리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고통을 나누어짐으로 연단을 받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 분은 일생동안 좋은 옷을 한번 입으신 적이 없고, 좋은 음식을 입에 대신 적이 없어도 누구보다 부요하게 사셨습니다. 그것은 그 분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 10절에서 '우리는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는 자로다.'하였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은 그가 전하는 복음을 통해서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든, 진정으로 부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요하다고 하는 것은,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나로 인해서 무엇을 얻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예수를 믿게 된다면 나는 부요한 사람입니다.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위로를 얻게 되고 기쁨과 소망을 갖게 된다면 나는 부요한 사람입니다. 나 때문에 내 이웃이 무엇을 얻는가를 살펴보면 내가 얼마나 부요한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정말로 부요한 사람은 내가 사는 모습을 이웃이 바라보고, 나도 당신처럼 살고싶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그 길을 이웃도 쫓아오도록 만드는 것이 부요한 사람입니다. 내 마음에 있는 평안을 보고 '나도 그 평안을 누리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리는 행복, 내가 누리는 소망을 보면서 내 이웃이 '나도 당신이 가는 그 길을 걷도록 해 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그 길을 갈 수 있습니까?' 묻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요입니다. 이 부요함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부요함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은혜를 입고 혜택을 입는 것이 아니라, 나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상처를 받고, 죽어야 한다면 우리는 분명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야만 내 것을 채울 수 있다면 그것이 가난한 것입니다. 내 자존심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의 자존심을 짓밟아야 한다면 그것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내가 잘난 것을 증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 못난 것을 광고하고 다녀야 한다면 그것이 가난한 것입니다. 내 믿음이 좋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믿음을 헐뜯고 다닌다면 그것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부요한가, 얼마나 가난한가 하는 것은 지금 바로 여러분들의 사는 모습을 점검해 보시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너는 복의 근원이 되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이고, 또 오늘 우리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모든 사람이 복을 얻는 복의 근원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축복이 너무나 커서 내 옆에 있는 사람들도 그 부스러기를 얻어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부스러기만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로 그렇게 부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 정말 좋은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는 이런 부요한 사람들이 많은 교회입니다. 미지근한 믿음이 아니라 뜨거운 열심이 있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 정금처럼 단단해지기 위해서 시련과 훈련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 내가 낮아짐으로 다른 사람이 높아지고, 내가 죽음으로 다른 사람들이 사는 것을 기뻐하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 이런 교회가 진정으로 부요한 교회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부요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 힘있게 일어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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