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만으로 충분한가 (골 01:1-2)

첨부 1


오늘은 골로새서 첫 번째 강해입니다. 예수만으로 충분한가? 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골로새(Colosse)라는 도시는 에베소(Epenetus)에서 내륙으로 160㎞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쉽게 말해서 에베소와 골로새는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도시입니다. 서울과 광명시, 구리시는 시는 다르지만 서로 경계가 붙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골로새라는 도시와 라오디게아(Laodicea)라는 도시와 히에라볼리(Hierapolis)라는 도시가 붙어 있었습니다.
이 세 도시 가운데 제일 잘사는 도시가 라오디게아였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가운데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한다고 하던 라오디게아 교회가 있던 바로 그 도시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그 다음에 나은 도시가 히에라볼리, 제일 못사는 동네가 골로새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골로새에 사도 바울이 편지를 보냅니다.

오늘은 서론적으로 골로새에 보낸 편지의 전체적인 내용을 통해서 우리에게 강조하는 중요한 것 몇 가지를 붙들어 보는 시간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1. 흘러넘치는 사역, 흘러넘치는 기도, 흘러넘치는 능력!
첫 번째! 흘러넘치는 사역이 중요합니다. 충만한 사역이 중요합니다.
골로새 교회가 시작될 수 있었던 근거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2년 동안 에베소에서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1&8228;2&8228;3차 전도여행을 떠났는데 특별히 3차 전도여행에서는 여러 군데 돌아다닌 것이 아니라 에베소에 있는 두란노 서원에 머무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사역을 했습니다.

사도행전 19장9절을 보면 그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이 두란노 서원이라는 곳에 머물러 하나님의 말씀 증거했을 때 그 사역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그 사역이 얼마나 흘러넘쳤던지 아시아에 사는 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든 사람들이 다 주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흘러넘치는 사역이었습니다.

사역이 강력하면 사역의 내용들이 흘러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릇보다 액체의 양이 많아지면 흘러넘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의 그릇보다 능력이 더 크면 흘러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삶은 짜내는 삶이 아니라 흘러넘치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짜내는 기도가 아니고 흘러넘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표현 중에 ‘넉넉히 이기느니라’, ‘충만하게 이기느니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런 사역을 해야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8절을 보니까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문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사역이 얼마나 강력했던지는 말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사역이 흘러넘쳐서 주변에 있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에까지도 넘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돌아다니면서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홍보&8228;광고 이런 식으로 자기 PR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적인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충만함만 있으면 빛을 발하게 되어 있고 내적인 강력함만 있으면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렸을 때 애굽에 내려갔다 온 것 빼 놓고는 팔레스타인 지경을 넘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향력은 세계를 품고도 남지 않습니까? 이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에스겔서 47장을 보면 이 모습을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의 환상으로 묘사합니다. 일천 척을 재어 보니까 발목에 옵니다. 일천 척을 재어 보니 무릎으로 옵니다. 또 일천 척을 재어 보니 허리까지 왔습니다. 또 일천 척을 재어 보니 헤엄할 정도의 물이 되었다고 얘기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능력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생수가 흘러나와야 합니다. 교회 안에만 채울 것이 아니라 흘러넘쳐서 그 물에 흘러가는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그 강가에 어부가 설 것이다!(에스겔 47장10절)라고 성경은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헤엄할 정도의 물이 넘쳐흐르면 영혼들을 살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사람 낚는 어부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런 흘러넘치는 생수의 능력으로 영혼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교회에게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큰 선물은 살아 있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망이 교회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생수가 터져 나오지 않으면 살 길이 없습니다. 세상 살리는 방법은 우리 안에서 터져 나오고 흘러나오는 능력입니다.
여러분들이 모여서 하나님 앞에서 흘러넘치는 기도해야 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애국하는 길이 무엇입니까! 교회가 살아있고 교회가 충만하고 교회가 기도의 능력으로 무장할 때 비로소 세상을 살릴 수 있습니다.

2. 헌신하는 모든 평신도-> 변화되는 세상
두 번째 골로새 교회는 평신도 사역의 중요성을 깨달은 교회였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두 명의 평신도에 의해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에바브라, 빌레몬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에배소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열매는 에바브라가 회심한 것, 빌레몬이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에바브라, 빌레몬, 이 양대 축에 의해서 이끌어진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바브라는 주로 말씀을 증거하는 평신도 설교자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빌레몬이 했던 일이 무엇이냐 하면…… 빌레몬은 부자였습니다. 빌레몬서를 보면 도망친 오네시모에 대해서 묘사하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빌레몬은 노예를 여럿 둘 만큼 부자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예배를 드릴 때 그의 집을 내어 주어서 골로새 교회가 거기에서 예배드렸습니다. 그러니까 골로새 교회는 따로 건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빌레몬의 집에서 모여서 예배를 드렸던 가정교회였습니다.

지난 주 주일 저녁에도 그런 말씀을 나눴지요. 가난한 것이 경건한 것은 아니라고……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면 우리가 얼마든지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것은 불편한 것입니다. 두 가지가 불편합니다. 첫째, 마음껏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둘째, 가난한 이웃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가난은 불편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적으로 부요함을 주시면 빌레몬과 같은 이런 꿈을 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서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빌레몬은 잘 쓰임 받았잖아요. 우리가 이런 빌레몬의 꿈을 꿀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빌레몬서 1장 1-2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네 집에 있는 교회! 무슨 얘기입니까? 빌레몬의 집에서 골로새 교회가 모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네 집에 있는 교회!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성경에서는 절대로 교회가 건물 개념으로 말해진 적이 없습니다. 네 집에 있는 교회, 모여 있는 성도들의 모임, 그것이 교회입니다.

여기 세 사람의 이름을 말하고 있는데 빌레몬, 또 자매된 압비아-많은 성경학자들이 빌레몬의 아내라고 얘기합니다-우리와 함께 군사된 아킵보,-아킵보는 누구냐 하면 빌레몬의 아들인데 나중에 에바브라 다음에 골로새 교회의 말씀의 사역을 맡았던 귀중한 종입니다-저는 이 빌레몬의 가정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온 가족이 헌신된 좋은 모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의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자기의 아내도 충실한 종이었습니다. 자기 아들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헌신하는 종이었습니다. 온 가족이 헌신하는 아름다운 모습, 이것이 바로 빌레몬 가정의 모습입니다.

우리 삼일교회의 모든 성도들도 이 빌레몬의 가정이 빌레몬뿐만 아니라 압비아, 아킵보 모든 사람이 헌신했듯이 우리 온 가족이 주님 앞에 헌신하는 그런 일이 이루어지는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을 하기 위해 항상 사도나 전담 사역자를 필요로 하시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휼륭한 건물이나 거대한 조직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골로새 지역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필요로 하셨던 것은 단 두 명의 평신도 사역자였습니다. 지금 식으로 얘기하면 일종의 가정교회였습니다. 진(陳)이나 팀(team)과 같은 소그룹을 통한 접근이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평신도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해야 될 일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작은 교회 운동’을 벌이는 것입니다. 작은 교회가 무엇입니까?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가지고 자기들끼리 하나님을 찬미하고 예배하는 그런 목장운동, 기도의 운동입니다. 반드시 이런 작은 교회운동이 벌어져야 합니다. 목사는 일종의 코치입니다. 성도는 뛰는 선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이 축구 때문에 흥분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히딩크라는 명장이 있다고 할지라도 실제 뛰는 것은 선수입니다.

제가 교회에 대해 이런 묘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는 두 가지 모습의 교회가 있습니다. 유람선과 같은 교회가 있고 군함 같은 교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교회의 모습은 군함 같은 교회입니다. 유람선 같은 교회는 선장과 갑판장, 선원 몇 사람만 뛰면 되는 교회입니다. 대표주자만 뛰고 나머지는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귀가 두려워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나 진짜 마귀가 두려워하는 교회는 군함 같은 교회입니다. 군함에는 타고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일을 해야 됩니다. 함장도 일을 해야 되고 기관사, 포수, 요리사…… 하다 못해 청소라도 해야 됩니다. 누구나 다 뛰는 교회, 그것이 군함 같은 교회의 모습입니다.

골로새 교회를 보십시오. 평신도 하나 예외 없이 다 뛰는 교회였습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의 모습이고 원래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삼일교회를 한마디로 얘기하면 평신도가 이끌어가는 교회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 한 진(陳)마다 우리가 관리하는 인원들이 600명 가량 됩니다. 한 사람의 진장(陳長)이 어떻게 600명을 관리합니까? 이것은 관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목자들과 간사들과 리더들이 교회를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주보 통계를 보니까 어제 토요일 리더모임에 537명의 리더들이 모여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537명의 리더들이 교회를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에바브라입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빌레몬입니다. 우리가 사역의 현장 속에서 강력하게 일하기 위해서 평신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맡은 사역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가장 강력하게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 직장과 캠퍼스, 여러분의 가정과 모임에서 여러분이 빌레몬, 에바브라 같은 역할을 감당하십니까? 그것이 바로 골로새 교회의 강점이었습니다. 우리도 골로새 교회 같이 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모든 평신도들이 다 뛸 수 있는 평신도 중심의 교회가 되는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3. 구원으로 가는 오직 한 길 그리스도!
마지막 세 번째 살필 것은 그리스도의 유일성입니다.
이 서신을 쓰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골로새 교회 당시에 영지주의자들이라는 이단들이 나타나서 교회를 어지럽혔습니다. 영지주의가 무엇입니까? 영어로 보면 Gnosticism이라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보면 0000, 여기에서 나온 단어가 knowledge입니다. 지식이라는 단어입니다. ‘알다’라는 단어!

이들은 무엇이라고 주장을 했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성경을 통해서 알아야 되는데 성경을 통해서 알아야 된다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직관을 통해서, 다른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식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지주의적인 이런 이단들은 초창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도 있고 매순간마다 교회를 넘어뜨리려는 세력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겉으로 볼 때는 경건해 보입니다. 경건해 보이고 기도도 많이 하는 것처럼 보이고 뭔가 달라 보이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복음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못 배운, 지극히 무식한 사람들, 지극히 어린 사람들도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있도록 쉽게 제시된 것입니다. 복음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유치원 꼬마로부터 시작해서 장년까지 다 모여서 같이 말씀을 듣고 같이 은혜 받고 변화 받을 수 있는 것이 복음입니다.-저는 가끔 주석에 대해서 분노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이해하기 쉽게 만들고자 쓴 것이 주석 아닙니까? 그런데 주석이 더 어렵습니다. 어려운 주석이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성경을 풀어서 쉽게 이해하도록 만들자는 것이 주석인데 어떻게 주석이 더 어렵습니까? 자꾸만 쉬운 복음을 어렵게 만드는 유혹에 빠져 버립니다.-예수님이 얼마나 쉽게 설교하셨습니까? “들에 있는 백합화를 보아라! 솔로몬보다 더 멋지게 옷 입었지?”“날아다니는 참새를 보아라, 맛있어 보이지?”그런 말씀은 안하셨나요?“참새를 바라보아라, 먹이지 않아도 굶어 죽는 참새 보았니! 그런데 왜 걱정하지? 하나님께서 너희들도 먹일 것이야. 너희들은 참새보다도 낫지 않니?” 얼마나 쉽게 설교하셨습니까. 쉬운 설교입니다. 왜 자꾸만 왜 어렵게 생각합니까?

그래서 ‘지식인들이 모이는 교회’ 그거 좋은 것 아닙니다. 지식인들이 모이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모든 죄인들이 모이는 교회’이지…… “하나님 앞에서 특수한 사람들, 우리 같은 지성인들이 드릴 수 있는 설교를 해 주십시오.” 웃기지 마십시오. 무슨 지성인?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들이 들어야 될 복음이 필요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유일성! 그것을 붙드는 설교가 필요합니다.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많은 사람이 여기에서 무너집니다. 최근 조심해서 읽어야 될 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이 도우슨이라는 사람이 지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입니다. 저는 그것을 읽어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참 기도를 많이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 묵상하고 기도했더니 잃어버린 물건을 찾았다느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느니 이런 것을 너무 강조하고 신비적인 접근을 합니다. 제가 볼 때 그 선교단체는 항상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있는데 또 신비주의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별한 길, 자기만 갈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에는 보편성이 있습니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지금도 우리에게 역사 하십니다. 이것을 붙들어야 합니다. 영지주의의 이런 접근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혼합주의로 나아갑니다. 최근에는 요가라든지 초자연적인 묵상 티엠(?)이라고 하지요. 또 하나 동양의 신비주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귀신사상 이것을 다 섞어서 혼합시켜 버립니다. 초파일에 기독교에서 부처님 오신날 축하 메시지나 보내고 이런 것이 다 무엇입니까? 불교든 뉴에이지든 좋은 것은 모든 것을 다 합치자는 것입니다. 용납하자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유일하다고 얘기하면 독선적이고 좁은 것처럼 느끼고 모든 종교의 포괄해야 된다고 하면 마치 관용적이고 세련되어 보이는 것 같이 느끼는 것! 이것은 마귀의 장난입니다. 제이스펜루이스(?)라는 사람은 핵심 없는 이 시대의 참된 방향과 목표를 제시해 주는 것이 ‘십자가’라는 구심점이라고 했습니다.

왜 교회가 이렇게 힘없이 흐트러지고 있습니까. 십자가라는 구심점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진리를 잃어버리고 막다른 골목에 헤매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십자가라는 구심점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먼저 죄를 대속키 위해서 희생의 제물이 되실 자격을 부여받았습니다. 아무나 희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희생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묘사가 무엇입니까? 고난 당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구약에서 죄를 사한다는 상징으로 썼던 것이 무엇입니까? 나의 죄 대신이 어린양을 대신 죽였습니다. 네가 죽어야 될 것을 어린양이 대신 죽습니다. 그것이 제사입니다. 그런데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모든 예수를 믿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대신 어린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린양이 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명칭이 무엇입니까? 고난 당하신 하나님의 어린양, 우리 대신 죽을 수 있는 어린양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격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격만 부여한다고 다 됩니까? 예수님은 그것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그 일을 하겠습니다.’ 라고 아담과 달리 완전한 순종을 하셨습니다. 로마서 5장19절을 보니까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누구를 향한 얘기입니까? 예수님을 향한 얘기입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서 죽으신 그 어린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격을 주셨고 예수님이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25절을 보니까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게 되는 유일한 길을 열어두셨다는 것입니다. 그것 외에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종교다원주의가 왜 나쁜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 말고 또 다른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없다고 하는데 자기는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휴머니스트로서 함석헌 씨 같은 분을 존경할 수 있습니다. 경건합니다. 깨끗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함석헌 씨가 주장하는 내용들이 엉터리입니다. 예수 외에 또 다른 길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광명한 천사를 가장한 것이지요.

또 예를 들어서 휴머니스트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으로 아프리카의 성자라고 하는 슈바이처 박사가 있습니다. 그의 삶 자체는 아름답고 멋진 삶입니다. 우리가 본받을 만한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주장과 신학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가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조롱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이스라엘 백성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말씀으로 자극했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가고 있는 마차 앞에 섰다는 것입니다. “멈춰 서, 멈춰 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다하다 역부족으로 안 되니까 어떻게 했느냐 하면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자기 몸을 집어던졌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돌아갈 때 예수의 피가 쏟아져 나오고 살점이 묻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돌 때마다 예수님의 살점을 느끼고 예수님의 피을 느끼는 것이다…… 무슨 얘기입니까? 예수님이 일종의 실패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을 부인해 버리고 자극을 위한 죽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각성케 하는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깨우치게 하는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죽음이나 전태일(全泰壹)의 죽음이나 다를 것이 하나도 없지요. 우리를 대속하는 죽음이 아니라 각성케 하는 죽음이고 깨우치는 죽음이고 자극하는 죽음이고……? 예수님의 죽음이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아무리 바른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그 주장 자체가 예수님의 주장을 비하시켜 버리고 대속의 죽음을 상쇄시키는 주장이라고 하면 엉터리입니다. 엉터리! 사도행전 4장12절을 보니까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구원 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이 세상에 주신 일이 없다고 하는데 있다고 말하면 엉터리 아닙니까?

오직 구원의 길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죄인임을 믿습니까?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나를 위해서 죽으신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확신하십니까? 그러면 삽니다. 그것이 교회에서 얘기하는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십자가의 유일성입니다.

십자가의 유일성을 부인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성경은 명확히 얘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죽음에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 죽음의 세력을 멸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메시지는 십자가와 동시에 또 하나의 축이 있는데 바로 부활입니다. 그래서 초대 기독교 신자들의 인사는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다’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도망치고 부인하던 아주 치사한 녀석들이었는데 갑자기 으르렁거리는 사자와 같이 변화되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딱 하나입니다. 부활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50일 동안 제자들을 다시 만나고 그들을 다시 양육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변화되었던 원동력, 요인이 무엇입니까? 부활입니다. 부활! 사도행전 2장32절을 보니까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사도행전의 모습들을 보면 돌아다니면서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를 살리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답니다. 우리가 증인이랍니다. 부활의 확신성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영이나 영향력으로서의 부활이 아니라 육체를 가진 몸으로 부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죽음 이후 육체를 가진 몸으로 부활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누가복음 24절39절을 보니까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만져보라고 하잖아요. “만져봐! 이거 살 아니야? 만져봐! 이거 뼈잖아!” 육체의 부활입니다. 영적으로 영향력으로 부활하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슈바이처같이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우리를 각성하는 영향력? 아닙니다. 그런 것 아닙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살을 보라는 것입니다.

뼈를 보라는 것입니다. 만져보라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식사하셨잖아요. 영이 식사할 수 있습니까? 우리나라 영은 식사하는가 보죠? 뭐 갖다 주대요? 뭘 먹습니까! 갖다붓는 거지, 술도 갖다 붓고 땅에다가 붓는 거지 영이 식사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여행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손을 보이시고 창에 맞은 옆구리 만져 보라고 했습니다. “만져 보라!” 부활의 확실성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의 육체라는 것은 우리의 지금 이 육체하고 부활 이후의 육체는 똑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문이 잠겨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통과하셨습니다. 우리 육체 같은 것은 아니지요. 빌립보서 3장21절을 보니까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아마 이것이 지금 우리의 몸과 같은 것인가 봅니다-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육체는 육체인데 변화된 육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에와 나비를 예로 들 수 있지요. 누에의 육체가 있습니다. 누에가 변화되어 나비가 되어 버립니다. 똑같은 육체입니까? 생명이라는 본질에 있어서는 누에나 나비나 같은 것입니다. 누에가 나비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성격상 똑같은 것은 아니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우리 자체의 정체성 아이덴터티를 가지고 부활합니다. 똑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같은 육체는 아닌 것 같습니다. 누에고치의 육체와 나비의 육체가 다르듯이 전혀 다른 육체로 부활하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부활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십자가의 부활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부활에 관해서 영향력이라는둥 다른 소리하면 기독교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에 대해서 두가지 태도를 취할 수 있습니다. 부활이 ‘사실’ 아니면 ‘거짓말’입니다. 사실이면 어떻게 됩니까? 믿어야 되지요. 사실인데 안 믿을 이유가 없잖아요,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부활합니다. 그런데 백보 양보해서 사실이 아니라고 합시다. 사실이 아니라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사기! 사기 친 것이지요. 부활도 안 했으면서 부활했다고 하고…… 또 하나는 착각이지요. 부활 안 했는데 했다고 착각하는 것……

일단 사기라고 해봅시다! 사기라고 하면 예수님의 열한 제자 정말 나쁜 놈들이지요. 부활도 안 했는데 사기 쳐서 우리를 이 고생하게 만들고 그렇지 않습니까? 사기꾼들입니다. 열한 명만 사기를 쳤습니까? 500명 가까운 사람이 사기 쳤습니다. 그런데 이 사기꾼은 이상한 사기꾼입니다. 입이 딱딱 맞아서 한번도 거절도 안하고 사기를 치는데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서도 사기를 치고 있습니다. 부활했다고! 어떤 사람은 목이 잘려가면서도 사기를 칩니다.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은 장가도 안가면서 사기를 칩니다. 강의 위험, 바다의 위험, 동족의 위험…… 그 많은 위협을 당해가면서 사기 칩니다. 순교하면서 사기 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러기에는 너무 이상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만약에 순교를 하면서 사기 칠 수 있다면 그 자체도 이적 아닙니까? 사기일 수 없습니다. 또 하나 착각이라고 합시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까? 한두 명이 착각했다면 말도 안 합니다. 500명 이상이 착각할 수 있습니까? 동시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착각할 수 있다고 하면 그 자체도 기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부활은 거짓일 수 없고 착각일 수 없고 사기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2장12절 이후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만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성경은 명확히 얘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만약에 진짜가 아니라고 하면 우리는 불쌍한 자라고 합니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 이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공휴일에 어디 놀러도 안 가고 아침부터 나와서 예배드리고 축구 안 보고 여기서 앉아 있고 여기 줄을 쫙 서서 밥 얻어먹고 있고 얼마나 불쌍합니까?

여러분들이 불쌍하면 저는 얼마나 불쌍합니까? 난 이것에 인생을 걸었다고!!! 부활도 안 했는데 부활했다는 것을 믿으면서 계속해서 말씀 증거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잠도 못 자면서 눈도 작아지고…… 이 얼마나 문제입니까? 성경이 얘기하잖아요.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러므로 우리 사역이 영광스러울 수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믿습니까? 죽은 다음이 끝이 아닙니다. 부활합니다. 만약 이 땅에서 모든 것이 다 끝난다고 하면 뭐하러 여기에서 이러고 있습니까? 술 먹고 담배 피고 흥겹게 놀고 다 끝내버리자고 하지요. 여기에서 끝이라면요…… 그러나 그럴 수 없습니다.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듯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었듯이 우리도 다시 부활합니다.

부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가르치시고 행하셨던 진리와 일치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상징은 아름다운 무덤이 아닙니다. 빈 무덤입니다.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셨으므로 우리도 부활합니다. 요한복음 14장19절을 보니까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살았고 너희도 다시 살아나리라 우리는 살아납니다. 부활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죽음 이후의 부활을 믿고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무덤을 박차고 나온 능력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마귀의 모든 세력을 다 깨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호흡이 있을 때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다른 인생을 살아요. 부활의 능력을 이 땅에서 체험하며 살아가는 종이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마지막 시대를 보십시오. 초대교회 골로새 교회와 마찬가지로 악한 마귀가 광명한 천사를 가장해서 헛된 소문을 퍼뜨립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효화시키려고 하고 다른 길이 있다고 하고 멋진 길이 있다고 하고 왜 독선적이라고 하고 관용하라고 합니다. 여기에 이런…… 포괄적으로 다 품는 사상이 있다고 얘기를 합니다. 악한 자의 시도입니다. 악한자의 시도! 부활이 없다고 합니다. 부활이 영향력이라고 얘기합니다. 이 땅이 전부라고 얘기합니다. 현세가 다라고 합니다. 악한 마귀의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①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유일성, ②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습니다. 이 십자가의 부활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혼을 살리는, 우리 하나님 앞에서 충만해지고 많은 사람에게 소망이 되고 생수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