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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명확한 지식은 두려움을 몰아낸다 (골 01: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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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골로새서 다섯 번째 강해입니다. ‘명확한 지식은 두려움을 몰아낸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주에도 살폈지만 골로새서의 총 주제는 ‘예수는 누구인가’입니다.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구속(Redemption)해 주시는 분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①첫째는 죄의 힘을 깬다는 의미입니다. 죄의 힘을 깨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 ②두 번째는 그 주신 자유를 누리게 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구속의 내용은 두 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죄의 힘을 끊어버리는 것과 자유를 누리는 것

그리고 두 번째로 설명하는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예수님은 창조자, 창조주이십니다.
15절을 보시면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하는 설명이 나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16절의 내용은 문제가 없는데 15절의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나신 자니” 이 말씀을 오해해서 많은 이단들 가운데 예수님의 첫 번째 피조물이라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첫 번째일 뿐이지 절대로 하나님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먼저 나신 자’라는 것은 시간적인 의미가 아니라 으뜸이라는 뜻이고 가장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이런 어법들이 성경에 여러 번 쓰이는데 예를 들어서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이 전혀 아닙니다. 다 아시지요? 첫째 아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편 89편27절을 보면 “내가 또 저로 장자를 삼고 세계 열왕의 으뜸이 되게 하며”장자로 삼는다는 것과 으뜸이 되게 한다는 것이 동의어입니다. 장자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들 중에 으뜸으로 여겨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나신 자니……’ 이 말은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계신 자니……’ 이런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만물은 예수 안에서 예수를 위하여 예수로 말미암아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창조주로 믿고 의지하는 백성들은 이 땅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될 것인가, 예수가 우리의 창조주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두려움이 없다.
첫째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두려움에서 이기게 하는 힘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라는 것을 명확히 믿는 믿음은 우리에게서 두려움을 빼앗아갑니다. 창세기를 보면 창세의 내용들이 쭉 나오는데 창세기는 우리에게 정보를 주기 보다는 하나님이 누구인가라는 것을 아는 축복이 임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실이 주는 축복을 누리게 만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으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여러분, 예수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보십시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부 두려움입니다. 미신을 믿고 점치는 사람들은 항상 두려워합니다. 이사도 아무 때나 못 가고 문턱에도 마음대로 못 올라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거대한 과학기술문명 앞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핵무기를 두려워합니다. 모든 두려움 가운데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진정한 창조주이라는 것을 믿는 백성들은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이번에 제주선교 가서도 창세기 15장의 말씀을 살폈습니다. 창세가 15장에 아브라함이 나옵니다. 조카 롯이 잡혀가니까 그돌라오매를 물리치는 전쟁을 벌이고 승리를 거둡니다. 그런데 그 승리는 얼떨결의 승리였습니다. 승리 이후 두려움에 빠집니다. 복수당하면 어떻게 하느냐, 그 다음 내 삶의 문제가 무엇이냐…… 답답함과 어려움이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와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우선 말씀으로 위로해 주시고 밖에 나가서 별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창세기 15장5절을 보니까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늘의 별을 바라보게 만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원래 이 세상에는 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넷째날 하나님께서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셨습니다. 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느냐? 저 별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야, 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너에게 아들 하나 낳게 하는 능력이 없겠느냐, 너를 적군으로부터 지켜 줄 정도의 능력이 없겠느냐 하면서 위로와 동시에 확신을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별을 보아야 합니다. 성도는 자연으로 나가야 합니다. 근심할 때 새를 보아야 합니다. 새 조차도 먹이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굶기시겠느냐 그러면서 어려움과 집착에서부터 벗어날 줄 알아야 합니다. 대부분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 빠지게 될 때의 특징이 있습니다. 집착합니다. 문제만 쳐다봅니다. 그 문제만을 골똘히 생각합니다. 그 문제 속에 빠져 있습니다. 성경식의 표현에 의하면 문제에 삼킨 바 되어 버립니다. 문제에 그냥 익사해 버립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문제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별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런 것을 압니다. 문제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여행을 한번 갔다오라는 식으로 얘기합니다. 다른 것에 집중해 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라’까지는 몰라도 문제로부터 빠져나와야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일종의 경험법칙이 있습니다. 문제 속에 있으면 절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문제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자연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새라도 보아야 합니다. 아니면 닭장의 닭이라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내 속에묶여있던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나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별을 바라보는 것은 응답입니다. ‘저 별조차도 만드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풀어주시고 해결해 주실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예배드리는 성도들 중 많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얽히고설킨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만 해도 답답하고 눈물짓게 만드는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를 벗어나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모든 것이 다 깨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창조의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 바라보고 주님 의지하면 주님께서 우리 삶의 뒤죽박죽된 모든 것들을 건져 주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우리 삶 가운데 두려움이 사라지는 확신을 가지며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 가지고 서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자는 겸손한 전문가가 된다.
두 번째로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느냐 하면 자기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창조의 내용들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동시에 생기라는 식으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첫째날에 빛을 창조하시고 넷째날에 날과 날의 구분을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날에는 그것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한계를 지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을 그으십니다. 한계를 지어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갈 때는 명확하게 한계를 인정하는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가끔 믿음이라는 미명 하에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는 적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번에 태풍이 왔습니다. 쭉 일기예보와 신문을 보면서 분석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돌아오는 금요일에 태풍이 제주도를 지나간다고 합니다. 그러면 목요일까지는 비행기가 뜰 것입니다. 상식적인 얘기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목요일날 올라오기로 되어 있는 사람은 다 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목요일 날 떠나는 사람은 99%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믿음 없는 사람은 간다고 하는데도 두려워하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저기 전화 걸고 미리 떠나면 안 되느냐고 하고…… 제가 볼 때 목요일에 태풍은 제주도 남방 500㎞에 있는데 그 바람 때문에 못 갈리는 없고 금요일 떠날 때는 문제가 조금 있겠다고 생각되었습니다. 태풍이 오는 날이 바로 그 날이니까요. 태풍이 올 때는 비행기가 뜰 수 없습니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공항관계자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십시오. 비행기가 뜨게 해 주십시오.’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면 우리는 죽는 것입니다. 공항관계자의 마음이 변화되어서 우리더러 비행기 타라고 했으면 우리는 추락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이땅을 살다보면 자기 뜻대로 모든 것이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파도를 타야 합니다. 우리는 오는 파도마다 응답을 하는 것입니다. 높은 파도가 올 때는 피해야 되고 즐기기 좋은 파도가 올 때는 윈드서핑을 하고 어떤 파도는 구경만 할 수 있는 파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때그때마다 보내주시는 파도에 대해 응답할 뿐입니다. 응답을 해야지요. 비행기 안 타고 머물러야 합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어떤 길로 인도해 주시든지 그 다음에 응답을 구해야지요. 저는 그래서 금요일날 쉽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너무 힘드니까 하루쯤 더 교제를 나누라고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다들 모여서 남제주 쪽에서는 영화도 두 편 보았습니다. 니고세이터라는 아주 좋은 영화, 저녁때는 맨오브오너라는 감동적인 영화를 보았습니다. 명예가 얼마나 중요한지 못하는 설교 몇 편보다 훨씬 나은 그런 강력한 메시지의 영화를 보았습니다. 낮에는 교제를 하고…… 모든 사람이 눌려있어야 될 상황에 아무도 눌리지 않고 기쁨 가지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 기회를 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들 세월들 우리에게 주신 모든 여건들을 즐겼습니다. 잘한 것 아닙니까? 그리고 어제 같은 때는 못 올 수도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는지, 예배를 긍휼히 여기셨는지 초강력 태풍이라고 하더니만 하루아침에 흐지부지되어서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냥 별 문제없이 어제 아침부터 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문제가 왔을 때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 품고 나가면 됩니다. 우리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환경을 다 뛰어넘고 내가 하나님인 양 ‘태풍아 물러가라! 비행기야 떠라!’ 하면서 자기 멋대로 하는 독재자 같은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여건에 대해서 받아들이는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무조건 믿음 가지고 돌파하는 것만이 좋은 믿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7장을 보십시오. 사도바울이 잡혀있는 배가 로마로 향해 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경험법칙상 알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금식이 끝난 때, 이 시기는 태풍이 몰아칠 때라고…… 그래서 지금 배를 띄우면 다 죽는다고 지금은 배를 띄우지 말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선장과 백부장은 남풍이 순하게 부는 것을 바라보고 이렇게 평탄한데 무슨 소리하느냐고 합니다. 결국 가다가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난파되어서 간신히 살아나지 않습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징조, 천기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지금 시기가 태풍의 때이고 광풍이 부는 때라고 하면 피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바람이 불면 비행기를 안 띄우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한계를 인정하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것은 연구하는 것입니다. 언제가 장마인지 태풍의 때인지 가뭄이지…… 예를 들어서 입춘이 왔습니다. 아직은 춥습니다. 그러나 입춘, 경험법칙상 이제 봄이 온다는 뜻 아닙니까? 경칩, 개구리가 뛰어나옵니다. 그러면 농사준비를 해야 합니다. 춥든 덥든 농사를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경험법칙상 알고 있습니다. 다 압니다. 다 알아요. 소한 때 아무리 따뜻해도 오리털파카 집어넣으면 안 됩니다. 곧 또 추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이 징조입니다. 믿는 자들은 이런 모든 것들을 수년 동안에 잘 관찰해서 다른 사람을 지도해야 합니다. 위험에 대비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한계를 인정하면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고대사회에서 과학적인 사고를 했던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항상 관찰자였습니다. 두 번 실수하지 않았습니다. 온전한 길로 나아가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한번 실수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 실수하는 것은 이방인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지식과 경험의 축적을 통해서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지만 동시에 가장 앞선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과 은혜 가운데 그것을 다룰 줄 아는 모습, 그것이 바로 성도의 모습입니다.

잘 보십시오! 이 사회가 그리스도밖에 있을 때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습니까? 징조와 천기를 구별하는 자세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연에 우리의 인생을 맡겨 버립니다. 이 나라와 민족의 미래가 어떻습니까? 무조건 좋다고 합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붉은 악마들이 뭉쳐 있으니까! 이런 비과학적인 얘기가 어디 있습니까! 응원한다고 나라가 잘됩니까? 저는 중요한 것이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어떤 얘기를 해야 되느냐 하면 우리가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이 사회의 약점 물고 늘어지는 것, 비방&8228;중상하는 것을 끊는 운동을 벌여야 된다는 쪽으로 나아가면 민족의 미래에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선수들이 열심히 체력훈련을 훈련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세계4강에 들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허리띠 졸라매어야 승리할 수 있다, 그런 구체적인 안이 있어야 과학적인 것입니다. 우연에 맡기면 안 됩니다.

성수대교가 무너졌습니다. 그러면 왜 무너졌는지 분석을 해야 합니다. 감리를 제대로 안 해서 그랬다면 또 무너지지 않도록 철저하게 분석을 해야 합니다. 또 감리 안하고 적당히 해 버리면 E또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연이 지배하는 세계관입니다. 우리는 한번 당했던 일을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우리 아픔으로 알고 철저하게 기록하고 재확인한다고 하면 넘어지지 않는 믿음의 종들이 됩니다.

그래서 성도만이 어려움을 통해서 전문가가 되어집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통해서 전문가가 됩니다. 저도 사실 제주선교를 삼일교회에서 9번 전 교회까지 하면 12번을 갔습니다. 제주도의 6월말과 7월초의 날씨에 대해서는 저도 약간 전문가가 되어 있습니다. 그때는 항상 태풍이 올 때입니다. 그 정도는 읽을 줄 압니다. 어떻게 되는지 분석을 하잖아요. 그래서 대비하면 됩니다.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다음에 뛸 줄 아는 것, 그것이 성도의 능력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런 상황들을 받아들이고 승리하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문가가 되십시오. 그것이 창조를 믿는 하나님 백성의 모습입니다.

3.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자는 평범한 삶 속에서도 감사한다.
세 번째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의 자세는…… 어려운 말로 하면 특별은총에서 일반은총으로 옮겨가는 신앙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기적에서 평범한 삶의 순종으로 옮겨가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초창기, 특별히 초신자에게는 기적적인 모습-이것을 특별은총이라고 합니다-자연질서를 깨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특별한 방법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이 수련회가서 수영을 하려고 하는데 비가 오려고 하면 구름을 놓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 구름이 사라지게 해 주세요.” 이것은 어린 아이 수준에서 맞는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그런 기도를 하면 잘 안 될 것 같은데, 뭐 안될 것까지야 없지만 참 기도할 것이 없어서 그런 기도를 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상하게도 어린 아이의 기도는 들어 주실 때가 많습니다. 저는 주일학교 전도사를 하면서 그런 것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정말 뻔히 보이던 검은구름이 사라집니다. 아이들의 기도를 통해서 믿음을 굳건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특별은총입니다.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하나님께서는 일반은총, 비가 오는 날씨에는 수영을 피하는 쪽으로 비가 올 때에는 세미나를 하고 맑아질 때 수영을 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우는 모습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방법입니다.

오늘 17절을 보니까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섭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방법이 무엇이냐 하면 특별은총에서 일반은총으로 옮겨가는 과정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를 들어서 이런 것입니다. 첫째날 빛이 있으라고 할 때의 이 빛은 하나님의 특별한 빛입니다. 이것은 기적의 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슨 빛인지 모릅니다. 빛의 근원을 만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뭔지 모릅니다. 근원적인 것입니다. 특별한 빛입니다. 그러다가 넷째날이 되어서 또 무슨 빛을 만듭니다. 해와 달과 별, 우리 눈에 보이는 빛을 만들었습니다. 지금 햇빛이라고 하는 해는 그 넷째날에 만든 것입니다. 첫째날은 해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빛을 창조하셨고 그 특별은총에서 이제 우리가 보이고 느끼고 말할 수 있는 일반은총의 자연적인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런 식이었습니다. 특별은총에서 일반은총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했을 때 그들이 식량을 싸 가지고 나울 수 없었잖아요. 옷을 싸 가지고 나올 수 없잖아요. 신발 싸 가지고 나올 수 없잖아요. 그냥 나왔습니다. 그리고서 먹을 것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만나로 먹이십니다. 물이 없을 때에 바위에서 터져 나오는 물을 먹게 하시고 고기 좀 먹게 해 달라고 했더니 갑자기 메추라기들이 1m 높이로 날아다닙니다. 그것을 잡아다가 구워 먹었습니다. 이것이 특별은총입니다. 지금은 기도해도 아무 것도 안 내려옵니다. 만나가 안 내려옵니다. 기도한다고 새가 1-2m 높이로 날지 않습니다. 미친 새 빼놓고는 없습니다. 잡으려고 하면 다 도망칩니다. 그렇게 특별히 먹이시다가 요단강을 건너와서 가나안에 와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니까 만나가 그쳤습니다. 만나가 그칩니다. 그 다음부터는 농사지어 먹고 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일반화현상이 벌어집니다. 일반은총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특별은총에서 일반은총으로……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베드로의 그림자만 비추어도, 옷에 손만 대어도 병이 낫는 이적적인 일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바울서신으로 넘어오면 이적이 나타납니까? 거의 없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어떤 식으로 변화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가 됩니다. 말씀으로 양육 받고…… 특별은총에서 일반은총으로 변화가 됩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우리가 집을 지을 때 보면 집 속에 있는 그 구조물이 다 보입니다. 철근이 보이고 배선이 다 보이고…… 초창기 때는 다 보입니다. 속이 훤하게 투명하게 다 보입니다. 그래서 이 건물은 H-빔으로 짓는 건물, 철근으로 짓는 건물, 나무 갖다 꽃아 건물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건축이 진행이 되면 될수록, 완성이 되면 될수록 처음에 세웠던 뼈대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점차 보이는 것은 도배지가 보이고 페인트칠 한 것만 보입니다. 속에 있는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도 완성될수록 점점 원자재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점점 도구와 연장을 숨기시고 겉에 보이는 것만 남게 만듭니다. 기적이라는 방법을 숨기시고 그 다음에는 일반적인 자연의 방법이라는 것을 가지고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데오드로○(?)은 두 가지로 해석을 했습니다. 첫째는 이것은 하나님의 겸손이다! ‘하나님이 겸손하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작품에 싸인을 남기지 않으시고 다 덮어 버리셨다.’ 또 하나는 우리가 이런 일반은총 속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보이지 않고 숨기시는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믿음을 위한 시험이라고…… 그렇지 않습니까?

믿음의 초창기 때에는 감격이 있습니다. 아직 믿음의 수준이 낮은 사람은 특별은총에 감격합니다. 기도했더니 불을 받았다고 하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했다고 합니다. 초창기 때 기도할 때는 하나님께서 별의별 것을 다 응답합니다. 이번에 장학금 얼마가 필요하다고 기도했더니 얼마가 생겼다고 합니다. 초신자는 간증한다고 하는 것이 다 그런 것입니다. 돈이 생겼다고 합니다. 헤어졌던 남자가 돌아왔다고 합니다. 떨어질 줄 알았는데 붙었다고 합니다. 전부 이런 얘기입니다. 잘 들어보면 그것은 특별은총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다가 신앙이 진행되다 보면 이것을 일반은총으로 바꾸어 버리십니다. 그러면서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병이 났습니다. 기도해서 고쳤습니다. 특별은총이지요. 기도했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납니다. 또 병원에 가서 고쳤습니다. 일반은총입니다. 의술이 고쳤습니다. 어느 것이 더 감사합니까? 특별은총으로 기도해서 고쳤다고 하면 사람들이 다 감사하다고 하는데 병원 가서 일반은총으로 고친 것에 대해서는 감사가 덜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시험입니다.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이 더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내가 등록금이 없었습니다. 그때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등록금을 채워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돈입니다. 그러다가 졸업해서 직장 다니면서 월급에서 돈을 법니다. 그러면 그것은 내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번 것…… 하나님께서 일반은총으로 벌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 아닙니까?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인정 못 합니다. 그러니까 성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주셨고 가나안에 와서는 농사를 짓게 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씨 뿌리고 물 주고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고요. 이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추수감사절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들은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내 손으로 지은 것이라고 하고 바알신이 준 것이라고 하면서 우상에게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나이가 어렸을 때는, 아무 것도 없을 때는 특별은총이 많이 임합니다. 처녀총각들, 거지들에게는 특별은총이 많이 임합니다. 이상하게 아침값이 없을 때에 아침 먹여주는 사람이 나옵니다. 날마다 감격이 넘칩니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하고 시간이 가고 힘이 생길수록 특별은총의 영역은 줄어듭니다. 하나님은 시스템을 통해서 우리를 먹이십니다. 그러면 사람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현대는 일반은총이 충만한 시대입니다. 문명이 발달되어서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창조주하나님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내가 창조주라는 건방진 소리를 합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문명의 혜택을 받으면 받을수록 믿음이 식어 버립니다. 그때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것을 깨닫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가난했을 때는 믿음이 있습니다. 가난할 때는 특별은총이 많을 때입니다. 매순간 주님 앞에 기도함으로 주님께서 채워주시는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부유해졌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그렇게 간절히 기도할 필요가 없지요. 옛날에는 그렇게도 간절하게 기도했던 제목들이…… 이제는 돈이 생겼습니다. 그냥 내면 됩니다. 통장에서 찾아서 내면 됩니다. 인터넷으로 보내면 됩니다. 인터넷뱅킹으로 보내면서 감사기도 드린 적 있습니까? 옛날에는 다 기도했던 것들인데 이제는 클릭 몇 번으로 끝내고 교만에 빠집니다. 내 통장에 얼마가 있는데, 내가 얼마나 능력이 있는데……

집이 없을 때는 어떻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 우리 가족에게는 집이 없었습니다. 엄마는 집 구하러 다니면서 저더러 따라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애가 많은 것을 보이면 집주인들이 집을 안 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 기도제목이 빨리 부자되어서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집을 놓고 기도를 가장 많이 했던 때가 어렸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제발 주인 아줌마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사……” 우리 엄마는 저에게 “네가 조용히 해야 오래 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들 웃음) 그때 기도를 제일 많이 했습니다. 집을 얻게 되었을 때 감사드렸습니다. 참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집 때문에 감사하는 적 있습니까? 넓은 집이 있으면서 싸움이 벌어집니다. 넓은 집이 있으면서 불평이 나옵니다. 특별은총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던 사람이 일반은총으로 변화되었을 때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직장을 얻고 하나님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대학 붙고 하나님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결혼문제 놓고 기도하다가 결혼하고서 하나님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잃어버린 백성들의 불행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것은 특별은총의 때뿐 아니라 일반은총의 때에도 항상 하나님을 기억하고 주께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살리는 능력입니다.

주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면서 다른 것은 몰라도 감사만은 흘러넘치는 축복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창조주 예수님을 믿는다는 의미가 무엇이냐,
① 첫째는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별을 보십시오. 문제에서 빠져 나오십시오. 별을 만드신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 못 하시겠습니까?
두려움은 불신앙입니다. 다시금 주님을 의지하면서 내 삶의 문제를 내어 놓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말미암아 두려움이 아니라 담대함 속에 변화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② 또한 자기 자신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독재자가 되어서, 내가 하나님이 되어서 명령내리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파도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문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태풍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못 가게 만드는 상황이 있으면 못 가게 만드는 그 상황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 한계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실패와 실수와 좌절 속에서, 어려움 속에서 배워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계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겸손한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한계를 인정하는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탁월한 명의를 보십시오. “의사로서 할 수 있는 한계가 있습니다.” 라고 딱 선을 그어놓습니다. 그리고 한계 안에서는 최선의 힘을 다해서 전문가가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탁월한 전문가이면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묘한 긴장감이 있지요. 탁월한 전문가가 되면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③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특별은총이 아닌 일반은총 속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잃지 않고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종교개혁 때에 늘 말했던 코람데오의 인생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런 창조의 하나님을 믿고 우리 삶에 하나님의 흘러넘치는 은총이 부어지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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