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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강력한 교회가 되는 첩경 (골 01: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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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골로새서 6번째 강해입니다. 강력한 교회가 되는 첩경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몇 주에 걸쳐서 골로새서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의 주제는 ‘예수는 누구인가’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서 골로새서는 예수님에 관한 기독론이 그 핵심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하나씩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셨습니까?

(1) 첫째,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속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구속(Redemption)이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① 죄의 힘으로부터 끊어버리는 것, ② 죄의 힘으로부터 끊어진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그리스도의 구속이란 죄의 힘으로부터 벗어남과 동시에 자유를 누리는 것도 포함합니다. 그것이 구속의 완전성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땅에 오셨습니다.

(2) 두 번째로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신앙의 모습을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① 첫째,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어떠한 두려움이 온다고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② 둘째, 우리 자신이 창조된 피조물임과 자기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한 모습이 됩니다. 한계를 인정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만물의 원리를 연구하는 전문가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잘 믿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한 전문가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③ 셋째, 하나님의 특별은총(기적이라는 방법으로 베풀어진 은총)뿐만 아니라 일반은총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일상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하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창조신앙은 우리 삶 전체에 깊이깊이 스며드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1. 머리되신 예수님께 모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 시간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교회의 창조자이시고 교회에 능력을 공급하는 분이시며 교회의 머리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만드시고 교회를 유지하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매우 쉬운 책입니다. 성경은 원래 글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쭉 읽기만 해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용이한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학자들이 자꾸만 어렵게 만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쉽게 읽자고 만든 주석이 오히려 더 어려워지고 결국 하나님 말씀을 어렵게 만들어서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범죄 중의 하나가 책을 어렵게 쓰는 것, 설교를 어렵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절대 성경원리에 맞지 않습니다. 복음은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비유라는 방법을 주로 사용하셨습니다. 비유는 말로도 잘 이해하지 못하던 사람들에게 그림언어를 통해서 이해시키자는 것 아닙니까? 그만큼 쉽게 하자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모두 겨자씨를 알고 있었습니다. 겨자씨는 점과 같이 작은 씨입니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커다랗게 자라는 나무입니다. 예수님은 그 겨자씨를 통해서 천국의 내용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누룩이 무엇인지 다 알았습니다. 그 누룩을 통해서 급속하게 번지는 것, 확산되는 것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잔치가 무엇인지 다 알지 않습니까? 잔치의 비유를 통해서 천국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들으면 복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해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교회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한다면 학자들은 여러 가지 정의를 내릴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대한 성경의 정의는 어떻습니까? 너무 쉽습니다.‘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우리의 몸에 눈이 있고 귀가 있고 손이 있고 발이 있고…… 그렇게 여러 가지 다양하게 되어 있는 것들이 하나의 몸을 이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도 다양한 부분들로 이루어진 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몸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가장 큰 의미는 다양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눈, 코, 입, 손, 발처럼 교회 안에도 다양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양한 것이 일치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라고 하면서 하나되었다는 것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됨의 의미는 모두 획일적으로 다 똑같아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 다른 것이지만 목적에 있어서 하나가 되는 것, 다 다른 것이지만 뜻에 의해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각 사람이 은사가 틀리고 분량이 틀립니다. 다 틀리지만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뛰는 존재다……

이 개념은 우리 한국말보다는 영어로 표현할 때 더 쉽게 이해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unifomity가 아니라 unity입니다. unifomity는 획일화된 것입니다. 국화빵 찍어내듯이 똑같은 것입니다. 교회는 unifomity가 아니라 unity입니다. 다 다르지만 다른 것들이 모여서 통일을 이룬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의 참된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활력이 있어야 합니다. 각기 다른 부분들의 활력이 있어야 합니다. 각각 다 다이나믹스가 있는데 그것이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의 원리 가운데 하나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그래서 손은 손대로 일하고 발은 발대로 일하고 눈은 눈대로 일하는 것처럼 각각 일하게 만듭니다. 각각을 보면 굉장히 왕성하게, 자유롭게 뛰어 다닙니다. 절대 수동적이지 않고 긍정적이고 능동적입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 각각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질서를 이루면서 한 가지 목적을 향해서 뛰어갑니다.

저는 몸을 볼 때마다 참 신기합니다. 예를 들어서 불을 끄고서 밥을 먹는다고 합시다. 숟가락으로 밥을 펐습니다. 아무 것도 안 보이잖아요. 손에 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눈으로 가지 않습니다. 밥을 퍼 가지고 귀로 가져가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코로도 잘 안 갑니다. 거의 입으로 갑니다. 손에 눈이 없는데도 밥이 입으로 갑니다. 그것이 바로 몸이라는 것입니다. 손이 따로 노는 것 같이 보이고 입도 따로 노는 것 같이 보이고 코도 따로 노는 것 같이 보이지만 결국은 한 가지 목적을 향해서 집중적으로 모여든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능력있게 서기 위해서는 각자의 자유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분명히 자유로움이 필요합니다. ‘야-여기에는 엄청난 다이나믹스가 있구나!’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 안에 질서가 있습니다. 한 가지 목적을 향해서 뛰는 모습이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하게 자유로움을 갖고 뛰는데도 한 가지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머리로부터 오더(order)를 받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이룰 수 있는 비결은 머리되신 예수님을 붙들기 때문입니다. 만약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요소가 없다면 교회는 자유로움 속에서 충돌과 분열이 일어날 것입니다. 교회 안의 다양한 것들이 하나가 되는 비결은 머리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붙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교회가 교회답기 위해서는 머리되신 예수님을 붙들어야 되고 특별히 그 머리의 뜻을 잘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뜻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그 뜻대로 움직이는 활동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교회가 능력이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운동이 벌어져야 합니다. 말씀운동이 벌어져야 합니다.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머리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듣기만 하고 머무르는 것은 죽은 정통입니다. 듣고 난 다음 그 말씀대로 움직이고자 하는 활동이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갖추어진 그런 교회를 살아있는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의 붙든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왕성하게 움직이는,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이루었던 모델을 하나 찾아봅시다. 저는 그 모델 중의 하나로 초대교회 중 안디옥교회를 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디옥교회는 역사상 두 번째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역동성이 있고 성경에서 말하는 모범적인 교회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첫 번째 교회였던 예루살렘 교회와 여러 가지로 비교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한번 설교를 했을 때 3000명이 회심을 할 정도로 대형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안디옥교회는 크지 않은 교회였습니다. 기껏해야 수백 명 정도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또 능력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능력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기사와 이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지나갈 때 베드로의 그림자에 닿기만 해도 병자가 낳는 능력 있는 교회였습니다. 반면에 안디옥교회에서는 병이 낫는 이적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무좀도 못 고쳤습니다. 감기도 못 고쳤습니다. 별로 기적이 없습니다. 지도자의 면면에 있어서도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은 다 예수님의 제자, 사도들입니다. 베드로, 요한 등 이름만 들어도 다 알 수 있는 유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숨결을 직접 느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안디옥교회는 바나바, 시므온, 루기오, 마나엔……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사울과 바나바를 빼 놓고 안디옥교회 지도자들의 이름을 아십니까? 루기오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마나엔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우리도 잘 모를 정도로 무명의 인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교회는 여러 가지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교회 못지 않은 능력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안디옥교회는 머리되신 예수님을 철저히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능력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명성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되신 예수님만 강력하게 붙들면 지금도 안디옥교회 이상으로 능력있게 쓰임받는 거룩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머리되신 예수님을 붙드는 방법이 바로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 13장 2 절을 보니까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라고 합니다. 여기 보면 ‘주를 섬겨’ 라고 하는데 ‘섬겨’ 가 바로 예배드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다시 말해서 머리되신 예수님을 붙들 때 그들의 심령 가운데 선교할 뜻을 받았습니다. 또 하나님께 예배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친히 머리되신 예수님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지도자로 세우라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심령 가운데 선교의 능력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능력있는 종들이 되기 위해서는 머리를 붙드는, 예수를 붙드는 운동을 벌여야 합니다. 머리되신 예수님을 붙들면 두 가지 역사가 나타나는데 첫째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님 붙들면 능력이 생깁니다. 여러분, 교회의 역사를 보면 주기마다 교회가 약화되는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인간 지도자를 따르고 프로그램을 따르다 보면 교회가 약화됩니다. 그러다가 다시금 교회 안에서 부흥이 일어납니다. 부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머리되신 예수님을 붙드는 운동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이 말씀을 붙들고 주를 찾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교회만 그렇습니까? 오늘도 이 자리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성도 가운데 삶이 무너진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가정이 무너지고 직장이 무너지고 삶의 모든 인간관계가 다 무너진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떠나서 엉뚱하게 내 힘 믿고, 조직의 힘을 믿고, 돈을 믿고 살았던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믿던 것이 다 무너졌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디로 돌아와야 합니까? 우리의 머리되신 예수님을 붙드는 데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때부터 역사는 바뀌기 시작합니다. 무능했던 사람이 다시 유능해지고 무력한 사람이 다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능력으로 무장하게 됩니다. 우리 삶의 무능의 문제는 예배로부터 풀어야 합니다. 마치 어떤 전기기구의 플러그를 전기에 꽂을 때 능력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배는 머리되신 예수님이 능력의 원천과 나를 연결하는 일입니다. 능력의 원천되시는 예수님을 붙들 때 능력이 생깁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가 다 그 이야기입니다. 머리되신 예수님을 붙드는 예배를 통해서 무능했던 사람들이 유능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35장3절을 보니까 야곱이 하몰의 복수에 접한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때 야곱이 선택했던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야곱은 위기 때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합니다. 죽음과 실패의 자리에서 벧엘로 올라가자, 예배드리자고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위기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오늘도 예배드리는 성도님들! 시험과 환난, 하나님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을 줄 압니다. 그런 문제가 어떻게 하면 해결됩니까? 우리가 머리 쓰고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머리되신 예수님을 붙들면 해결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몰라서 해결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1주일에 상당히 많은 상담을 하게 됩니다. 상담을 하다 보면 사람들이 전부 앞뒤가 꽉꽉 막혀 있는 답답한 문제를 들고 옵니다. 웬만한 문제라면 자기가 해결했을 것입니다. 목사를 찾아올 정도면 하다 하다 거의 해결의 단서가 없을 때 찾아옵니다. 다 막혀 버렸을 때 찾아옵니다. 그러면 그럴 때 제가 해 주는 얘기를 듣고 더 답답해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가정에 문제가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제가 서로 사랑하고 양보하고 섬기고 살면 된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누가 모르냐고 합니다. 맞습니다. 모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답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얘기하고 난 다음에 함께 기도합니다. 그리고서 예배로부터 문제를 풀라고 말합니다. 처음부터 마음을 움직이려고 생각하지 말고 예배로부터 문제를 풀 생각을 하라고 합니다. 부부가 같이 나와서 예배하고 같이 나와서 기도하고 같이 하나님께 능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묘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예배하다 보면 사랑할 마음이 없었는데 사랑할 능력이 생깁니다. 섬길 마음이 없었는데 섬길 능력이 생기고 희생할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희생할 능력이 생깁니다. 우리는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없어서 못합니다. 그런데 예배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능력을 예배를 통해서 주십니다.

우리가 플러그를 콘센트에 꽂지 않았을 때는 아무리 좋은 전자기기라 할지라도 작동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작동되는지 아십니까? 플러그를 콘센트에 꽂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동력이 없습니다. 머리되신 예수님을 붙들어야 힘이 생깁니다. 그 능력 붙들어야 합니다. 예배는 그것입니다. 복잡한 얘기할 필요 없습니다. 예배는 전능하신 하나님, 나의 머리되신 예수님께서 나에게 능력을 공급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머리를 붙드는 싸움입니다.

후배 전도사님이 저를 종종 찾아올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가 부흥되느냐고 합니다. 저도 잘 모르는 것을 물어봅니다. 그것을 알면 제가 하지…… (성도들 웃음) 부흥의 방법을 굳이 이야기한다고 살아있는 말씀을 증거하고 뜨겁게 기도하고 뜨겁게 찬양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도사님들은 누가 그것을 모르냐고 합니다. 맞습니다. 모두가 다 아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할 능력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해서 말씀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기도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찬양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능력이 임하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오늘도 예배를 통해서 머리되신 예수님을 붙드는 강력한 능력이 우리 가운데 임하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예배시간은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회복하는 시간입니다. 오늘도 살아계신 예수님을 붙듭시다. “나에게 능력을 주십시오! 예수님, 나의 가정의 문제를 알고 있지 않습니까? 직장의 문제를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나의 인간적인, 육체의 연약한 문제를 주님이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알기는 다 압니다. 내가 어떻게 걸어가야 될지 알기는 다 아는데…… 능력이 없습니다.”

여러분! 한탄만 하지 마십시오. 머리되신 예수님을 붙들면 주님께서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그것이 교회의 능력입니다. 교회의 기적입니다. 오늘도 머리되신 예수님 붙듦으로 말미암아 강력한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2. 머리되신 예수님을 붙들면 교회가 하나됩니다.
또 한 가지 머리되신 예수님을 붙들면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이냐 하면 교회가 하나됩니다.
안디옥교회가 얼마나 복잡한 교회였습니까! 이 다섯 명의 지도자의 면면을 보면 얼마나 복잡한지 알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귀족이며 부동산 재벌이었습니다. 교회에 땅을 기증할 정도로 많은 부동산을 갖고 있었던 부자였습니다. 바나바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은 흑인이었습니다. 아주 가난하고 낮은 지위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도 흑인들이 비교적 낮은 지위이지만 그때는 더 했습니다. 시므온은 북아프리카 출신의 낮은 지위의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부자, 니게르는 가난한 사람…… 빈부격차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가 되잖아요. 또 구레네 사람 루기오가 나옵니다. 이 사람도 북아프리카의 출신 흑인인데 최소한 이 사람은 자유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외국인 노동자 같은 위치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도 인도네시아, 네팔, 파키스탄 이런 데서 외국인 노동자가 오지 않습니까?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구레네 사람 루기오…… 이 사람들은 외국인 노동자와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별로 유복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또 마나엔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헤롯의 젖동생이라고 합니다. 왕족입니다. 권력의 주변부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울은 바리새인이었고 가말리엘(Gamaliel)의 문하에 있었고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이는 어렸습니다. 안디옥교회의 면면을 보면 얼마나 복잡합니까! 부자가 있고 가난한 사람이 있고 젊은 사람이 있고 늙은 사람이 있고 피부색깔도 검은 사람 흰 사람 누런 사람……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하나였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머리되신 예수님을 붙드니까 하나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진정한 모습은 이렇게 모든 사람이 다 모일 수 있는 구조가 되어야 합니다. 건강한 교회는 부자가 와도 섞일 수 있고 가난한 자가 와도 섞일 수 있고 장애우가 와도 섞일 수 있고 남자가 와도 섞일 수 있고 여자가 와도 섞일 수 있고 젊은 사람이 와도 섞일 수 있고 나이드신 사람이 와도 섞일 수 있는건강한 구조를 가진 교회입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의 사람이 모였지만 하나입니다. 머리되신 예수님을 붙드니까 하나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의 모든 다른 것을 하나되게 만드는, 녹이는 능력이 있습니다.

반면 교회 안에 예배가 사라지면 분열이 역사합니다. 예배가 사라지면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계급적인 욕구들을 분출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갈등이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임재하는 예배가 있으면,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면 우리 안에 묘한 평준화작업이 이루어집니다. 저는 헨델의 메시아의 근거가 되었던 이사야서 40장의 말씀이 참 감동적이라고 생각하는데 3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것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이사야 40:3) 이런 말씀이 나오는데 참 의미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드리는 성도 중 상당수의 성도들은 자존감의 위기를 겪게 됩니다. 자존감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살 가치도 없고 나는 왜 이렇게 못생기고 공부를 못하나, 나는 세상에 존재할 필요가 없어, 나는 부모가 낳고 싶어서 낳은 것도 아니라고 하는 소리를 어렸을 때부터 들었어…… 이런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머리되신 예수님을 붙드는 예배가 있으면 그 잃어버렸던 자존감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나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라보게 되고 나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내 안에 있는 강점을 발견하게 되고 내가 섬기기만 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되살아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제까지는 내 찬양이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 찬양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위로받는 것을 통해 이것이 나의 사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의 한마디를 통해서 많은 영혼이 주께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기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게 됩니다. 골짜기 같은 심령이 돋우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살아있는 예배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제대로 드리면 소망이 생깁니다. 무너졌던 것들이 회복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될지 비전이 생깁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면 두 손을 불끈 쥐게 되어 있습니다. 나가서 이제 주님 앞에 순종하겠다고…… 우리의 무너졌던 자아가 일어서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참된 예배의 특징입니다.

또 참된 예배가 있으면 우리 가운데 교만한 사람이 낮아집니다. 머리되신 예수님을 붙드는 참된 예배가 있으면 하나님이 주셔서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을 모르고 다 자기 힘으로 된 줄 알고 자기가 최고인 줄 알던 기고만장한 사람들이 겸손하게 됩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집니다. 다 낮아져서 납작하게 엎드리게 됩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게 되고 자기 자신은 낮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분명히 교만할 만한 사람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대적이 될 만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배를 통해서 겸손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됩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공포에 떱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강한데도 불구하고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유는 머리되신 예수님을 붙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 교회에 오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이 다 울퉁불퉁입니다. 산 같은 사람이 옵니다. 교만에 빠져서 이상하게 눈 내리뜨고 목에 깁스한 사람이 옵니다. 또 상처 입은 사람이 옵니다. 모자 푹 눌러 쓰고 인상 팍 쓰고 거의 얼굴이 사색이 된 사람들이 옵니다. 예배는 이 사람들을 살려줍니다. 교만한 사람을 낮춥니다. 그래서 골짜기마다 돋우어지고 산마다 낮아져서 전체가 다 평지가 됩니다. 마치 비행기 활주로 같은 모습이 됩니다. 들어올 때는 다 다른 모습이었는데 나갈 때는 거의 똑같이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의 모습,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은 감격의 모습으로 전체가 변화됩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평준하게 된 상황에서 하나님의 비행이 이루어집니다. 활주로 같이 달리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선교를 통해서 많은 교회를 방문해 보지 않았습니까! 대부분 능력이 없는 연약한 교회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무능하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능력이 없습니다. 기도의 능력도 없고 찬양의 능력도 없습니다. 능력이 없는 교회의 또 하나의 특징은 분열입니다. 왜 그렇게 가는 곳마다 싸움이 많은지…… 싸움 없는 교회가 드물 정도로 분열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문제를 가지고 분열합니다. 또 무능과 분열은 같이 옵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무능과 분열이라는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에도 해당되고 직장에도 해당되고 우리의 민족과 나라에도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무능과 분열이 있습니까? 머리되신 예수님을 붙들면 해결됩니다! 머리되신 예수님을 붙들면 능력이 생기게 되고 머리되신 예수님을 붙들면 하나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지도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머리되신 예수님을 붙들게 만드는 힘에 있습니다. 오늘도 예배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머리되신 예수님을 붙듦으로 말미암아 하나됨과 동시에 능력으로 무장하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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