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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신자들은 왜 예수를 안 믿는가 (골 0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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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골로새서 10번째 강해입니다. ‘불신자들은 왜 예수를 안 믿는가’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설교를 하면서 우려되는 점이 너무 어려운 설교가 아닌가, 너무 난해하고 철학적인 설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런 골치 아픈 설교도 듣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될 수 있으면 쉽게 접근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불신자들이 왜 신앙공동체에 들어오지 않는가를 아는 데에 소홀한 경향이 있습니다. 잘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불신자들에 대한 이해부족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대화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신학적인 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920년대 미국에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당시만 해도 신학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신학교가 프린스턴신학교입니다. 얼마 전에 총리로 지명되었던 자가 나와서 시끄러웠던 그 프린스턴 신학교가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는데 프린스턴 신학교가 자유주의 신학으로 흘러간다고 해서 교수 4명이 학교를 떠나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따로 세웠습니다. 그때 나왔던 사람 가운데 헬라어 교본으로써 유명했던 메이첸(J. Gresham Machen)이라는 사람이 있고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아주 유명한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한국의 많은 신학에 영향을 끼쳤던 분 중의 한 사람이 반틸이라는 분입니다. 이 사람이 영향 많이 미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반틸의 생각은 전제주의라고 얘기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모든 시각과 변증과 신학은 오직 성경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세계관과 세계에서 말하는 세속적인 세계관은 공통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와 세상은 전제부터 다르다는 것입니다. 전제부터 다르기 때문에 대화의 여지가 없다, 교집합이 없다, 그러므로 교회가 해야 될 일은 일방적인 선포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접근을 할 때 우리에게 생기는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설득적인 요소가 들어갈 여지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틸 식의 영향을 받은 분들이 설교를 할 때 보면 성도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졸든지 아니 졸든지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원고만 보고 읽을 수 있습니다. 선포니까요!

이런 것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이 되어서 나온 사람이 있는데 존 스타트의 제자라고 얘기하는 엘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E. Mcgrath)와 같은 분들입니다. 이분은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하면 인간의 본성이 타락하기는 했지만 흐릿하게나마 이성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와 세상의 교집합이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 교집합을 접촉점이라고 얘기합니다. 접촉점이 답은 아니지만 접촉점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점점 나아가 성경적인 세계로 이끌어 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득적인 요소가 있지요.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의 접촉점이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접촉점의 예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믿는 사람도 믿지 않는 사람도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고난의 문제, 믿는 사람도 믿지 않는 사람도 고난이 있습니다. 공허감의 문제, 믿는 사람도 믿지 않는 사람도 공허감이 있습니다. 여러분, 잘 보면 질병, 특히 죽을병에 걸린 사람들은 예수를 쉽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것 못 느낍니까? 실연의 아픔, 가을쯤 되면 머리 자르고 나오는 자매들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의 증거하면 아주 쉽게 증거되고 잘 받아들입니다. 노총각의 비애, 젊었을 때는 예수 안 믿다가 예수님 공생애 끝날 나이쯤 되면 사람이 겸손해지고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충분히 접촉점이 될 수 있습니다.

엘리스터 맥그라스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영국 선수 가운데 보리스 베커(Boris Becker)라는 테니스 선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나는 윔블던 테니스 대회에서 두 번이나 우승을 했다. 한번은 최연소자로서 우승을 했다. 나는 부자이고 원하기만 하면 고급 승용차를 살 수 있고 내가 원하기만 하면 많은 여자들이 나를 따라오고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나에게 행복을 의미하지 않았다. 나는 자살해버린 많은 팝스타들을 알고 있고 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가졌지만 행복하지는 못했다. 나는 내적 평화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최정상에 올라갔지만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런 공허감을 표현합니다. 이런 공허감이 얼마든지 복음증거할 수 있는 귀중한 접촉점이 될 수 있지요. 이것을 교회가 붙들어야 합니다. 이런 것을 연구해야 되고 불신자들의 마음 밭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대화가 필요합니다. 훌륭한 웅변가는 청중이 가지는 한계를 파악합니다. 그리고 듣는 사람의 수준에서 단어와 개념의 수준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대화합니다.

이번에 일본선교를 갔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했는데 일본 사람에게 설교하는 것도 이제는 점점 잘 적용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일본사람에게는 단순하면도 논리가 있어야 합니다. 단순하면서도 논리가 있으면 잘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강해설교가 그들에게 잘 통합니다. 지난 겨울, 5차 선교 때에 그들에게 했던 설교가 이제 책으로 엮어 나왔습니다. 8복이라는 책으로 엮어져 나왔는데 잘 팔리고 있습니다. 이번에 삼손에 대한 설교를 했는데 그것도 강해설교를 하다보니까 잘 소화해내고 이번 8월에는 파워로마서가 일본어로 나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에게 했던 설교와 일본 사람들에게 했던 설교가 똑같지 않습니다. 한국인에게는 한국인에게 맞는 접근이 필요하고 일본인에게는 단순하면서도 좀더 논리적인 것들이 먹힙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들리도록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농촌의 청중들에게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목자와 양의 비유, 다 알고 있는 얘기로 쉽게 얘기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도시민에게 말씀을 증거할 때 대도시의 법과 경제지식에서 끌어온 개념으로 설명을 합니다.

엄마가 아이와 대화를 하기 위해서 몸을 낮춥니다. 어린 아이의 눈높이에서 어린 아이의 용어를 가지고 옹알이하듯 대화를 나눕니다. 교회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대화의 능력입니다. 대화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들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전에도 이런 예화를 들었었는데 중요하기 때문에 한 번 더 반복해 보겠습니다.
어떤 두 총각이 있다고 합니다. 서울 출신의 총각과 부산 출신의 총각이 있었습니다. 여름철의 어떤 더운 날이었습니다. 둘이 같이 자취생활을 하는데 부산 출신의 총각이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더니만 서울출신의 총각에게 “야쿠르트 줘!”그러자 서울 총각은 “내가 야크루트 아줌마냐?”몇 번 반복했다고 합니다. “야쿠르트 줘.” “잠이나 자라.”몇 번 이러다가 부산 총각이 다시 벌떡 일어나 화를 내더라는 것입니다. 이 부산 출신의 총각은 자다가 너무 선풍기 바람이 너무 세니까 선풍기 바람을 “약으로 틀어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산말씨가 워낙 사투리가 심해서 못 알아듣잖아요. 서울 학생은 뭐라고 들었느냐 하면 “야쿠르트 줘.”로 이해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얘기를 해도 대화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둘 다 섭섭한 것입니다. 서울 출신의 총각도 섭섭합니다. 아무리 친하다고 하더라도 이 밤중에 나가서 야쿠르트 사오라니까 화가 나고 부산 출신 사람은 한 이불 덮고 자면서 선풍기 하나 못 틀어주나 하고 서로 섭섭한 것이지요.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화가 안 되는 커뮤케이션 에러입니다.

저는 복음의 능력을 믿습니다. 로마서 1장16절을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는데 왜 다른 교회에서 젊은이들이 변화가 안 될까를 생각해보니까 제가 볼 때는 대화의 문제입니다. 용어가 안 통하는 것 같습니다. 강대상에서는 약으로 틀어 주세요라고 하는데 듣기로는 왜 야쿠르트 달라고 하나, 또 반대의 얘기일 수도 잇지요. 그런 식으로 커뮤니케이션의 문제가 있습니다.

들리게 말을 해야 합니다. 로마서 10장1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교회가 해야 될 일은 설교자는 될 수 있으면 들리는 설교를 해야 됩니다. 들리면 변화가 됩니다. 이번에도 일본에 가서 증거를 할 때 그들에게 들리게 설교하니까 변화가 되더라고요. 그때 한국 사람들도 설교를 들었는데 통역기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전파방해로 지지지하면서 통역기에서 통역이 잘 안 들리니까 너무 답답하더라고요. 아무리 좋은 얘기를 한다 하더라도 안 들리니까 믿음이 생길 수도 없고 변화될 수도 없었습니다.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설교도 그렇고 전도도 그렇고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들려야 믿음이 생깁니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될 일이 무엇입니까? 들리는 말씀을 증거하는 교회가 되어야겠지요.

골로새교회의 상황을 보십시오. 골로새교회가 있던 당시 도전세력이 영지주의자였습니다. 그때는 영지주의자를 주변에서 굉장히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너무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의 도전에 대해서 변증하고 있는 것이 바로 골로새서입니다.

영지주의자가 무엇이냐 하면 간단히 요약을 하면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①영지주의자의 특징 1-체험강조
첫 번째 이들은 체험을 강조하는 신비주의자입니다. 그래서 여러 단계 수준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1단계, 2단계, 3단계, 4단계…… 다체험입니다. 체험이 한 단계씩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단계에 올라가는 것을 그들은 충만이라고 했습니다. 최고의 클라이막스가 충만이다. 이것이 헬라어로 ‘플레로마(Pleroma)’라는 충만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한 단계 한 단계 거쳐서 충만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 사상 비슷한데 이데아라고 하면 기분 나쁘니까 자기들이 말을 바꾸었습니다. ‘플레로마’ 그 충만의 상태까지 가야 된다……

골로새서에서 사도 바울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일 때 골리앗의 칼로 골리앗을 죽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자들이 쓰는 용어를 그대로 받아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충만이라고 하는데 신성의 모든 충만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엉뚱한 소리 하지 말라. 예수 안에 모든 것이 다 있느니라. 너희들이 말하는 충만조차도 예수 안에 다 있느니라.”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신비적인 체험을 강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②영지주의자의 특징-영육이원론을 주장
두 번째는 영육이원론입니다.
고난의 문제에 대해 도피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육은 무조건 악한 것이라고 합니다. 영은 좋은 것이고……우리 한국적 상황과 맞지요. 악과 고난은 육에 매어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합니다. 철저하게 영적으로 되면 다 떠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직면하지 않고 피해버립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이단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구원파라고…… 한강에 배 띄워 놓고 있는 사람들 있지요. 그 사람들은 죄는 육이 짓는 것이고 영만 깨끗하면 된다고 하는 이런 식의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회피적인 신앙들이 있습니다. 나는 집안이나 뭐고 다 골치 아프다고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술을 마십니다. 술을 마시며 잊어버리고 잘못 믿는 사람들은 하면서 기도원에 들어가서 2주 3주 동안 거기서 박수치면서 할렐루야합니다. 집에 돌아오지 않습니다. 나는 여기가 좋아요 평생 이러고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영지주의자들의 특징입니다. 고난의 문제에 대해서 회피해 버리고 도피합니다. 그리고 고난의 문제에 대해 생각지 하지 않습니다. 묵상이 없습니다.

③영지주의자의 특징-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
세 번째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의 육체로 오심을 부인합니다. 가현설(假現說)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 더러운 육체 가운데 거하실 수 있느냐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육체로 오신 것은 진짜가 아니라 가현이라는 것이지요. 가짜 현상…… (스크린에 비추어진 전병욱 목사의 모습과 실제 전병욱 목사님 모습을 번갈아 가리키며) 여기에도 두 가지 그림이 있습니다. 제가 있고 화면이 있습니다.여기 있는 모습이 저의 진짜이지요? 그런데 저것이 이것이 2차원에 안되니까 이렇게 보이지만 만약 3차원 홀로그램 같은 것으로 하면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요?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것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진짜 육체가 아니었고 하나님의 홀로그램, 진짜 육체가 아니라 육체같이 보였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되게 멋있게 않습니까? 이런 식의 증거라고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은 육체로 신성을 강조하면서 이 땅에 육체로 임하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이 땅에 영지주의자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내용들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대로 있는 주장입니다. 21세기 용어로 질문을 던져보고 21세기 용어로 답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답을 해야 합니다. 충분히 답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도전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답할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에서 답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답해야 합니다.

세 가지 질문을 현대적 용어로 답해 보겠습니다.

1.기독교는 상상의 산물이다?
첫 번째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불신의 이유라고 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기독교는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소리 많이 들어 보셨지요. 혼자서도 이런 생각을 해 보지 않았습니까?
영지주의자들이 자기 자신의 체험을 투영해서 그리스도를 그렸듯이 우리도 마음 속에 깊이 원하는 희망사항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투영해서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냐, 자기만족을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반기독교단체에서 이런 논리를 많이 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투영해서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런 것의 이론적인 뿌리를 제공한 사람이 있습니다. 복잡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할 수 없이 하는 것입니다. 포이에르 바하, 또 하나는 프로이트, 이 두 사람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포이에르 바하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인간 모두가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경험에서 나온 오류에 불과하다. 마음 속에 있는 것을 투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라는 것이 왜 나왔느냐 하면 인간이 영생하고 싶은 인간의 갈망을 표현한 것이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용어로 이렇게 얘기합니다. 창세기에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들을 인간을 창조했다고 성경에 나와 있지 않느냐, 웃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형상으로 하나님을 창조했다고 얘기합니다. 종교라는 것, 하나님이라는 것은 실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마음속에 있는 염원을 투사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기독교를 알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종교에 관한 상상을 가지고 한 접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기독교 이외의 종교들을 보면 인간의 상상의 투영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런 냄새가 많이 납니다. 기독교도 타락한 모습 중의 하나가 기복종교라고 하지요. 기복종교는 내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투사해서 그것을 믿는 것이지요. 그런 신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 종교에서는 타당성이 있을지 모르지만 기독교에서는 전혀 아닙니다. 체험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체험했다…… 체험했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보면 결국 자기 소원을 투사한 하나님을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껍데기는 기독교인데 속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소원을 투사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경적 기독교가 중요한 것입니다.

포이에르 바하는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성경이 뭔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교회에 온 사람들을 보십시오.
교회처음 올 때는 뭐하러 옵니까? 교회 가면 좋아요, 좋아서 왔다고 합니다. 복도 받고 마음에 평안도 있고 이래서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치밀하게 공부해 보세요. 그런 꿈이 다 깨어져 버리지요. 우리가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듣기 싫어하는 죄에 대해서 폭로합니다. 성경 읽을 때마다 죄 죄 죄 죄…… 너는 죄인이래요. 듣기 싫습니다. 귀 막고 싶습니다.

교회에 어떤 마음으로 왔습니까? ‘삼일교회 가면 예쁜 여자 많다며?’ 하면서 왔는데 그런데 성경에는 제대로 읽어보면 껍데기는 아무 것도 아니고 속사람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내 의지를 투영한 것입니까? 뭐가 투영입니까? 내 의지를 다 깨어 버리는데 박살내 버리는데 무슨 투영입니까.
또 인간이 자존심이 있지 않습니까? 나의 선행, 공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원하는데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얘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얘기합니다. 우리는 묻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어디 없나 하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너는 빵! 제로라고 합니다. 화가 안 납니까?세상에 이런 종교가 어디 있어! 내 모든 자존심을 다 깨어 버리네!

우리는 무슨 힘을 얻어서 세상을 지배하고 싶잖아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에서 1등하고 공부 잘하고 돈도 많고 이런 것을 원하는데 성경은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투영입니까?
여러분, 성경을 제대로 공부해 보세요. 인간의 욕망을 투영한 것입니까? 성경을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깨닫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 욕망을 박살낸다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그런 얘기를 했었지요. 제가 교육방송을 우연찮게 보았습니다. 거기에 불교특집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불교특집을 한 시간 넘게 보았습니다. 불교는 절에 올라갈 때도 계단이 8개씩 있다고 합니다. 팔정도라고 해서 다 의미가 있습니다. 문마다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문, 두 번째 문, 세 번째 문…… 문마다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불교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너무 합리적입니다. 죄를 많이 지은사람은 개, 돼지로 태어나고 착하게 산 사람은 성불(成佛)하고 어떻게 그렇게 마음에 딱딱 와 닿는지,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납득도 잘 되고 이해도 잘되고 하나도 모순이 없습니다. 그냥 우리의 본성과 딱딱 맞아 떨어집니다. 야! 참 기가 막힌 철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제가 내린 결론이 있습니다. 불교는 너무 인간냄새가 납니다. 불교는 인간이 만든 것이 확실하구나! 내가 만들어도 머리 좀 잘 쓰면 그렇게 만들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주 합리적입니다. 인간의 본성과 딱딱 맞아 떨어져요. 그래서 내린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불교는 인간이 만든 종교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떻습니까? 도대체 이렇게 비합리적이고 인간냄새가 안 나는 것이 없습니다. 만약에 인간이 만들었다고 합시다, 인간 마음의 투영이라고 칩시다. 그러면 삼위일체 이런 이론을 만들 것 같습니까? 삼위일체, 이 이해도 안 되는 이야기…… 셋이 하나라고 합니다. 절대 셋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해하기 쉽게 삼신론(三神論) 비슷하게 만들면 좋잖아요. 마징가제트처럼 세 개로 분열, 그리고 합쳐짐…… 그러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텐데 그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셋은 셋인데 본질은 하나이고…… 이 삼위일체 때문에 얼마나 전도에 방해가 되는 되는지 아십니까? 만약에 인간이 만들었다고 하면 삼위일체를 만들었을 것 같습니까? 안 만들지요. 설교하기도 힘든데……

하나님의 절대주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동기부여가 안 됩니다. 사람을 동기부여하려고 하면 너도 좀 해 봐라. 너도 능력이 있어야지, 헌신해야지, 이래야 동기부여가 되는데 기독교는 도저히 인간이 낄 자리가 없습니다. 인간이 만들었다고 하면 이렇게 만들 것 같습니까?

만약에 제가 전병욱교를 만든다면 이렇게 만들겠지요. 이 기왓장에 글씨 하나를 쓰면 덕이 쌓여서 좋은 데를 가고…… 인간이라면 이런 식으로 만들 것 아닙니까? 합리적으로 계측이 가능하게 계량적으로 만들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까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까 그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만일 인간이 만들었다고 하면 부활, 이런 말 안 합니다. 영의 부활, 정신의 부활이라고 말해야지요. 정말로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다고 하면 믿을 것 같습니까? 이것은 예수님 당시에도 이상하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성경의 핵심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잘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어떤 한 부류, 좀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순적인 얘기를 합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종교는 인간마음의 투영이라고 합니다. 인간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종교는 합리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합리적인 종교들, 설명이 가능한 종교들은 다 인간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주장하는 논리, 그들의 칼, 골리앗의 칼을 가지고 골리앗의 목을 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를 봅시다. 이것이 인간 마음의 투영이라고 하는데 이 세상에 삼위일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것이 투영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절대주권, 이것이 투영되었습니까? 부활, 이것이 투영되었습니까? 그럴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기독교를 공격할 때 비합리적이라고 말하는 모든 것, 그 비합리적이라는 사실 때문에 기독교가 오히려 믿을 만한 것 아닙니까?

적어도 세상 사람들이 공격하는 비합리적이라고 얘기하는 모든 부분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신화라고 말하는 많은 부분들이 사실은 기독교는 인간 마음의 투영이 아니라는 물증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그들의 논리를 가지고 그들을 깰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우리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하십시오. ‘성경공부 좀 해 봐라. 인간이 만들면 이렇게 만들겠니?’ 인간의 본성과 충돌이 일어나는 얘기가 많아요.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기독교가 되기 위해서는 체험으로 나가면 안 됩니다. 성경중심적인 신앙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본질적인 믿음과 접할 수 있습니다. 성경공부는 안 하고 체험만 중시하다 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전부 다 기복신앙으로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의 투영, 내 마음이 원하는 하나님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속에 들어가야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실성은 인간 이성과의 충돌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진리의 말씀입니다.


2. 고난이 있는 현실에 하나님이 설 자리가 있는가?
두 번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신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영육이원론과 마찬가지로 고난이 있는 현실에 하나님이 설 자리가 어디 있느냐는 얘기를 합니다.
삼단논법으로 얘기를 하는데 이 사람들이 도전하는 것은 이런 논리입니다. 지겹도록 들은 얘기입니다.
첫째 논리, 하나님은 전지전능하다,
둘째 논리, 하나님은 완벽한 선이다.
셋째 논리, 그런데 이 땅에 고난과 악이 존재한다.
이 세 가지 삼단논법으로 나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고 하나님은 선이시다. 그런데 이 땅에 악과 고난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악이 존재하는데 악을 없애지 못한다고 하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것이 아니지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악을 없애지 못할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악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전능한 것이 아니잖아요.
또 하나 뒤집어서 하나님은 악을 없앨 수 있어요. 그런데 안 없앴어요. 전능한데 없애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선하지 않지요. 아침부터 헷갈립니까? 전능하고 선하시다면서요? 그런데 악은 존재합니다. 악을 없앨 수 없으면 전능한 것이 아니고 없앨 수 있는데 안 없앴으면 선한 것이 아니잖아요.

어렸을 때부터 맨날 질문하던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선악과를 왜 만들었냐는 질문과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안 만들어서 죄를 안 짓게 만들 수도 있었는데 왜 만들었느냐, 선악과를 안 만들 수도 있었는데 만들어서 죄를 짓도록 놓아둔 것을 보면 어떻게 선한 분이냐, 그러므로 죄는 인간이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은 것이다, 이따위 논리로 나가잖아요.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말만 다를 뿐입니다.
이런 식의 접근에 대해서 뭐라고 대답을 할 것입니까?

이 문제를 제일 많이 다룬 사람이 누구냐 하면 C.S.루이스입니다. 고통의 문제라는 좋은 책이 있는데 우리나라에 나와 있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홍성사에서 나온 책이 있고 크리스찬서적에서 나온 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번역을 일대일로 해 놓아 가지고 읽어 보아도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습니다. 읽어보면 다 좋은 얘기인데 도무지 잡히지 않습니다. 이거다 하고 잡히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책은 번역을 할 때 조금 번안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사정에서 이해할 수 있게 바꾸어야 되는데 문장 그대로 바꾸어가지고 번역은 틀린 것이 아닌데 알아들을 수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내용은 이것입니다. C.S.루이스는 전능이라는 것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자기 멋대로 하는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Ludwig Josef Johann)의 언어분석과 비슷하게 접근을 합니다. 언어의 한계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 문장에 모든 것을 치환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죄도 지을 수 있다. 마귀도 될 수 있다. 언어 안에는 무엇이든 다 집어넣을 수 있지요. 그러나 그것은 언어 안에서의 장난이지 본질이 바뀔 수는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네모난 원이 존재하는가, 이런 얘기를 예로 듭니다. 네모난 원이 존재합니까? 말은 되지요. 그러나 현실에 가면 이것은 말이 안 됩니다. 네모나다는 개념 안에서는 또 다른 개념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원이 될 수 없습니다. 네모난 것이 네모지요. 네모난 것이 동시에 원으로 될 수 없잖아요. 이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가 없으신 것이 본질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을 갖고 말장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개념 안에 선함과 죄없음이 포함되어 있는 개념이지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 자체에 모순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물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자유의지, 행동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당연히 고통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자유 안에 고통이 포함되어 있는 것 아닙니까? 자유를 잘못 선택하면 고통이 당연히 포함되게 되어 있습니다.
거꾸로 뒤집어 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고난을 다 거두어 가신다고 하면 우리 삶의 귀중한 것도 거두어하는 가는 것입니다. 그 논리입니다.
이해가 안 됩니까? 우리에게 처녀총각들이 많이 있는데 짝짓기가 힘들지요. 고난이지요. 짝짓기 쉽습니까? 탁월한 외모를 갖고 있거나 이런 사람이면 쉽겠지만 힘든 일입니다. 오늘도 나올 때 화장하고 얼굴이 그림 그리고 나오느라 참 고생 많으셨고 남자들도 괜히 배 가리느라 지금 복대하고 있는 사람들 있지요. 힘드셨지요? 짝을 찾는다는 이 자유는 고난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 속은 모른다고 남녀의 서로 다른 마음 알 수 있습니까? 모르잖아요. 탐색하고 물어보면 압니까? 대답해 줍니까? 또 대답해 주어도 어떻게 믿습니까? 모릅니다. 미끼를 던져 보고…… 조금 사귀려고 하면 라이벌이 생기고 설레는 마음, 흔들리는 마음, 데이트 한 번 나가려고 하면 무슨 이야기 할까, 남자끼리 모여서 리허설하고…… 피곤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피곤하게 삽니까!

고난이 있지요. 자유연예 안에 고난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참 힘든 일입니다. 마침내 어렵게 결혼해서 신혼여행까지 갔다 옵니다. 가끔 싸우긴 하지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이지요. 그것을 연예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좋아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연애 안에 고난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가르쳐 준다고 합시다, 결론적으로 너는 누구와 운명이다, 너는 누구와 짝이다 그러면 신혼여행 갔다 올까요? 귀찮은데 친구 대신 보내고 그럴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과정 자체가 하나님께서 나엔가 주신 축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8월15일에 대천해수욕장에 해변축제를 떠나게 됩니다. 우리는 갔다온다는 목적의식 가지고 있는데 사실은 교제의 의미에 있어서는 내려갈 때 기차를 타고 내려가든 버스를 타고 내려가든 내려가는 그 자체가 복 아닙니까? 그리고 거기에서 어렵게 수영하고 하는 것이 복 아닙니까? 수영할 때 고난이 따릅니까, 안 따릅니까? 수영 잘못해서 짠 물을 삼키는 것을 기분 좋아할 사람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그 고난을 고난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 자체가 즐거움이라고 생각하잖아요. 또 돌아오는 과정들, 인생 자체에 하나님께서 자유를 주셨다는 것은 고난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더 많은 은혜와 권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그 안에는 고난이라는 개념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렇습니다. 성경은 고난을 악이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고난을 악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고난은 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밭을 옥토로 만들 수도 있고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깊게 만들기도 하시고 고난을 통해서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만드십니다. 고난이 오히려 우리를 지키는 파수꾼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18절에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고난에는 뜻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고난과 다른 접근을 해야 됩니다. 로마서 8장28절을 보니까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이런 접근이에요.

그러므로 영지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고난에 대해서 회피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고난을 이겨나가면서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고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다르잖아요. 우리는 고난과 정면승부합니다. 고난을 피하지 않아요. 이스라엘은 택한 백성이라면서요. 그런데 40년 동안 광야의 고난길을 걷게 하잖아요. 그것이 복이라고 하잖아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라고 하잖아요. 하나님이 고난의 길을 이끌어 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악이라고 하는 그 악한 길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보는 시각에서는 악이지만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그것이 복입니다.

눈이 바뀌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시각에 대해서 너희들은 참 근시안적인 사람들이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면 됩니다.

3. 예수님이 육체로 오시지 않았다?
세 번째입니다. 불신의 이유, 신성과 인성이 동시에 있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이 육체로 이 땅에 오신 것을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계몽주의적 세계관에서는 맞는 이야기이지만 양자이론이 나온 다음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빛이 입자입니까, 파장입니까? 둘 다 된다고 했지요. 입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실험하면 입자가 되고 파동이라고 생각하고 실험하면 파동도 되는…… 그러니까 우리가 자연세계의 모든 것은 부분적이고 단편적으로 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스피노자가 했던 이야기를 많이 인용합니다. 한 인간을 하나님이자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네모난 원과 똑같은 것이다. 네모난 원 이론을 처음 얘기한 사람이 스피노자입니다. 네모난 원은 모순입니다. 왜 모순이지요? 이것은 지도 위에 같은 공간을 차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네모와 원은 지도안에 같은 구간을 차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둘 다 기하학적인 모양이기 때문에 이것은 모순입니다. 그러나 2차원이 아니라 3차원이 된다하면 동시에 겹쳐 보일 수도 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깊이가 있다고 하면 x축과 y축과 z축이 있다고 하면 입체적으로 우리 눈에 겹쳐 보일 수도 있잖아요. 차원이 다를 때는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공통분모가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여기에 공통 부분이 있습니까? 하나님이라는 차원하고 인간이라는 차원에 공통 부분이 있나요.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혀 다른 차원에서는 두 가지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되시고 인간도 되는 것이 아무 문제도 없다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상호배타적일 때는 공존할 수 없지만 상호보완적일 때는 공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스터 맥그라스는 유럽에서는 이렇게 설명하면 사람들이 쉽게 이해한다고 얘기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이 이해가 잘 안되는데…… 예를 들어서 토마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토마스는 영국인이다, 맞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스위스로 이민을 갔다고 합니다. 그러면 스위스 국적도 얻을 수 있는가 봅니다. 이중국적이 가능한가 봅니다. 토마스는 영국사람이다, 동시에 스위스사람이다. 둘 다 맞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이중국적이 가능하기 때문에 토마스는 영국사람이다, 이것도 정답, 토마스는 스위스사람이다, 이것도 정답,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이중국적을 갖게 한다면 000은 한국사람이다, 000은 미국사람이다, 이것이 가능합니다.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같은 차원에서는 안 되지요. 토마스는 영국이 있다, 토마스는 스위스에 있다…… 한 사람이 어떻게 두 군데에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차원이 다를 때는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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