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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빌 01: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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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나라가 월드컵 열기로 뜨겁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있었던 포르투갈과의 경기는 멋진 승부였습니다. 물론 승리의 주역은 한국 선수들입니다. 그러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히딩크 감독입니다. 국민들이 얼마나 히딩크를 사랑하는지 어느 회사는 신문에 전면을 빌려 히딩크 감독을 모델로 연일 광고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히딩크의 진정한 능력입니까? 언론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숱 한 패배에도, 비난에도 끝까지 소신을 지켰다’. 소신 있는 삶, 목표를 향해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그의 집중력이 마침내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엄청난 승리의 감동을 안겨 주었습니다.

예수님께 시선집중
성도들이 죽음을 넘어 천국 문으로 향할 때, 우주는 박수갈채를 보낼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지키고 선한 싸움에서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승리에 대해 성경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를 깊이 생각하라.” 여기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의미는 ‘철저히 연구하다, 시선을 고정하다, 한 곳에 모든 생각을 집중하다’는 뜻입니다.

조련사들이 개를 훈련하고 나서 반드시 테스트 과정을 거칩니다. 조련사의 명령에 얼마나 순종하는지 점검합니다. 먼저 며칠동안 개를 굶깁니다. 그리고 개를 데리고 나가 고깃덩이를 던져줍니다. 고깃덩이를 보는 순간 개는 쏜살같이 달려갑니다. 그때 조련사가 서라고 명령하면 곧 멈춥니다. 개는 조련사의 명령을 듣는 순간, 고깃덩이를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조련사의 입술에 고정합니다. 그리고 귀를 세우고 다음 명령을 기다립니다.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기본적인 원인 중 하나는 정확한 기준이 없다는 것 입니다. 기준이 있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기준이 분명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예수님께 집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마음이 낙심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수님께로 향했습니다. 어느 때에는 동료들을 배에 태워 먼저 보내고 자신은 육로를 택해 밤새도록 거친 길을 걸었습니다. 고독한 삶 가운데 오직 주님만이 동반자이심을 신뢰하며 자신을 쳐서 그리스도가 가득 채워질 때까지 걷고 또 걸었습니다.

주님이 책임지시는 사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 다메섹 도상에서 찾아오신 주님,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아낌없이 대가를 치르신 주님, 당신에게 속한 자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 바울은 주님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람은 예수님이 책임져 주신다.”

예수님을 핍박한 자신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주님이 예수님을 위해 감옥에 갇힌 자신을 어찌 구해 내지 않으시랴! 확신한 바울은 결코 타협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무릎 꿇지 않습니다. 사방이 막혀도 하늘을 향해 무릎 꿇고 기도하며 외칩니다. 사도 바울의 그 외침이 본문에 있습니다. 20절 말씀을 바울의 심정으로 읽으면 좋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바울은 자신의 삶이 예수님 앞에서 흠 없고 순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우리는 어렵고 힘든 세상을 살아가지만, 바울처럼 순전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수고해야 합니다. 몸은 어두움 중에 있을지라도 마음은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고백합니다. 육체는 악하고 더러운 구덩이 속에서 있을지라도 영혼은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추구합니다.

우리가 마음과 영을 다해 그리스도를 갈망할 때 정직한 자의 빛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를 짓누르던 어둠의 권세가 깨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 날이 있도록 우리 함께 순전한 믿음을 지킬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바울이 승리를 장담하고 자신의 무죄와 구원을 확신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바울은 자신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비록 본인은 포기하더라도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빌립보교회가 있습니다. 또 바울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성령님이 구원해 주실 거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버려진 상태로 감옥에 갇혀 있지만 자신을 구원하실 하나님의 능력을 알기에 기뻐합니다. “이를 인하여 내가 또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이루실 줄을 내가 확신함이니라.”

세상이 무너지고 권세가 바뀌며 기업이 부도난다 하더라도 하나님 아버지는 결코 무너지지 않으며 부도내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계획할지라도 경영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삶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남기지 말고, 숨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삶을 의탁하는 자를 책임져 주십니다.

테레사 수녀는 작은 마을로 가는 기차 안에서 소명을 받고 1984년 8월 8일 인도 캘커타로 향했습니다. 그녀는 성경과 찬송 각 한 권, 수녀복 한 벌을 입고 떠났습니다. 그녀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한 벌의 옷이 헤어지면 무엇을 입을지 알지 못합니다. 오늘밤 어디서 자야 할지 모릅니다. 내일 아침 어디서 무엇을 먹을지도 모르고 당신의 부르심에 순종함으로 떠납니다. 나의 일생을 당신이 책임져 주시고 비천한 여종을 사용해 당신의 이름이 존귀히 되기를 원합니다.” 모든 것을 맡기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주님을 향해 나갔습니다.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기 위해 자신을 위탁하는 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자, 하나님은 그 영혼을 책임져 주십니다.

예수님께 맡김으로 얻는 행복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제는 신입 선교사 헌신 예배에서 김사무엘 목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저는 선교사로서 19년 동안 살았습니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저는 행복합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마음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도 저런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김 목사님은 아들 삼형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가장 큰 축복을 가르쳐 주겠다. 선교사가 되어라.” 그리고 마가복음 10장 28-30절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주님을 위해 갈대아 우르 땅을 포기했을 때 대신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롯이 하나님을 위해 모압 땅을 포기하고 나오미를 선택했을 때 하나님은 보아스를 예비해 두셨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먼저 주님을 위해 세상 것들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어디까지 버려야 합니까? 바울은 21절 말씀에서 이야기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살고 죽는 것까지 버린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신앙 고백입니다.

예수 믿는 재미
사람들은 재미가 있어야 살맛이 난다고 얘기합니다. 돈 버는 재미가 있고 맛있는 음식 먹는 재미가 있고, 자식 자랑하는 재미가 있어야 살기 좋다고 합니다. 이런 말들은 바울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바울의 삶이 비극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바울에게도 사는 맛이 있습니다. 곧 예수 믿는 재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믿으니 사는 재미가 넘쳐납니다. 그 재미가 얼마나 좋은지 바울은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바울의 사는 재미 세 가지를 들어보겠습니다. 바울은 죄사함을 얻는 재미가 있다고 합니다. 자기의 실수와 허물을 처리하지 못하는데 예수의 십자가 앞에 가면 해결되는 재미가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회복되는 재미가 있습니다. 죽은 자가 일어나고, 병든 자가 고침 받고, 마음에 근심 있는 자들이 회복되는 재미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었더니 사람 낚는 재미도 생깁니다.

사도 바울은 생각할 수록 즐겁고 기쁩니다. 그래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그리스도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재미로 살맛 나는 인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나아가 사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죽는 거라고 합니다. 예수 믿고 ‘사는 것’만 재미있는 줄 알았더니 예수 믿고 ‘죽는 것’은 더 재미있다고 말합니다. 예수 안에서 죽으면 모든 악으로부터 자유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는 재미가 있습니다. 월드컵으로 온 국민이 환호성을 치는데, 신령한 몸으로 변화돼 금성에서 월드컵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은하수를 넘어 아웃리치갈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황무지에 창조 질서와 말씀을 따라 금성 땅을 일구고 나무를 심어 생명이 있게 하는 일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 안에서 죽으면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 할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부활은 놀랍고 아름다우며 완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삶
죽음에 대해 기뻐할 사람,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다’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선지자 발람은 거짓 선지자였지만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인으로 죽기 위해 의인으로 살아야 하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죽기를 갈망한다면 지금 내 안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주인은 누구이며 인생의 핸들을 누가 잡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을 위하여 삶의 주권을 내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인생의 핸들뿐 아니라 살고 죽는 결정권까지 참된 주인이신 주님께 위탁하고 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오직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22-26절 말씀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살고 죽는 것까지 주님께 맡긴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의 영광입니다. 사도 바울은 죽기를 더욱 원하지만 사랑하는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 껍질뿐인 육체 가운데 거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사람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조지 워싱턴 카버 박사는 1860년쯤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일조차 모르는 노예의 자식이었습니다. 흑인 노예였던 그는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1943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흑인·백인을 불문하고 모든 미국인들이 존경과 애도를 표했습니다. 그는 미국 제일의 과학자로서 일생을 마감했습니다.

한 때 미국 남부 지방은 면화 재배로 유명했습니다. 그런데 면화는 땅에서 질소를 빼앗아 간다고 합니다. 면화를 오랫동안 재배하면 땅이 황폐해져 아무 것도 살 수 없는 버려진 땅으로 변해 버립니다. 미국 남부 지방이 면화 재배로 인해 황폐하게 되자, 미국 경제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카버 박사가 땅콩 재배를 제안합니다. 땅콩을 심으면 땅에 질소를 공급해 비옥해진다고 했습니다. 카버 박사의 제안에 따라 남부의 모든 농민들이 땅콩을 심었습니다. 놀랍게도 땅콩 농사는 성공을 거두었고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그런데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농민들은 저마다 땅콩을 심어 엄청난 수확량으로 인해 판로가 문제였습니다. 카버 박사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10월 어느날 새벽, 나는 너무나 마음이 괴로워 해뜨기 전에 산으로 들어가 거닐다가 동쪽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부르짖었다. 하나님이여, 왜 나에게 땅콩을 심게 하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땅콩을 한 줌 들고 연구실로 들어가 연구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길로 카버 박사는 연구실에서 밤낮없이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땅콩을 이용해 마가린, 비누, 화장품, 구두약 등 음식 105가지, 생활용품 200가지를 발견했습니다. 이로 인해 남부인들은 부를 얻게 되었고 미국 경제도 회복하였습니다.

카버 박사는 자신이 발견한 그 어떤 것에도 로열티를 받지 않았습니다. 모든 지혜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남부 농민들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일조차 알지 못하는 노예의 자식, 조그마한 땅콩! 그러나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자기 안에 사시는 것을 믿었습니다. 볼품없는 그가 볼품없는 땅콩으로 미국의 경제를 회복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자신의 모든 것을 위탁한 믿음의 사람의 선택입니다. 여러분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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