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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에 대한 감사 (갈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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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감사가 없다는 것일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에 감사가 있을 때와 없을 때를 가만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감사가 있을 때에 우리의 삶이 풍성했습니다. 감사가 없을 때에는 우리의 마음부터 메말라서 결국은 우리의 삶도 완전히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감사를 하면 없는 가운데서도 우리의 삶은 항상 밝습니다. 그러나 감사가 없으면 우리들이 아무리 풍성해도 삶이 어두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떻게 하면 감사하며 살 수 있을 것인가를 우리는 항상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머리로는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입술로는 감사하면서 살아야지 하면서 삽니다. 그러나 막상 우리의 삶 속에서 외적인 감사의 조건이 발견되지 않을 때에는 우리의 입술에서 찬양이 사라지고 감사가 없어지게 됩니다. 심지어 우리는 조그만한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에 감사는 커녕 도리어 원망과 불평을 하는 일들까지도 서슴치 않게 되는 자신들을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감사가 없는 삶의 문제는 남들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의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가지고 감사하고 있습니까? 사업이 잘 되니 감사합니까? 자녀가 잘 되니 감사합니까? 건강하니까 감사합니까? 뭔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었기 때문에 감사합니까? 그렇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다 감사의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러한 모든 것들이 없을 때에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원망하시겠습니까? 불평하면서 신세를 한탄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감사의 조건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조건들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의 감사가 단순히 육체적인 것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감사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이 육체적인 것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진정한 감사의 생활을 하려면 여기에서 초월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정말 이 육체적인 문제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습니까? 바울이 본문에서 감사의 근거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구원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구원에 대한 은혜를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감사가 없는 것은 이 구원에 대한 은혜를 깊이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정말 그 혹독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이 구원에 대한 감사로 죽음의 공포를 하루하루 견뎌가면서 신앙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동굴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 동굴이 카타콤베라는 곳입니다. 그러한 곳에서도 그들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있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천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이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구원에 대하여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산다면 우리는 이 혼탁한 세상 속에서 제자로서의 삶을 넉넉하게 살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감사해야 할 일이 바로 우리가 받은 구원에 대하여 감사하는 일입니다. 구원에 대한 감격이 없기 때문에 우리들은 불평하고 좌절하고 삶을 어려워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면 바울은 먼저 구원에 대하여 감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적인 근거가 없어도 단지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구원은 어떠한 구원입니까? 도대체 우리가 받은 구원은 우리의 감사의 조건이 될 수 있는가 말입니다.

1) 구원의 근거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감사의 조건이 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4∼5절을 읽으십시오.
4∼5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바울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뜻입니다. 구원이란 나의 힘과 나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구원을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이길래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을 이미 작정하시고 나를 구원하시고자 하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나를 하나님은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내가 노력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내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지만 내가 예수를 거부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구원은 이렇게 내가 뭔가를 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타락한 이후에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사상입니다.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은 하나님을 스스로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3:10∼12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합니다. 정말 인간은 그 어떠한 것을 가지고도 깨달아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비참함을 로마서 1:19∼23에서는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 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고 합니다.

만일 인간이 뭔가를 할 수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실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요한복음 6:40에서는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구원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지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조차도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3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합니다. 또 고전2:12에서는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들이 바로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아래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획에 의해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는 구원을 받을 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는 사람들이고, 우리는 정말 구원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는 때로는 이 세상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자로 취급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같이 하나님 앞에서는 특별한 존재로 취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러한 사람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직도 우리에게 감사가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가 공로가 있어서 구원을 얻은 것처럼 말하는 자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구원을 받은 우리는 이제 마땅히 하나님께 찬양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찬양은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2) 구원의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감사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때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4절을 다시 읽읍시다.
4∼5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본문에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고 선언합니다. 사실 우리들을 돌아볼 때에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악만을 가지고도 지옥에 가도고 남는 자들입니다. 거기에다가 우리는 생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죄악들이 있습니다. 그 죄악이 원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신 희생적인 사랑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기를 기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희생적인 사랑이 어디에서 나타났습니까?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고 하는데 어디에서 이루어 진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 위에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처음부터 십자가를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갈라디아서 마지막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고 있지만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요? 십자가에서 모든 것이 다 이루어 졌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뜻은 바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언약은 생명의 언약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생명이 피에 있다고 합니다. 생명이 피에 있기에 언제나 우리의 속죄에는 피가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대신하여 완전하고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는 말씀은 바로 이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2:16절에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희생적인 사랑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 희생적인 사랑으로 인한 그의 구원이 우리에게 미친 것이라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갈라디아 교회를 어지럽히던 이단들은 기독교의 구원이 너무나 쉬운 것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선행을 해야 했고, 또 때에 따라서는 혹독한 고행을 해야 구원의 경지에 이르는 것으로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단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까 이렇게 너무나 쉬운 방법으로 인간이 과연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에 회의를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종교에 지나치게 몰두해 있다가 보면 종교를 어떤 틀에다가 묶어두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자기들이 생각하는 종교의 틀을 벗어나서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단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그 구원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종교적인 행위가 수반되지 않은 이러한 기독교의 진리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기독교가 제시하는 방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적인 사랑이 구원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도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구원이 너무나 쉬워서 그들은 이것을 핍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구원이나 해탈에 도달하거나 득도를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이 그들에게 요구되었습니까? 유대교만해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지도 않은 율법적인 조항들을 지키는데 매우 힘든 노력을 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조차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데 일반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들은 믿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단지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니 그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의 행태를 가만히 보면 이제 점차로 이러한 종교의 틀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지 염려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무엇을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기독교의 진리를 포장하려고 합니다. 그리고는 해마다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이 되면 그 때만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철새 같은 신앙을 가지고 살면서도 구원이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이 이렇게 주님께서 희생적인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그분 앞에 서는 그 날까지 우리들을 위하여 자기의 몸을 주신 주님을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도 우리는 정말 너무나 많은 것을 얻은 자들입니다. 내가 행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구원에 믿음으로 동참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감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아직도 마음 깊이 체험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사실 주님의 이와같은 희생적인 사랑을 알고 깨닫고 그것을 깊이 인식한다면 우리는 겸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겸손할 줄 알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크리스챤인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해도 아무런 감각이 없고 아무런 감동이 없는 사람은 구원에 대하여 다시한번 심각하게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우리가 그 어떠한 일을 만나도 감사할 근거가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사람은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하여 생명을 걸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은 절대로 세상과 타협하면서 살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항상 주님이 이렇게 더럽고 추악한 죄인인 나를 구원하셨다고 고백하며 날마다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줄로 압니다. 이제 이러한 감사가 넘치는 자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3) 구원의 장소는 악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본문은 4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4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우리의 구원이 '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악한 세대'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당시가 악해서 '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하셔야 했습니까? 과거 예수님 당시에만 악한 세대라서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입니까?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이 그 때보다 더욱 악한 세대인지도 모릅니다.
홍수 전의 사람들은 창6:5에서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라고 할 때에 '계획'은 히브리어의 의미로 '구조'라는 말입니다. 즉 그 '구조 자체가 항상 악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대에는 사람들의 구조가 선합니까? 아니면 악합니까? 아마도 모르긴 해도 노아의 시대나 주님이 오셨던 시대보다도 더욱 악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악한 세대'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바로 로마서 1:21∼23에서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 하나님의 영광을 ...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린 세대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행동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날의 사람들의 구조는 악하지 않고 선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더 악하면 악했지 그 때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악한 세대'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악한 세대'가 바로 지금 이 시대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사는 현세대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미 세상에 있지 말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이끌어 내서 저 세상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세대'란 그리스도를 알지 아니하는 세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않기에 영원한 멸망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이 세대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를 버려 두시면 우리는 그저 '악한 세대' 속에서 그들과 더불어 그대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영원한 생명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죽게 되고 그리고는 영원한 형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아 알 때에는 이미 늦은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악한 세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악한 세대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멸망을 시키셨습니다. 노아의 시대가 우주적인 멸망을 자초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멸망을 당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하지 않으셨다고 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멸망을 받을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죽을 수 밖에 없고 멸망 당할 수 밖에 없는 '악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영원한 멸망은 바로 영원한 지옥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멸망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은 '악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영원한 멸망 가운데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산다는 것은 크리스챤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악한 세대'에서 구원받은 우리들이 다시금 그 '악한 세대'에 돌아가게 된다면 구원받기 이전의 우리의 모습 보다 더 못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악한 세대'에서 영원한 멸망을 받아 마땅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들의 악을 따라서 그냥 살다가 죽어야 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 주심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감사의 조건이어야 할 것입니다.

4) 구원받은 자의 생활은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구원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본문 5절에서 바울은 바로 이러한 구원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5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편지의 인사말 마지막 5절에 주님께 찬양하는 내용을 싣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셨음을 확신하는 자라면 언제나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요리 문답에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인생의 제일 되는 본분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근심과 걱정과 염려와 불안한 모든 마음을 제거하게 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33에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환난도 없고, 근심도 없고 걱정도 없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조차도 이 세상에 사시면서 말할 수 없는 고난 중에서 사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인생을 사는 동안에는 있을 수 있지만 이러한 것이 올 때에도 감사하면 주님을 찬양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모든 것을 주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이기어 놓으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이미 이겨놓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구원이 여러분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된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장 최상의 감사는 바로 구원에 대한 감사입니다. 에베소서 1:3∼5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합니다. 바울이 찬송한 조건은 바로 그의 이 영원한 구원, 값없는 구원,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역사하셔서 주신 구원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베드로전서 1:3∼4를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도 역시 하나님의 구원하신 은혜에 이렇게 감사하고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구원을 얻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예정이요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구원을 위하여 행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에베소서 2:8∼9에서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자신의 자랑으로 삼고자 하니까 매사가 불평스럽지 않겠습니까? 자기를 내세우며 알아주지 않으니까 감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이 은혜를 우리들이 깊이 깨달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우리는 불평하고 때로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는 구원하신 은혜를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립니다. 정말 우리들이 이 구속의 은혜를 깊이 깨달아 알고 살아간다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내 공로로 얻은 구원이 아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기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체험하면 할수록 감사가 넘치는 것입니다. 감사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의 대부분을 보면 은혜가 식은 사람이거나 은혜를 전혀 받지 못한 사람일 때가 많습니다.

감사하는 삶은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감사할 때에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에게 감사의 조건을 주신 하나님께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구속의 은혜를 깊이 깨닫는 사람은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사하는 믿음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입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단순히 사색하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종교적인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 종교가 아닌 종교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구원을 받고 지금 이 자리에 앉았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바로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특별한 사람입니다. 나를 위하여 하나님이신 그분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주신 사랑으로서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악한 세대에서' 나를 지키시고 악에 물들지 않고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이 구원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날마다 찬양하면서 감사하는 삶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을 날마다 공급하시는 주님의 뜻입니다. 구원받은 자는 아무리 세상이 험악하고 어렵고 힘든 일이 있다고 해도 너끈히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입술에서 감사가 사라지고 원망과 불평이 찾아오고 있다면 이는 분명히 신앙에 적신호가 온 것입니다. 구원받고 예배하는 이 하나만 해도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감사는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바로 하나님께 늘 감사하는 것입니다. 입술에서 감사가 사라지고 없습니까? 짜증과 불평과 원망이 많아졌습니까?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조용히 묵상하시고 이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다시한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구원의 큰 감격으로 세상의 어려움을 모두 이겨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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