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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의 권위 (갈 0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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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권위를 찾아보기가 힘든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어디를 보아도 권위가 사라진지 오래되었습니다. 가정에는 부모의 권위가 있어야 하는데 부모의 권위는 사라지고 아이들의 권위만 살아있는 아이들의 천국이 되었습니다. 국가에는 법질서가 서 있어야 하는데 법집행자들의 자의적인 법집행으로 이미 땅에 떨어져 버린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여론에 밀려서 처벌을 하고 나면 사면을 통해서 슬그머니 풀어줍니다. 그래서 법은 약한 자에게만 강한 법이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에 가장 큰 문제는 정직성의 결여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떠합니까? 교회는 정직합니까? 교회는 권위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권위가 제대로 확립되어 있습니까?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너무나도 힘든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인 권위가 있다고 하면서도 설교자의 설교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본문에서 바울의 고백이 우리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고백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20절에서 바울은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라고 변호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왔던 거짓교사들이 얼마나 거짓말을 해서 바울의 전하는 복음을 거짓으로 몰아버렸는지 사도가 여기에서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여 말하기를 '거짓말이 아니라'고 했겠습니까? 거짓교사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교훈을 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없이 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변질시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한번 변질시키기 시작하면 그 말씀에 대한 권위는 사라지고 전하는 사람의 권위만 나타나게 됩니다.

바울은 권위 있게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씀을 권위있게 증거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과연 무엇입니까? 여기서 다시한번 그의 사도권에 도전을 한 사람들에 대하여 그의 복음에 대한 확신과 사역의 원리를 말함으로 인하여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은 어떠해야 하겠는가를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복음에 대한 확신(11∼12)
바울이 내세운 권위는 무엇입니까? 바울의 권위의 근거는 무엇보다도 생명을 걸 만큼 복음에 확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나 복음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들이 이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우리가 증거하는 복음에는 아무런 힘도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들도 지금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언제나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나 자신에게도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던 복음의 확신은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11∼12절을 보십시오.

11∼12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바울은 그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서 나온 것도 아니고,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사실 바울은 이 복음의 사역자가 되기 위하여 어떤 과정을 거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카타 안드로폰/사람을 따라)고 합니다. 그는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배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종교지도자들에게 배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유명하다고 하는 사도들에게도 배운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인하여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여기에서도 자신의 다메섹도상의 경험을 근거로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행 9:4∼26).

그래서 그는 17절에서 사도들에게 배우기 위하여 먼저 사도들을 만난 것이 아니라 아라비아로 가서 거기서 주님과 교제하면서 주님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음 것'을 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것은 다른 사도들이 받은 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이 그렇게도 예수를 믿던 사람들을 잔해하게 된 것은 복음에 대하여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복음에 대하여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다만 믿지 못할 뿐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는 것과 믿는 것이 별개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요즈음에 예수에 대하여 들어보지 못한 국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에 대하여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에 비로소 그 사람에게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 믿는 진리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는 사람에게서 권위란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얼마나 복음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는 자라야 만이 구원에 이르고 그의 말에 모든 사람이 신뢰하여 그 말씀대로 진리의 길로 돌아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말씀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앙이란 근본적으로 자신이 믿는 그것에 생명을 거는 행위를 말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악세사리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이상은 우리의 생명을 이미 여기에 걸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확신도 없이 교회에 다니고 확신도 없이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 그 사람은 어쩌면 불행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참맛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을 모두가 가지기를 원합니다. 개인적으로 예수를 영접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제 이 복음을 확신에 넘치게 증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2) 생명을 건 순종(13∼16)
그래서 바울은 이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생명을 건 순종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복음이 너무나도 확실하기에 자신의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것을 포기한 것입니다. 사실 회심 이전과 회심 이후의 삶이 완전히 달라진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바울입니다. 바울은 복음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생명을 건 순종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회심 이전과 회심 이후가 완전히 다른 삶을 삶으로 우리에게 크리스챤의 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들 중에는 구원을 받은 이전이나 구원받은 지금의 생활이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사람이 너무나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믿는 이 복음의 진리를 위하여 생명을 걸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의 회심 이전의 삶은 주님을 대적하고 주님께 대항하여 싸우는 투쟁의 나날이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13절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과거 유대교에 속하여 있을 때에는 모세 율법을 삶의 절대적 표준으로 삼고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자 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심하게 핍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단순히 핍박한 것이 아닙니다. 원문상의 의미는 '없애버리려고 애썼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살기가 등등하여 무고한 사람을 쇠사슬로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이 순교하는 자리에서 옷을 맡아 두는 자였습니다. 옷을 맡아 두는 자란 사형 집행관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이와같이 사람들만을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자체를 말살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그의 회심의 이전의 삶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바울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절대적인 표준으로 삼았던 유대교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교는 단순한 인간적 종교 집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왜 이렇게 핍박을 했습니까? 그 이유를 14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4절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는 유대교에 속하여 있을 때에는 모세 율법을 삶의 절대적 표준으로 삼고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대교를 지나치게(프로에코프톤/길을 밝히다, 숲에서 앞서서 길을 개척하다) 믿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그가 유대교에서는 앞서가는 지도자였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소위 요즘 말로 말하면 뜨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동기생들 중에 가장 잘 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유대교의 대학자인 가말리엘 문하에서도 뛰어난 제자였고 유대교에 속한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서 나아가는 장래가 촉망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는 유대인의 조상의 유전에 아주 충실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조상의 유전에 충실했던 유전은 바로 생활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관습법과 같은 것으로 랍비들은 613개 조항의 법 조문을 만들었는데 바로 이것이 유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바로 이 유전에 비추어서 기독교를 생각할 때에 기독교는 분명히 유대교를 해롭게 하는 집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앞서가는 유망한 젊은이답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핍박하고 교회를 잔해하는 것이 바로 유대교에 열심인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가 믿는 종교는 본서의 주제인 '은혜와 자유'에 반대되는 '율법과 행위'였기 때문에 이 두 가지가 도저히 화합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한 기독교는 하나님의 법을 변질시킨 이단자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를 없애버리려고 혈안이 되어서 진리가 아니 것에 생명을 걸고 정력을 다 쏟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회심 이후의 삶은 완전히 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15절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는 자신을 부르신 것은 단순히 다메섹 도상이 아니라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함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은혜로 부르신 것을 그는 깨달았습니다. 유대의 선지자들도 이와같을 고백을 했습니다. 이사야는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 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사49:1)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도 '내가 너를 복 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렘1:5)라고 합니다. 그는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하신 것을 확신했습니다.

사실 바울은 구원을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자신이 도저히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너무나도 처절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그를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하셨음을 그는 깨달았습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사실 자신은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미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은혜로 부르신 주님께 즉각적으로 순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생명을 걸고 순종하면서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전에, 우리가 예수를 만나기 전에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을 가장 나약한 인간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리고 조금은 별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구원을 받은 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우리의 생각은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구원을 얻을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하나의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세 전에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택정하시고 구원하기를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로마서 9:11에서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라고 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계획과 예정이 하나님의 백성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요 이것이 바로 우리의 커다란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큰 은혜를 깨달은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16절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사명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사명을 즉각 감당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그는 이 사명을 위하여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즉각적으로 순종했습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고 합니다.

그는 그 자신의 생에 있어서 유망하던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그의 보장된 미래도 버렸고, 부모도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배설물처럼 버렸노라고 고백합니다. 빌립보서 3:5∼9을 보십시오. '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5∼6절)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정말 그는 유대교의 입장에서는 완벽에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7∼9절). 그는 그리스도를 발견한 이후에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은 정말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사실 그가 이와같이 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직 복음으로만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을 대단한 모험이엇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유대교를 배반한다는 것은 죽음을 건 모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공동체에서 버림받을 것을 각오했고, 죽을 것도 각오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개종 이후에 바울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매일 살아가야 했던 기록이 사도행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고백했습니다(행20:24).

그의 이러한 행동은 지금 우리의 상황에서는 와닿지 않는 말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모슬렘권에서는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모슬렘을 버리게 되면 공무원에 임용되지 않습니다. 직장에서도 쫓겨 나야 합니다. 마을 공동체에서도 쫓겨나야 합니다. 심지어 가족들조차도 그들의 생존을 위해서 그를 버리게 됩니다. 그야말로 생명을 걸지 않으면 이렇게 복음에 즉각적으로 순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죽음의 위험을 무릎쓰고 부모와도 의논하지 않고 그는 즉각적으로 순종의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이러한 확신이 있습니까? 지금 당장에 여러분이 복음 때문에 어떤 고난을 당한다고 해도 그것을 견디고 승리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인하여 도리어 자랑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것은 오직 자신이 믿는 진리에 대한 확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복음으로 인하여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는 복음과 함께 기꺼이 고난을 당하고자 각오해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을 걸고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잘 살려고 하는 마음을 포기하면 됩니다. 예수를 통하여 출세하고, 영광을 얻기 위한 마음을 포기하면 가능한 것입니다.

이와같은 순종이 그에게 권위가 있게 했던 것입니다. 내가 복음에 순종하지 않고 내가 말씀대로 살지 않고, 내가 확신하는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내가 믿는 복음에 대하여 권위를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복음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멋진 사람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 멋쟁이가 되어야 합니다.

3) 복음을 위한 철저한 준비(17∼24)
바울이 예수님의 복음이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음성임을 확신하고 나서 그 말씀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이 복음에 대한 확신이 그로 하여금 순종하게 하였고, 생명을 걸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열정만을 가지고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다메섹의 경험은 아주 특이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확실한 체험을 바탕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철저하게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 했다고 합니다. 그가 혈육과 의논했다면 아마도 바울의 길을 방해하고 막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결심을 바로 실행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는 자신을 먼저 훈련하고자 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17절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라비아로 갔다가 ... 삼년만에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의 이론을 검증 받기 위하여 다른 사람과 비교분석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원하지 않고 오직 은밀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복음을 너무나도 확실하고 생생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미 11∼12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했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변론하기 위해서 여기에서 자신이 어떻게 준비했는지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혈육과는 물론 예루살렘에 있는 다른 사도들의 영향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통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특별한 계시, 즉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사역을 위하여 준비하는 기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복음의 내용을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18∼21절을 보십시오.

18∼21절 그 후 삼년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 오일을 유할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그는 3년만에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를 만났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사도행전 9:26∼30에 기록되어 있는데 버바울은 바나바의 소개로 예루살렘 교회에 베드로를 찾아갔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대략 2주 정도 베드로와 함께 지낸 적이 있습니다. 주의 형제 야고보를 만났는데 그 기간동안 그는 전도하면서 보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박해를 받아 광주리에 달려 예루살렘성을 도망쳐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 다시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21)으로 갔습니다.

아마 바울이 예루살렘에 머무는 동안 베드로를 통하여 예수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확신한 것은 누구에게 배운 바도 없지만 그의 복음은 사도들의 것과 완전히 일치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이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바울의 그 계시가 얼마나 완벽했으며 그의 사도직이 얼마나 든든했는지를 잘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와같이 그는 자신이 생명을 바쳐야 할 복음을 단순하게 준비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걸고 준비를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우리가 믿는 이 생명의 진리를 위하여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연구하는 것은 단순히 목회자의 몫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은 개인적인 것이지 집단적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풍성하게 서 있는가에 따라서 나의 신앙의 깊이와 넒이와 높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말씀에 사로잡혀서 사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확신한 말씀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이 말씀을 생명을 다하여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도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22∼24절을 보십시오.

22∼24절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는 이상한 눈초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확실한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가 이 복음을 생명을 걸고 증거할 대에 그들의 시선이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전에 내가 핍박하던 그 복음을 전하는데 그것도 생명을 걸고 확신있고 자신있게 전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돌아왔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내가 예수를 믿는 모습을 보고 내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까? 내가 전도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까? 확신에 찬 신앙만이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할 줄로 믿습니다.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일할 때에 이것이 가능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할 때에 전하는 말씀에 권위가 있습니다. 바울의 권위는 바로 이 확신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준비된 자가 복음을 철저하게 전할 수 있습니다. 준비하지 않으면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열정만 가지고 복음을 전할 수는 없습니다. 열정만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고 중간에서 실패하고 포기하고 말았던 사례를 우리는 교회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의 나의 모습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과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까? 이렇게 될 때에 우리들의 말 한마디에는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능력있게 증거하고 그 복음이 정말 능력이 있게 하기 위해서는 정말 권위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복음이 크게 확산되어 힘을 얻게 됩니다. 권위는 누가 세워주는 것이 아닙니다. 권위는 내가 스스로 세워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말 한마디면 보증수표가 되어서 별도의 서류가 없어도 되는 그러한 세상이 하루 빨리 와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세상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의 말에 먼저 권위가 있다면 복음은 급속도로 확산되어 질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믿는 믿음에 대한 사실을 확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확신을 가지고 거기에 생명을 걸고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훈련하고 준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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