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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신자와 결혼한 신자에 대하여 (고전 07: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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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중에는 결혼 후에 자신은 구원받았는데 남편이나 아내는 아직 회심치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의 가정에 어려운 문제가 야기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회개함으로 새로이 변화되었는데 구원받지 못한 자와 여전히 같이 지내야 합니까?”라고 묻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그들과 계속 살기를 원하는 한 이혼하지 말라고 답변합니다.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결혼 상태를 변화시키지는 않습니다. 변화시키는게 있다면, 그것은 결혼 생활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의 변화여야 합니다(벧전3:1-6에서 믿지 않는 남편을 둔 아내에게 베드로가 주는 충고에 주목하면)

(벧전3:1)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벧전3: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벧전3:3)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벧전3: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벧전3: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벧전3: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결혼은 근본적으로 육체적 결합이기 때문에(창2:24,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오직 육체적인 이유에 의해서만 파기되어질 수 있습니다. 간음이나 상대방의 죽음 등이 그 두가지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39절).(고전7:39)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그러나 불신자와 결혼해서는 안 됨을 잘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구원받지 못한 자와 결혼하는 것은 불순종의 행위입니다(39절에 “주 안에서만”이라는 말에 주의 합시다. (고후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 그러나 결혼한 후에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그로 인해 가정에서 야기되는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서 이혼이라는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된 남편이나 아내는 구원받지 못한 자신의 배우자에게 영적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이 사실상 바울이 강조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14절 말씀은, 구원받은 남편이나 아내로 인해 구원받지 못한 그들의 배우자가 구원받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위한 결단은 각 사람 스스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구원받은 자가 가정에서 그 영적 영향력을 발휘할 때, 구원 받지 못한 남편이나 아내를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어떠한가?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믿는 남편이나 아내의 영향력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남편이나 아내는 그 신앙의 영향력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변에는 헌신적인 신앙 생활을 하는 남편이나 아내가 결국 자신의 배우자로 하여금 구주를 믿게 만드는 사실은 늘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구원이 결코 결혼의 상태를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아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이혼을 한다면 그 가정의 자녀들은 사생아가 되고 맙니다(14절에서는 “너희 자녀도 깨끗치 못하니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내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고 그 뜻을 따라 이혼하지 않는다면, 장차 그 가정의 자녀들도 구원받을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에 친숙해져 있는 오늘날의 우리가 결혼에 대한 바울의 이 가르침이 당시 로마 세계에 얼마나 충격적인 영향력을 끼쳤을까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의 가르침은 종족이나 사회적 신분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 내에서 노예와 자유민, 남자와 여자, 부자와 가난한 자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교제할 수 있었던 유일한 장소는 아마 교회뿐이었을 것입니다(갈3:28). 그러나 이 새로운 평등성 역시 잘못 이해되어졌고 그 결과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켰습니다. 바울은 17-24절에서 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입니다. 그러나 개개의 신자는 주님께서 그를 구원하셨을 때 그가 처해 있었던 것과 똑같은 상황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제시하는 문제 해결의 원리였습니다. 즉,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언약의 육체적 표(標)인 할례를 지움으로써 이방인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되며, 그 반대로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받음으로써 유대인이 되려고 해서도 안 되었습니다. 또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동등하다고 해서 노예들이 그 주인에게 자유를 요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할 수만 있으면 자유하게 되라고 권합니다. 이처럼 각 사람들이 부르심을 입은 상태에서 그대로 행하라는 원리는 구원받지 못한 자와 결혼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됩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자가 이혼을 제안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15절 말씀이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인 남편이나 아내가 굳이 가정을 위해서 불신자와 살 의무는 없습니다. 우리는 화평에로 부르심을 받았고 할 수 있는 한 화평한 가운데서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롬12:18). 그러나 화평케 사는 것이 불가능할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즉,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믿는 남편이나 아내와 이혼하길 원하는 경우입니다. 그럴 경우 믿는 남편이나 아내는 오직 기도하고 주님께 계속 순종하는 것 외에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별거(別居)하고 있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인 남편이나 아내에게 이혼하고 재혼할 권리가 생기는가?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결국 다른 사람과 함께 살기에 이른다면 어찌할 것입니까? 물론 그것은 상대방이 간음을 저지른 것이므로 이혼의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그랬을지라도 바울은 용서하고 화합하라고 권고합니다(10,11절 참조). 바울은 야기될 가능성이 있는 문제들을 다 취급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어떤 규정적인 목록이 아니라 다만 영적 원리만을 제시할 뿐입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환경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대개 우리 안에 있는 것이지 우리 주변에 있지는 않습니다. 모든 문제의 핵심은 항상 사람들의 마음에 있습니다. 이혼을 해서 새로운 환경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부부들을 자주 봅니다만,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은 여전히 그들을 따라다닙니다. 한 그리스도인 변호사가 언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혼으로 인해 이득을 보는 사람은 변호사뿐이오”
이왕 남 좋은일 시키려면 건설적인 면에서 사랑이 포함된데서 해야지 부정적이고 파괴적인면에서 해서야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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