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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돈 어떻게 쓸것인가? (고전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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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휘해 모금하고 있는 연보에 대해서 서신을 통해 문의하였는데, 이는 곧 고린도 신자들의 신용에 대한 문의였습니다(갈2:10 참조). 바울은 그러한 그들의 질문에 담하고 나서 자신과 또 동료들의 전도 여행 계획을 알려 줌으로써 편지를 끝맺습니다.
이 장은 현재의 우리들의 필요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장을 통해 우리는 청지기 직분의 세 가지 범주, 즉 돈(1-4절), 기회(5-9절), 그리고 형제들(10-24절)에 대해서 아주 유익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오늘날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자원입니다. 이것들은 결코 헛되이 쓰여져서는 안 됩니다.


제 3 차 전도 여행 중 바울이 가장 중요시했던 일의 하나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특별 구제 헌금을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구제굼을 모으는 일에서 몇 가지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습니다.

원래 헌금의 개념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자신의 허물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그때 드리는 것을 제물이라고 합니다. 그 제사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로서 각양 양식과 제물에 대한 규례가 각기 달랐습니다. 이것이 곧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시에 드려지는 제물이었고 대신에 하나님은 그에 해당하는 인간의 허물을 용서해 주셨던 것입니다(레1:-5:)

이러한 제사는 신약에 와서 완전히 페지되었습니다 곧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히9:11)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요1:29,36) 스스로 제물이 되시어 자신을 드리심으로 완전한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히9:26, 10:12). 그 결과 더 이상의 제사는 필요없게 되었고(히10:11-14) 우리는 완전히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히10:14)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가 드려야 할 제사와 제물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2장1절에서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즉 이제는 그 어떠한 제물로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우리 스스로가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상한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앞에 나아가 회개의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서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가 곧 제사장의 역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제물은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께 드려졌던 바 신약에 와서는 우리 성도 개개인이 모두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께 직접 자신을 드리게 되기 때문에 베드로 사도는 우리를 가리켜 제사장이라고 한 것입니다.

(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반면에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헌금이 있었습니다. 곧 십일조와 헌물이 그것이었습니다(말3:8). 이 십일조와 헌물은 곧 곡식, 술. 기름, 양떼와 소떼의 처음 난 것들의 십일조를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기 위함이 아니라 성전을 돌보는 레위인들에게 주어서 그들의 양식을 삼기 위함이었습니다(레27:30. 민18:20-24. 신14:22)

(레27:30)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신14:22)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민18:20)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민18:21)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민18:22) 이 후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말 것이라 죄를 당하여 죽을까 하노라 (민18:23) 오직 레위인은 회막에서 봉사하며 자기들의 죄를 담당할 것이요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기업이 없을 것이니 이는 너희의 대대에 영원한 율례라 (민18:24)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
그 밖에 성전세라고 있는데 이것은 20세 이상 계수될 사람이 내는 헌금으로서 회막을 보수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출30:11-16) 이것을 오늘날 말하는 건축 헌금에 해당이 될 것입니다.
그 밖에도 헌금이라고 하지 않았지만 고아나, 과부, 나그네를 위해서 추수때 밭의 귀퉁이는 그냥 남겨두어야 했고, 흘린 낱알이나 이삭은 줍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과일을 딴 후에는 , 다시 과일 나무을 살펴 보지 않음으로써 가난한 자들이 따 먹도록 했습니다(레19:9-10) 그리고 매 3년 마다 소산의 십일조를 떼어 고아와 나그네들에게 주도록 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가난한 사람들의 양식이 되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것들은 오늘날의 구제헌금과 같은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영적인 도움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그 대가로 이방인들이 물질적으로 유대인들을 돕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울이 의도했던 한 가지 목적이었습니다(롬15:25-27). 몇년 전 예루살렘 공의회가 개최되었을 때, 바울은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는 일에 동의한 바 있었고 그래서 그는 자신의 서약을 지키려고 힘썼습니다(갈2:10).
(갈2: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바울은 복음만 전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도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왜 예루살렘 교회에 그렇게 가난한 자들이 있었을까? 오순절날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구원받았습니다. 이는 곧 그들이 직업을 갖지 못한 나그네들이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들을 보살펴 주어야 했습니다. 초대 교회 시절, 성도들은 자기의 소유물을 서로 기쁘게 통용(通用)하였습니다.

(행2: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행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행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행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행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행4: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행4: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행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행4: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그러나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물질은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큰 기근이 닥쳤고(행11:27-30). 그로 인해 구제금은 곧 바닥이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서약을 지키며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려고 의도도 있었지만, 바울이 구제금을 모으게 된 가장 큰 동기는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를 결합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보내심을 받은 전도자였고, 일부 유대인 신자들은 이 사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행17:21-25). 바울은 구제금을 통한 이방인들의 사랑으로 그 두 교회 간에 있었던 상처가 치료되고 그들 간에 가교가 세워지길 소망했습니다.(이 구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고후8-9장에 다루고 있다) 이 헌금은 특별한 구제금이긴 했지만, 바울의 교훈을 통해 우리는 성도의 청지기 직분에 대한 몇 가지 근본적인 원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1.첫째, 연보는 예배의 일부입니다.
모든 성도는 주일(主日)의 모임에 참석하되 자신이 그 해당 주(週)에 바칠 몫을 준비해 가지고 와야 했습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면서 매주의 첫 날에 모였었습니다(성령께서 강림하실 오순절은 주간의 첫 날이었습니다). 현대의 성도들이 연보를 하나의 의무로 인식하며 그것이 주님께 바치는 영적 예물이 되어야 함을 망각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빌4:18). 연보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께 드리는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2. 둘째, 연보는 체계적이어야 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초대 교회 당시 성도들의 대부분이 주일(週日) 첫 날에 연보를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비록 첫 날에 연보하지 않았더라도 각 신자들은 자신이 연보할 것을 미리 집에서 따로 마련해 두었다가 주일 첫 날의 모임에 가지고 왔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고린도에 도착한 후에야 많은 금액의 연보가 모아지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은 연보가 모두 준비되어 있기를 원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의 성도들이 돈과 관계된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헌금에 있어서도 그렇게 체계적이라면 주님을 위한 사역이 그처럼 자주 어려움을 겪지는 않을 것입니다.

3. 셋째, 연보는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일입니다.
바울은 교회의 모든 성도는 부자이건 가난한 자이건 똑같이 구제에 참여하길 원했습니다. 수입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가난한 자들과 함께 물질을 나누고 그들을 도와줄 의무가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자기가 받은 축복을 통용하길 원했습니다.

4. 넷째, 연보는 비례적이어야 합니다.
“이(利)를 얻은 대로”란 바울의 말은 많이 가진 사람은 많이 구제해야 한다는 의미를 시사합니다. 유대인 신자들은 십일조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헌금의 어떤 특별한 비율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십일조는 청지기 직분을 이행하는 훌륭한 출발점이기도 하지만, 성도들은 그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허락하시면 그만큼 우리도 구제를 더할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문제는, 수입이 많아질수록 점점 더 많은 재정적 의무에 얽메여 주님께 더 많이 바칠 만한 돈이 없게 되는 신자들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적당한 수준을 찾아 거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좀더 좋고 훌륭한 것을 추구하고, 따라서 그들의 수입은 건설적인 일에 투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그냥 낭비되었습니다.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에 “지출이 수입보다 많을 때 그 수준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곧 몰락을 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8-9장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즉, 성도의 구제는 일종의 은혜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넘치게 부여하신 은혜를 내놓는 것이지 억지로 권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은 인색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까지 미친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고 또 감사한다면 다른 사람과 함께 그 은혜를 나눔으로써 그 감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5. 다섯째, 연보는 정직하게 바쳐져야 합니다.
구제금 모금에 참여한 여러 교회들은 바울이 모은 것을 무사히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는 일을 돕도록 사절단을 파송했습니다(바울을 보조했던 “재정 위원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고후 8:16-24절을 참조). 사역자들이 자신에게 위탁된 재정을 잘못 관리함으로서 세상에 대한 증거 능력을 상실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역자들은 재정적인 일에 있어서는 철저히 사무적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모든 일에 철저히 주의해서, 대적자들로 하여금 바울이 돈을 훔쳤다고 고소할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고후8:20-21).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교회가 구제에 동참하도록 권장하면서 그 구제금을 관리할 믿을 만한 대표들을 선발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바울은 또한 개인적으로 연보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16장에서 처럼 바울은 이 장에서도 자신을 개인적으로 도와 준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합니다. 여기 거명된 사람들은 분명히 바울을 재정적으로 도와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 그리스도인의 연보는 교회 중심적이여야 합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교회 재정 위원회를 통해 지정된 헌금을 하라고 교인들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부활에 대해 논한 직후에 연보를 언급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원래의 성경 사본(寫本)에는 지금처럼 장과 절이 나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당시 독자들은 바울의 승리의 찬양에 뒤이어 곧바로 돈에 관한 논의를 대했던 것입니다. 교리와 의무는 이렇게 늘 병행합니다. 예배와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주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구제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구제하게 하고 섬기게 하는 것은 바로 주님의 부활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말3: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술수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군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자들에게 하는 경고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게습니까?
(말3: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하나님은 그를 심판하십니다. 기필코 그들을 멸시하십니다. 그러므로 십일조와 헌물을 도적질한 이 경고의 말씀은 헌금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지적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적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그럴때 하나님은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으시는 것입니다. 이제 헌금이 왜 드려지며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를 확인했습니다. 우리가 온전한 헌금을 하는 것은 제사상을 차려놓고 귀신을 달래려고 하는 무당에게 주는 제물이나 복점을 잘 쳐달라고 바치는 복채가 아니라 내가 온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고 있다는 증표로 헌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헌금은 제직회가 구성되어 교회의 유익을 위해 관리되고 집행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완수해 나가는 일에 쓰여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의 모든 지출 역시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쓰여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는데 있어서 서로 동참하고 합력하는 차원에서 규례에 정한 바의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능력이 닿는대로 힘써 헌금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해야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의 소득도 온존히 하나님께로 왔으므로 십의 일조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십의 이조, 십의 구조라도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사업을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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