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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경건을 연습하자 (딤전 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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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흔히 말세라고 합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마지막 날에 대하여 말씀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향해 나아가고 있는 역사의 끝을 의미합니다. 그때에는 여러 가지 현상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데 반항과 불법과 자기 쾌락을 즐기는 것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그 시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계문명은 고도로 발전해서 육신 적으로는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편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마음은 더 불안하고 인간소외현상을 자아내고 있으며 위대한 성취도 많으나 헤어나올 수 없는 좌절감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현대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에게서 더 합니다. 현대 교육 철학에서는 '진리는 그 자신이 개인적으로 발전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학생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이 그와 같은 진리에 대한 경험을 가지도록 안내하는 것 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흔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합니다. '너희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는 말씀도 거부해 버립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이런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해서 모든 젊은이들을 비관적인 사회로 빠져 들어가게 하고 알았습니다. 고등학교만 다녀도 부모와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것을 공연한 시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에 다니는 학생은 교수에게 지식을 사는 것으로 족하지 그 이상의 어떤 지도를 요구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요사이 젊은이들은 어른의 간섭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대학의 운영권에 참여하기를 바랍니다. 학교에서 엄격한 규칙을 요구하면 반항합니다. 시험 치르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고된 훈련을 싫어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현대교육의 맹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현대교육에서는 지식을 전달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데 대해서는 거의 손을 대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것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사람은 단순히 떡으로, 새 집으로, 새 자동차로, 새 옷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명은 실상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삼위일체입니다. 사람은 정신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교육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몸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음식이나 옷 그리고 집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영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신앙이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 맡길 수 있는 분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바로 사는 길을 알고 싶습니까?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흔히 다른 길로 가기를 원합니다. 사람이 바로 사는 길은 여러 길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생명의 길은 그 길이 좁고 험하다'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좋아하지 아니 합니다. 그렇다고 적당한 길, 아량 있게 넓은 길로 생명의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최첨단 과학의 길도 넓은 길이 아닙니다.

가령 달에 우주선을 보내는 mission control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량 있는 넓은 마음으로 '달에 가는 길이 여럿이 있으니까 그 가운데 하나를 택해서 적당히 가면 됩니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길이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나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으셨습니까? 어떤 철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이가 그 삶의 의미를 묻는다면 그 사람은 거의 삶의 방법을 알아낼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알베르트까뮤는 '사람이 의미 없이는 살 수 없고'고 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비인간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그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비인간화되어 가는 이 세대는 경건이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합니다. 돈을 사랑합니다. 과장합니다. 자만합니다. 하나님을 모독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경건하지 않습니다. 무정합니다. 원한을 풀지 않습니다. 서로가 비방합니다. 절제할 줄을 모릅니다. 난폭합니다. 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배신합니다. 앞뒤를 가리지 않습니다. 교만합니다.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부인합니다.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아니 우리에게 '너는 이 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명령했습니 다. 오늘 주신 말씀에는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했습니다.
경건이 무엇입니까? 요한 칼빈은 '참된 경건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는 참되고 순결한 열심과 주로서 존경하며 죽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법을 범하기를 두려워하는 생활이라'고 했습니다. 개혁신학에서 경건은 도덕주의로부터 엄격히 분리되었습니다.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가치 없는 존재인 것을 인정하고 그의 자비하심에 온전히 의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매일 매일의 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는 것이 경건한 생활인 것입니다.

그런데 경건의 생활이 오늘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압력, 세속적인 압력, 성적인 압력이 강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연습이란 말은 연마하여 습득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의 신앙생활을 가리켜서 풀무에 연단 하는 것으로 비유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훈련을 통해서 그 믿음이 연마되어서 빛나는 금과 같이, 변하지 않는 금과 같은 믿음을 가질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연습이란 말을 자주 쓰고 있습니다. 디모데에게 편지 할 때만 아니고 다른데 보낸 편지에도 많이 강조하고 있는 말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을 경기장에서 경기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으면서 헬라의 유명한 올림픽 경기 같은 이스마니안 경기를 위해서 선수들이 연습하는 광경을 열심히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헬라 계통의 유대인인 디모데에게 편지 할 때 그에게 실감 있는 낱말인 연습이란 말을 가지고 신앙 생활 하는데 강조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이스마니안 경기에 출전하기 위하여 젊은 선수들이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지 모릅니다. 며칠 후에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열리는 올림픽 경기에 우리 선수들이 참여해서 종합 10위권을 목포로 얼마나 피나는 연습을 했는지 모릅니다. 연습하지 아니하고 경기에 참여 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말하자면 믿음의 경주입니다. 이 경주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연습해야 합니다. 경건을 연습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디모데에게만 필요한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경건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태도입니다. 이 말은 흔히 헬라 종교에서 사용될 말인데 이것은 가장 높은 이에 대한 경의, 존경, 예배 또는 순종을 의미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건을 연습하라'는 말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존경, 예배를 통해서 우리 인간의 기본 태도를 바로 가시기를 연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초대교회에서도 이 경전이란 말을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완전하고 아름다운 태도로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온전케 하기 위하여 경건을 연습하는 것, 하나님께 대하여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예배와 순종이 우리 생활에 습관이 되고 전통으로 젖어 버릴 만큼 수없이 되풀이하는 연습이 얼마나 풍요한가 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무슨 경기든지 승리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협력과 연습이 요구됩니다. 아무리 좋은 소질을 타고났다고 하더라도 꾸준한 연습이 없이는 경기에 승리 할 수가 없습니다. 경기뿐만 아닙니다. 노래하는 사람이 노래하는 것도 악보만 가지고 나와 노래하는 것 아닙니다. 운전이나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도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한 연주를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과 수 없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연습한 만큼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데도 연습이 얼마나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더 말씀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을 보니까 '육신 생활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의 연습은 범사에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가령 우리가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 적당한 운동과 위생을 지켜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도 경건을 연습하므로 건강한 자리에 나아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많은 사람이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습하지마는 경건한 생활을 위해서는 관심이 적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경건을 연습할 수 있습니까? 먼저 경건을 연습하는 살은 조심한 것이 있습니다. 운동선수가 운동 연습을 알 때 기술만 연마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습하는 동안에 금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가령 몸에 해로운 음식물을 먹어서는 안됩니다. 내 몸은 건강하니까 나는 아무 음식을 먹어도 상관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감독이나 코치가 철저히 관리합니다. 건강한 사람이라고 해서 조심하지 않아도 병나지 않는다는 법은 없습니다. 건강한 사람도 병에는 악합니다.

마찬가지로 경건을 연습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도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경건을 연습하는데 방해가 되거나 유혹 받을 만한 일이나 장소가 있으면 아예 필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위 그리스도인도 다 사회 생활하는데 그러면 사회를 떠나 살라는 말인가?' 라고 생각 하실 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은 세상을 등지고 떠나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7장 1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신 대목이 나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원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나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서 살수는 없습니다. 세상을 등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삽니다. 그러나 세상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범죄하기 쉬운 곳은 피하는 것이 좋고, 부득이 필할 수 없을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왜요? 사람은 약하기 때문입니다. 병에 강한 장사가 없는 것처럼 죄에 강한 사람 없습니다. 옛날 나실인 삼손이 하나님이 함께 해서 그렇게 강한 힘을 가졌고 썩은 당나귀뼈로 불레셋 군대를 물리칠 정도 였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여자 간첩 트릴라와 가까이 하다가 그만 범죄 하게 되고 하나님이 떠나시니까 힘이 없어지게 되고 나중에는 맷돌이나 돌리는 비참한 사람이 되고 말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지마는 이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죄악에 침노를 당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사도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의 배경은 베드로의 뼈아픈 체험에서 온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자신의 의지를 믿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자기만은 절대로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다는 결의와 확신 아니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이 심판대에 서게 되시고 자기의 주변이 어려워지는 것을 느끼게 될 때 자신감이 없어지게 되고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위험 앞에 사로잡히게 될 때 그만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고 저주하는 자리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닭우는 소리를 듣는 순간에 정신이 들었고 뛰쳐나가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 세상이 아무리 악하다고 해도 나는 절대로 악에 물들지 않고 경건하게 살 수 있다고 장담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베드로처럼 장담하다가 실패하지 맙시다.

이렇게 경건을 연습하는 것은 소극적으로는 범죄하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할뿐더러 적극적으로 힘쓸 것이 있습니다. 노력과 결과는 언제나 정비례하는 법입니다. 많이 힘쓰면 좋은 결과가 될 것이고 적게 힘쓰면 그만큼 밖의 것을 기대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만일 여기 어떤 사람이 노력은 하지 아니하고 큰 것, 좋은 것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정당한 생각이 아닙니다.

마라톤 선수가 승리의 월계관을 얻기 위해서는 더운 여름이건 추운 겨울이건 늘 연습해야만 합니다. 학생이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하루아침에 마라톤 선수가 되는 것 아닙니다. 하루 이틀에 학문을 다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 교회 반주자들을 가만히 보면 늘 연습을 합니다. 곡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연주하는 것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연습은 아는 것을 하고 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훌륭한 대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 만한 노력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연습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 연습이란 말 가운데는 과격한 규칙 안에서 사는 연단과 수행의 생활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연습이란 귀찮고 또 힘든 것입니다. 이미 한 것을 되풀이하기 때문에 귀찮은 일이요, 계속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힘든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쉬운 것을 원하는 것이 본능입니다. 육신을 입고 있는 우리도 신앙생활 하는 것을 쉽게 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하고 싶은데 구교가 좋을까 신교가 좋을까 하다가 구교에서는 술담배를 금하지 않으니까 이왕에 같은 하나님 믿을 바에는 좀 쉽게 믿는 데로 간다고 해서 구교로 가는 분이 계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술, 담배가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쉽게 믿는 데를 찾는 것을 꼭 바른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도 편하고 쉬운 것을 찾고 싶습니까? 뛰는 사람은 걷고 싶습니다. 걷는 것보다는 서 있는 것이 쉽습니다. 서 있는 것보다는 앉아 있는 것이 더 편합니다. 요사이 우리 예배당 잘 지었다고 소문이 나서 서울은 말할 것도 없고 지방에서 관광 버스를 타고 예배당 구경오시는 분이 많으십니다. 지난 목요일 오후 서울 시내 어느 교회 목사님이 일본 TAKASAGO시의 TAKASAGO 교회의 목사님과 부목사 그리고 평신도를 모시고 와서 그 일본교회가 100년된 교회인데 새로 교회를 지으려하면서 한국에서 제일 잘 지은 교회를 소개해달라고 해서 우리 교회 구경시켰는데 마침 제가 사무실에 있다가 만나 뵙습니다. 인도하신 목사님이 예배당이 너무 짜임새 있게 편안하게 가만히 보면 비싼 재료를 쓰지 않았는데도 고급스러워 보이게 잘 지었다고 칭찬을 하면서 의자가 얼마나 편안하게 만들어 졌는지 교인들이 의자에 앉으면 너무 편안해서 자지 않겠나 오히려 염려스럽다고 해요,

서 있는 것보다 앉아 있는 게 편합니다. 앉아있기 보다 누워 있으면 더 편합니다. 누워 있는 것보다 잠을 자면 더 편합니다. 사실 자는 것보다 아주 자면 더 편합니다. 우리의 이 육신을 쉽고 편한 것만 찾는 것이 본능입니다. 그러나 본능이 하자는 대로 말하면 사람이 아닙니다. 본능은 쉽고 편한 것을 찾지마는 힘들어도 귀찮아도 연습의 생활을 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권면 합니다.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모이기를 힘쓰라' '열심을 돕고 주를 섬기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일하라'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가나안땅을 주시기로 허락하시고 약속하셨지마는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그냥 앉아 있어서 주어지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약속의 땅을 내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내가 땀을 흘려야 하고 고된 훈련을 통해서 전쟁기술을 익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진리를 발견한 여호수아의 삶의 방식이 부지런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약속의 땅을 향하여 나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귀한 교훈이 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주님께 나아오는 심령마다 놀라운 삶을 약속하십니다. 그것은 풍성한 갊입니다. 보람 있는 삶입니다. 의미 있는 삶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 삶을 참으로 내 삶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부지런하고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열과 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재능을 내 놓으라고 하시지 않으십니다. 가지고 있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라고 사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얻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경건을 연습해야 합니까?
경건을 범사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기회에 의사와 행정관리 그리고 사업가가 한 자리에 모여 자기 고장의 사회악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사람들의 불안 권이 단순한 심리적인 현상이라고 말했습니다. 행정관리는 사람들의 불안전이 정치의 부패에서 오는 현상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어 가는 종합적인 불안 권이 그 원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의술이 고도로 발전하고,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국민의 소득이 높은 나라에서는 문제가 없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더욱 심각한 정신적 불안과 도덕적 방종이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경건의 부족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가 이 죄악에 맞서 이겨 나가려고 하면 경건을 연습하지 않고는 실패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경건을 연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자기를 조정할 수 있는 자제력을 가져 우리 믿는 사람 하나 하나가 아름다운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그러면 경건을 연습하므로 누리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경건의 연습을 통하여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올바른 태도를 가지게 될 때 벌써 그 사람은 보이는 이 세상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저 영원한 세상을 항상 바라보며 그 날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영원히 산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면 그 사람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완전히 변하게 됩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고난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유혹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이 사는 보람이 무엇인 것을 알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을 분명히 압니다. 이런 사람은 최후의 날에 심판이 있는 것을 분명히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는 동안 심판을 의식하며 살고 사람 앞에나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려고 힘씁니다. 따라서 영원한 약속을 믿는 사람은 고난의 세계 속에서도 위로와 용기와 확신과 용기를 가지고 두려움 없이 힘차게 헤쳐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믿음을 본받는 경건을 연습해서 주님이 약속하신 그 땅을 다 차지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박조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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