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경건을 연습하라 (딤전 04:7-8)

첨부 1


사도행전 10장은 기독교의 복음이 이방나라로 확산되는 획기적인 사건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그것은 로마군대의 백부장인 고넬료라는 사람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인 베드로와의 만남으로 시작됩니다. 베드로는 유대 사람이었기에 이방인들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배타적이며 그리고 좋지 않은 선입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이 두 사람에게 동시에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서로 인종이 다르고 직업이 다른 이 두 사람을 통하여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려는 계획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로마군대의 백부장인 고넬료를 부르셔서 베드로와 함께 이방인을 위한 사역의 장을 열게 하셨는가요? 그것은 평소에 고넬료가 갖고 있었던 개인적인 신앙적 삶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차별이 없고 누구든지 대상이 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은 아무나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고넬료는 어떤 사람인가요? 그는 경건한 사람입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행10:2) 그리고 그의 경건은 자기만의 독선적인 경건이 아니라 모든 가속들과 함께 하는 경건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닮아 가는 삶을 위해 모범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경건한 삶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고 아울러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소위 신전의식(神前意識) 정신입니다. 고넬료는 이것을 잘했습니다. 그가 군대의 백부장이라는 직함을 가졌지만 경건한 생활만은 철저했다는 증거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어떻게 보실까 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의외로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노골적으로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눈치를 보며 살려고 하고 하나님과 줄다리기를 하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능하면 빨리 그 잡은 줄을 놓는 것이 은혜 받은 사람의 지혜일 것입니다. 그리고 고넬료는 기도하는 사람으로서 가난한 사람에게 아낌없이 돈을 주며 구제했습니다. 이것은 절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내 수중에 있는 돈이나 재산을 내놓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교회가 건강해지고 성도의 삶이 건강해지는 비결 가운데 하나가 구제입니다. 구제하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나눔이란 세상을 행복하게 만드는 원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참된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 것(약1:27)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여기 연습이라고 하는 말은 영어로는 exercise 혹은 training 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얼른 생각하면 연습이란 말은 훈련이란 말보다 그 의미가 약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연습이란 말의 뜻은 연마하여 습득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의 신앙생활을 가리켜서 풀무불에 연단하는 것으로 비유되어 있습니다. 즉 훈련을 통하여 그 믿음이 연마되어서 빛나는 금과 같이 변하지 않는 금과 같은 믿음을 가질 것 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연습 혹은 훈련이란 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여기 디모데에게 편지할 때만 아니고 다른데 보낸 편지 가운데도 많이 강조한 말입니다. 더구나 사도 바울은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것을 경기장에서 경기하는 것과 같다고 종종 비유하기도 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으면서 헬라의 유명한 올림픽 경기 같은 이스마니안 경기를 위해서 선수들이 연습하는 광경을 열심히 보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헬라 계통의 유대인인 디모데에게 편지할 때에 그에게 실감 있는 낱말인 '연습'이란 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활동하는데 강조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인 줄 생각합니다. 그때 이스마니안 경기에 출전하기 위해서 젊은 선수들이 열심히 연습을 하는 것처럼 너는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디모데에게만 필요한 말씀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얼마나 필요하고 적절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는 사도 바울을 통해 주신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 하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선 경건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 말은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태도를 말합니다. 흔히 헬라에서 종교에 대하여 말할 때 사용된 말인데 이것은 가장 높은 이에 대한 경의, 혹은 존경, 또는 예배 그리고 순종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경건을 연습하라는 말은 하나님께 대한 경의와 존경, 예배를 통해서 우리 인간의 기 본 태도를 바로 가지기를 연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초대 교회에서도 이 경건이란 말을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완전하고 아름다운 태도로 생각하였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기 위하여 경건을 연습하는 것, 즉 하나님께 대하여 경외하는 마음, 존경하는 마음, 예배와 순종이 우리 생활에 습관이 되고 전통으로 젖어버린 만큼 수없이 되풀이하는 연습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무슨 경기에서든지 승리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협력과 연습이 요구됩니다. 아무리 좋은 소질을 타고났다고 하더라도 꾸준한 연습이 없이는 경기에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연습이 얼마나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다시 말씀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육신 생활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한 생활의 연습은 범사에 유익하다 고 하였습니다. 가령 우리가 몸이 건강하기 위하여 적당한 운동과 위생법을 지킵니다. 이것은 필수조건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경건한 생활을 위해서도 연습하므로 경건한 자리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대개의 사람이 자신의 생활에 대하여는 많은 관심을 가지지마는 경건한 생활을 위하여서는 관심이 적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경건한 생활의 연습을 할 수 있습니까? 먼저 경건한 생활을 연습하는 사람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운동 선수가 운동 연습할 때 기술만 연마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금하는 것이 있습니다. 가령 몸에 해를 주는 음식물 같은 것은 금합니다. 아무 음식이나 먹지 아니합니다. 내 몸은 건강하니까 상관없다고 하면서 좀 상한 음식 같은 것 먹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병은 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만큼 몸에 지장을 가져올 것입니다. 또 건강한 사람이라고 하여서 조심하지 않아도 병나지 않는다는 법은 없습니다. 건강한 사람도 병에는 약합니다. 마찬가지로 경건한 생활을 연습하고 우리 크리스천에게도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즉 경건한 생활을 하는데 방해가 되거나 혹 유혹 받을만한 일, 그런 장소 있으면 아예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 가운데 혹 어떤 분은 우리 크리스천도 다 사회생활 하는데 어떻게 그러면 사회를 떠나 살라는 말인가? 라고 오해하실 분이 계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세요. 이 말은 세상을 떠나거나 등지고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일찍이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신 적이 계십니다. 요한복음 17장 15절에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원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세상을 등지는 것이 크리스천의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범죄하기 쉬운 곳은 피함이 좋고 부득이 피할 수 없을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약하기 때문입니다. 병에 강한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죄에 강한 사람은 없습니다. 옛날 그렇게 힘세기로 유명하던 삼손이 이방여인 가까이 하다가 그만 범죄하고 힘이 다 빠지고 나중에는 맷돌이나 돌리는 비참한 사람이 되고 말지 않았습니까? 옛날 헬라에 어떤 노 철학자가 딸 하나를 기르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딸이 장성해서 학교도 다 졸업하고 어떤 직장에 취직을 하고 직장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침마다 아버님께 인사를 드리고 나갈 때면 아버지는 딸을 불러 꼭 당부합니다. 얘야, 너 조심해라. 세상이 너무 악해서 하면 이 딸은 예, 아버님 명심하겠습니다 하고 직장에 나갑니다. 매일 직장에 나갈 때마다 이런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열흘, 한달 아침마다 아버지는 직장에 나가는 딸에게 얘야 조심해라 세상이 너무 악해서 하십 니다. 딸이 아버님의 당부를 처음 얼마 동안은 감사하게 들으면서 하루 동안을 지내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매일 바쁜 시간에도 불러서는 얘야 조심해라 세상이 너무 악해서 하십니다. 그래서 이 딸이 귀찮게 생각이 되었습니다. 하루 아침은 아버지더러 아버지! 저도 지성인이에요. 저도 이젠 이만큼 자랐어요. 그만한 것은 제가 잘 알아서 해요. 염려 마세요 하며 쏴 부쳤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귀찮아하는 딸에게 그래, 내가 잘못되었나 보다. 그런데 너 좀 바쁘겠지만 저 광에 가서 숯 몇 개만 손으로 가져오너라. 그래서 이 딸은 아버지의 명령이시니까 숯 섬에서 숯을 몇 개 집어 가지고 아버지 앞에 갖다 놓았습니다. 고맙다, 그런데 네 손을 좀 펴 봐라. 그 흰 손에 무엇이 그렇게 묻었지? 아버님도... 지금 방금 숯을 만졌으니까 그렇지요? 얘, 그것 봐라. 숯을 만지면 손에 숯가루가 묻어. 악한 세상에 나가 살 때 너도 모르게 더러운 것이 묻어 하면서 딸에게 교훈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지마는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죄악의 침노를 당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 고 하였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 세상이 아무리 악하다 해도 나는 악에 물들지 않고 경건한 생활을 할 수 있다 고 장담하시는 분계십니까? 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할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장담하다가 실패하지 맙시다. 베드로도 그런 경험을 되새겨서 그런 말씀했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경건한 생활을 연습한다는 것은 소극적으로 범죄하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할 뿐더러 적극적으로 힘쓸 것이 있습니다. 노력과 결과는 언제나 정비례하는 법입니다. 많이 힘쓰면 좋은 결과가 될 것이고 적게 힘쓰면 그만큼 밖의 것을 기대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만일에 여기 어떤 사람이 노력은 하지 아니하고 큰 것, 좋은 것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안 할 말로 불한당입니다. 땀흘리지 아니하고 얻겠다는 것입니다. 마라톤 선수가 상을 타기 위해서 여름이건 추운 겨울이건 늘 연습합니다. 학생이 좋은 학문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복습하고 예습합니다. 하루아침에 마라톤 선수가 되는 것 아닙니다. 하루 이 틀에 학문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피아노를 치는 것도 오랜 시일의 피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떤 훌륭한 무엇을 얻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생활에도 꼭 연습이 필요합니다.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일을 믿음으로 행하는 것, 기도를 힘쓰는 것, 정한 시간마다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드리는 것, 하나님의 말씀 순종하며 살아가는 일, 교회에서 책임 맡은 것을 순종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감당하는 일. 이런 연습하는 생활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연습이란 말 가운데는 과격한 규칙 안에서 사는 연단과 수행의 생활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연습이란 귀찮고 또 힘든 것입니다. 한 것을 되풀이하기 때문에 귀찮은 일이요, 계속해야 하기 때문에 힘이 든 것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애들은 공부하다가 너무 힘들고 마음대로 나가 놀지도 못하고 그러니까 에이, 공부하는 법은 누가 시작해서 사람을 이렇게 고생시키는가? 하더랍니다. 경건한 생활의 연습도 그렇습니다. 좀 편하게, 쉽게 믿고 싶은 것이 육신의 소유입니다. 뛰는 사람은 걷고 싶고, 걷는 사람은 서고 쉽고, 선 사람은 앉고 싶고, 앉은 사람은 눕고 싶고, 누운 사람은 자고 싶고 .

그러므로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모이기를 힘쓰라.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그러면 왜 경건한 생활을 연습하라고 합니까?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리에 의사와 행정관리와 실업가가 한 자리에 모여서 자기 고장의 사회악에 대하여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이런 불안전한 상태에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하여 세 사람은 제각기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의사는 사람들의 불안전은 단순히 심리적인 현상이라고 하고 행정관리는 아무래도 정치의 부패로 말미암아 오는 혼란 때문이라고 하고 실업가는 모든 것이 종합적 불안전이 그 원인이라고 했습니다. 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의술이 고도로 발달되고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국민소득이 가장 높은 나라에서 더욱 심각한 불안정과 도덕적 방종이 심하다면 그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무엇으로 대답할까요? 인간의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는 인간 본연의 자세 즉 경건한 생활의 결핍이 이와 같은 모든 불안을 빚어내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이와 같은 불안과 여기에 따른 죄악에 세련된 세상에 대항할 만한 경건한 생활의 연습이 부족합니다. 오늘의 교회가 이 죄악에 맞서 이기려고 할 것이면 경건한 생활의 여간한 연습을 하지 아니하고는 실패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경건을 연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를 경외하면 여기서 자기를 조정할 수 있는 자제력이 생기게 되고, 믿는 사람 하나 하나가 이와 같은 경건한 생활의 연습을 통하여 바른 신앙의 훈련이 이루어져 교회는 항상 그 아름다운 향기를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경건에 이르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늘 상고해야 합니다.(딤후 3:14-17)
안토니오는 자기의 가산을 다 나눠 가난한 사람을 주고 굴속에 들어가 은둔생활로 고생하였습니다. 하루는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가 '안토니오야, 네가 아무리 경건하게 살고자 하지만 알렉산드리아에서 헌 신을 고치는 노인만 못하다' 하는 말이 들리었습니다. 그래서 안토니오는 곧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신고치는 노인을 방문했습니다. 노인은 성자가 오므로 반가이 환영해드렸습니다. 안토니오는 노인에게 묻기를 '노인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십니까?' 하였습니다. 노인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생활이 가난하므로 매일 신고치는 것으로 생활비를 삼고 저녁에는 가정예배를 보고 아이들에게 하나님 공경하는 법을 배워 주는 것으로 과정을 삼습니다.' 하였습니다.

둘째, 경건의 훈련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해야 합니다.(딤전6:3)
해리 에머슨 포스딕은 크리스천 설교자는 아니었습니만, 우리 그리스도인이 한 번 쯤, 귀 기울여야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채찍질을 하지 않고 말을 원하는 곳으로 끌고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압력을 가하지 않고 수증기나 기체를 원하는 방향으로 몰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동력기를 통과하지 않고 물을 빛이나 힘 에너지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도 어떤 한 가지 일에 집중해서 헌신하고 훈련되지 않고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해리 에머슨 포스딕의 말에 공감하십니까?

셋째, 중보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딤전2:1,2)
넷째, 세상적인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딤전6:7-11)
다섯째,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려야 합니다.(딤후2:16)
여섯째,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고 있어야 합니다.(딛2:12,13)
일곱째,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딤전1:9)
교회로 향하는 이른 아침이면 길에서 자주 목격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새벽을 달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뚜렷한 목표가 있지 않고서야 새벽을 달릴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며 영적인 자기관리의 목표를 세우고 살아가라는 선배로서의 분부를 합니다. 그렇다면 매일의 삶 가운데 우리가 훈련해야 할 영적인 자기관리 영역은 어떤 부분일까요?

첫째는 마음관리 그 중에 특히 감정관리입니다. 우리가 매일 수염을 깎아야 하듯 우리 마음도 매일 다듬지 않으면 안됩니다. 한번 소제했다고 언제까지나 방안이 깨끗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도 한번 반성하고 좋은 뜻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이 늘 우리 맘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제 먹은 뜻을 오늘 새롭게 하지 않으면 그것은 곧 우리를 떠나고 맙니다. 마음의 품은 것이 입으로나 표정으로나 어떠한 모양으로도 나타나는 법입니다. 특별히 가족들에 대한 분노의 감정관리를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람이 가장 편하게 감정을 노출시키는 곳이 가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평생의 동반자나 자녀들에게 아픔을 남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화내는 것은 연습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화를 참는 것은 연습이 필요합니다. 화가 날 때, 기도하는 연습을 통해 내 감정의 주인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경건의 훈련을 해야 합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根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 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16:32)

둘째는 시간관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숙함에 중요한 척도는 시간관리입니다. 예수님은 분주한 시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홀로 있는 시간을 습관처럼 지키셨습니다. 계획되지 않은 시간은 언제나 급한 곳에 사용됩니다. 그러나 계획된 시간은 우선 순위에 따라서 중요한 일에 사용되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간을 구속(속박과 묶음)하기를 원치 않으시며, 오히려 무익한 것에서 유익한 것으로 구속(변화와 구원)시켜주기를 원합니다.

셋째는 재정관리입니다. 우리는 구체적인 것보다 추상적으로 믿음을 표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물질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다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크리스천의 물질관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허락하신 재물을 청지기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소유보다는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초점을 두는 연습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물질을 섬기기보다 물질을 관리하는 청지기의 자세를 원하십니다.
끝으로 경건한 생활을 연습하므로 누리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선택됩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시4:3)

둘째,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9:31)

셋째, 영혼이 보존을 받습니다.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시86:2)

넷째, 성령의 인도를 받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눅2:25,26)

다섯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행22:12)

여섯째, 환난 중에도 구원을 얻습니다.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시32:6)

일곱째, 본문 8절에 보면 범사에 유익을 얻고,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즉 우리가 이 신앙의 훈련을 통하여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올바른 태도를 가지게 될 때 벌써 그 사람은 보이는 이 세상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저 영원한 세상을 항상 바라보며 그 날에 부끄럽지 아니하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영원히 산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될 때에는 그 사람의 모든 결정하는 것과 한 가지 한 가지의 삶이 전적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지게 됩니다. 고난에 처했을 때도, 시험과 유혹을 당해도 그 태도가 다를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인간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 것을 알고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될 것을 분명히 압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최후의 날에 심판이 있는 것을 분명히 아는 사람이요, 그렇기에 모든 것을 부끄럼 없이 단정히 행할 것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약속을 믿는 사람은 고난의 세계 속에서도 위안과 용기와 확신에서 살 수 있으며 온갖 인생의 거친 파도를 확신을 가지고 두려움 없이 척척 헤치며 인생을 빛나게 살아서 주께서 약속하신 생명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마디의 기도로 폭풍 같은 분노를 다스리고, 적은 시간을 떼어 기도함으로써 많은 시간을 유익하게 만드는 풍성한 삶의 법칙, 바로 이것이 경건에 이르는 매일의 연습입니다. 오늘도 경건으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한태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