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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확신합니다. (딤후 0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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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억하는 대로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쓴 여러 편지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쓴 것 으로 봅니다. 그의 많은 편지가 어느 것인들 중요하게 생각하지 아니하리오마는 그의 이 마지막 편지야말로 깊은 의미를 가진 편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언제 이 로마 감옥에서 한 방울의 이 슬처럼 희생의 제물이 될는지 알 수 없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 그는 과거에 베푸 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더구나 그의 믿음의 아들이요, 신앙의 동역자인 디모데를 생각할 때 인간적으로 말해서 여러 가지 약점이 있었습니다. 가령, 그는 지도자가 되 기엔 너무 어렸었습니다.

디모데전서 4:12절에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 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육신적으로도 퍽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23절'이 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마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하였습니 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술을 좀 하시는 분들은 이 말씀을 방패로 삼습니다. '아니, 바울도 디모 데에게 물만 마시지 말고 포도주를 마시라고 했는데 술을 조금씩 마시는 건 괜찮아' 이렇게 말 합니다. 하긴 여러분에게도 몸에 심한 병이 있어서 술을 마셔야 병 고치시는 데 도움이 되신다 면 마셔도 상관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디모데의 성품이 퍽 수줍어서 지도자가 되는데 약점 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인간적인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음 전파의 귀중한 사명을 맡겨 주신 데는 크신 뜻이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솔 직하면서도 강력하게 그에게 말합니다.

1. '나는 부끄럽지 않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7절이하를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제가 우리 주 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된 자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였습니다.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비록 네가 육신적으로 몸이 약 하고 성경적으로 수잡다고 해도, 비록 연령적으로 어리다고 해도 너는 복음을 부끄러워 말라. 주를 위하여 갇힌 나를 부끄러워 말라. 나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15-16절에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 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썼을까요? 복음과 십자가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십자가 를 말하면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연상하게 되고 그의 고난과 부활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편지를 쓸 때만 하더라도 십자가는 부끄러움과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오늘 십자가는 예배 당마다 제일 높은 곳에 달려 있고 예배실 중심에 달아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리고 거기서 죽으시고 뿐만 아니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시므로 십자가의 의미를 바꿔놓았 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복음은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십자가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 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에겐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 니다. 나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은 복음밖에 없습니다. 분명히 들으세요. 이 구원의 복음을 믿 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노만 빈센트 피일 박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질입니다.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믿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에게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젊은 사람이며, 믿음이 없는 사람은 스물 한 살난 청년이라도 늙은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복음을 믿는 사람은 능력 있게 삽니다. 믿음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서 우리도 능력의 사람 이 됩시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못할 것이 없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능력의 복음을 소유하고 있는 사 람은 부끄럽지 아니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가운데서 예수 믿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확신과 긍지, 나가서 자랑스러운 마음을 의미합 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의 심각한 병들을 고치는 특 효약입니다. 옛 사람을 변하여 새롭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복음을 부끄러워합니 까? 아직도 확신이 없고 확신이 없으니까 긍지가 없고 그러니까 자연히 자랑스러운 마음이 없어 집니다. 여러분의 아내나 여러분의 남편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기가 부끄럽습니까? 이거 대단 히 잘못된 것입니다. 큰 문제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 만이 행복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자랑했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8절에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된 나를 부끄러워 말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8장 38절에는 주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맘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 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하셨습니다. 일에 대하여 확신 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에게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2. 왜 부끄럽지 아니합니까?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 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구별할 것이 없이 누구든지 믿는 사람에게 능력이 된다 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복음은 구원의 복음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부터 해 방시킵니다. 헤어 나오기 어려운 습관에서부터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죄의 값이 사망에서부터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복음의 능력은 더렵혀진 우리 인간을 새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삶의 의미를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기쁨의 근거를 바꿔놓습니다. 우리의 가정을 변화시킵니다. 우리 인간의 실존을 변화시킵니다. 우리 인간의 실존을 변화시킵니다. 이 복음은 은혜의 선물입 니다.

본문 9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 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 심이라' 하였습니다. 이 은혜의 복음을 믿는 사람은 어떤 처지에서도 강하고 담대합니다. 왜냐 하면 사람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죽음인데 이 복음을 믿는 사람은 죽음의 공포에서부터 해방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 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이 시간 우리 하나 하나가 분명히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 내가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의 말씀과 그의 행적,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삶의 새로운 길을 보여주시고 기적 을 행하시고 인간을 사랑하셨던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가 십자가에서 돌아 가셨다는 사실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가 다시 사셨다는 사실을 정말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예, 나는 우리 주님께서 무덤에서 다시 사셨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실 수 있 습니까? 혹시 아직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시지는 않습니까? 이것은 배워서 들어서가 아니라 만 나고 영접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세요.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가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 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하였습니다. 그 리스도가 살아나셨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증거를 연구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현존하심을 경험함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의 죽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사신다는 말씀을 상기하며 가능한 모든 조치가 취해졌었 습니다. 그의 시신은 돌무덤에 안치되었고 큰돌로 크게 봉해졌습니다. 입구를 막은 돌이 너무 커서 세 여인의 힘을 모아도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힘센 병사들을 골라 무덤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진이 일어나고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왔습니다. 병사들은 너무 두려워서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깊은 잠에 들어 있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중한 임무 를 부여받았던 로마 병사가 잠에 빠졌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오히려 돌이 굴러가는 소리에 잠을 깼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사실 예수님을 따랐던 이들은 그의 부활을 기대하지 않 았습니다. 한 사람도 기대를 걸지 않았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부활이 가능하리라고 인정만 했 어도 그렇게 방에서 문을 잠그고 두려워 떨고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대신에 혹시나 해서 무 덤 주위를 배회하였을 것입니다. 사실, 그들에게 부활을 확신시키는데 40일이 걸렸습니다. 예수 님께서 40일 동안에 그들 앞에 일곱 번이나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이 지켜보는 앞에 서 승천하셨습니다.그리스도의 부활을 증명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마음이 변화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무덤에 머물러 계실 때 사람들은 실망 에 잠기며 놀라고 두려워하며 슬픔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7일 후 그들은 아무 두려움 없이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그들의 마 음은 기쁨과 용기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으로 충만했습 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는 충분합니다. 그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증거를 연구함으로 써 그의 살아 계심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 은 그리스도의 몸을 한번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단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만 들 었습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 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들에게 보이셨느니라. ' 그러나 바울은 오랫동안 이 간증 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논쟁의 대상이 되고 그를 혼란시켰습니 다. 그는 그리스도를 따랐던 사람들이 미쳤다고 생각하며 그가 할 수 있는 데까지 그들의 활동 을 제지하려고 행동을 개시했는데 그날 스데반이 물매를 맞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스데반 의 죽음은 그를 괴롭혔습니다. 왜요? 스데반은 바울이 갖지 못했던 무엇인가를 소요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이 그에게 절대적인 확신을 주지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국 '맨 나중에 만 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8)고 고백하였습니다. 바울이 다메 섹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그의 주위를 밝혔습니다. 그 순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네가 할 일을 어찌하여 하니 않느냐' 하는 소리가 울렸습니다. 그때 바울은 고꾸라져, '주여, 내가 무엇을 하오리까? ' 했습니다.그의 삶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자리에서 돌아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12절에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를 인 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 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부활하신 주님을 영적인 체험을 통하여 보게된 바울에게 확신이 생겼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외치며 여기 저기로 다녔습니다. 그것 때문에 핍박을 당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담대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 다.

베드로 같은 사람은 '내가 감히 십자가에 바로 못 박힐 수 있습니까? 나는 거꾸로 못박아 주세요. ' 하면서 순교했는데 십자가에 죽기 위하여 이런 이야기를 꾸며 낼 수 있습니까? 바울 처럼 목이 잘리고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죽기 위하여 그런 이야기를 꾸몄겠습니까? 어제 정오에 우리 한국교회의 순교자로 기초가 된 주기철 목사님의 35주기 추모예배를 주 집사님 댁에서 유 가족과 더불어 가졌습니다. 한국 교회가 오늘의 축복을 받은 것은 우연한 일 아닙니다. 위대한 종들의 순교의 피가 거름이 된 것입니다. 어떻게 그분들이 순교할 수 있었습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님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에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우리는 결코 이 사실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단지 사실 그대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주님을 바라봅니다.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 이 사실인 것을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령한 눈으로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님을 확실히 볼 수 있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하시고 지금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을 만나십시다. 영접하십시다. 그리고 확신 있게 전하십시다. /박조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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