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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세가 되면 (딤후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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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말세에 나타날 징조에 대하여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마지막 때에 나타날 징조에 대해 항상 대비하는 성도가 되기 위해 말씀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1. 교회적인 징조(딤전4:1)
첫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대적합니다.(딤전4:1-2, 딛1:16, 갈1:7-8, 딤후2:15-16)
둘째, 이단들이 득세합니다.((마7:15, 24:24), 벧후2:1, 딛3:10-11)
셋째, 하나님 사랑하는 것 보다 쾌락을 더 사랑합니다.(딤후3:4, 롬1:21-23, 약4:8, 히12:1-2)

2. 사회적인 징조(딤후3;3)
첫째, 돈을 사랑하며 무정합니다.(딤후3:2-3, 딤전6:9-10, 히13:5)
둘째, 선을 행치 않으며 불의를 일삼습니다.(딤후3:3, 약3:13-16, 4:17, 엡4:29-30)
셋째, 서로가 모함하며 사랑이 식어집니다.(딤후3:3, 마24:10-12, 눅6:27-28))

3. 가정적인 징조(딤후3:2)
첫째, 자식이 부모를 거역합니다.(딤후3:2, 롬1:29-30, 마10:21, 엡6:1-3)
둘째, 부모가 자식을 학대합니다.(눅12:53, 마10:21, 엡6:4, 골3:21)
셋째, 주안에서 가족 돌아보기를 싫어합니다.(롬1:28-30, 딤전5:8, 갈6:10)

사도 바울은 말세에 나타날 모든 징조 교회적, 사회적, 가정적, 이 모든 것을 분별하여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어떠한 징조에도 대처할 수 있는 실력의 소유자 되기를 힘쓰라 하였습니다. (마24:3-9)

앨빈 토플러란 미래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제3의 물결』『권력이동』『미래의 충격』등의 책을 통해서 잘 알려진 미래학자입니다. 그런가하면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라는 미래학자도 있습니다. 올해 93세인데 그도 미래학에 관련한 많은 책을 쓰신 분입니다.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폴 케네디』『강대국의 흥망』『21세기 준비』등 40여권의 좋은 책을 썼습니다.

2년 전 어느 때인가 기자들이 그를 만나 이런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그동안 미래에 대하여 참 많은 책을 쓰셨는데 그 많은 책 중에 어느 책이 가장 대표할만한 책입니까?' 그때 드러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것은... 내년도에 출판될 책일세...' 연세 90이 넘으신 분이 이렇게 내년에 나올 책이 가장 좋은 책이라고.. 자신있게 말하고 그렇게 해서 출판된 책이 『Next Society』라고 하는... '미래 사회'라는 유명한 책입니다. 한번쯤 읽어 볼만한 책인데 그는 그 책에서 이때까지 자신의 모든 이론을 집대성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미래 사회란 새로운 사회다. 물론 논란의 여지는 있겠으나 미래 사회는 20세기 후반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른 그런 사회가 될 것이다. 미래 사회는 사람들이 상상하며 기대하는 것과도 다른 사회가 될 것이고 미래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요소도 그 선례가 없기 때문에 설명하기도 힘들다. 그런데 몇 선진국에서는 미래 사회의 현상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가 내다본 미래 사회의 모습을 개념적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미래 사회는 대부분이 장수하여 노인 사회가 될 것이다. 미래 사회는 지식 사회, 정보 사회, 컴퓨터 사회, 인터넷 사회가 될 것이다. 미래 사회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세계를 하나로 묶는 글로벌 경제, 즉 신경제 사회가 될 것이다. 이러한 신경제 사회를 이끄는 지도자는 CEO(Chief Executive Officer)가 될 것이다.'

이외에도 많은 미래 학자들이 미래사회에 대하여 좋은 글들을 발표하고 있습니다마는 성경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표준 새번역 성경으로 말씀드립니다. '그대는 이것을 알아두십시오. 말세에 어려운 때가 올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뽐내며,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으며, 감사할 줄 모르며, 불경스러우며, 무정하며, 원한을 풀지 않으며, 비방하며, 절제가 없으며, 난폭하며, 선을 좋아하지 않으며, 배신하며, 무모하며, 자만하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표현하고 있는 '말세'란 미래 사회를 말하는 것으로서 성경은 미래 학자들과는 다르게 미래 사회란 '어려운 때'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미래학자들이나 과학자들은 미래 사회를 복지 사회, 편리한 사회, 정보의 사회 등으로 전망하면서 긍정적으로 보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미래사회는 비록 그 사회가 복지 사회, 편리한 사회, 정보의 사회가 된다고 할찌라도 그러한 사회를 살아갈 사람들은 여전히 거듭나지 못한 죄인들이므로 환경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미래 사회는 더 어려운 사회, 고통의 사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말세에 마귀의 궤계에 휘말려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무려 19가지입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줄여본다면 사랑의 왜곡입니다. 사랑해서는 안 될 것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첫째, 자기를 사랑합니다.
이 말씀에서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이기심이란 자기만을 위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김동인의 단편소설 가운데 “태형”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무더운 여름 비좁은 감옥 안에 40명이나 되는 죄수들이 수감되어있습니다. 비좁고 악취가 가득하여 숨쉬기조차 힘든 열악한 상황 속에 죄수들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 때 한 노인이 태형을 언도 받고 그렇지 않아도 비좁은 이 감방 속으로 들어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판결은 분명 잘못됐습니다. 마땅히 상소해야 할 상황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상소하라 거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소한 노인을 매도하여 태형장으로 내몹니다. 한 사람이라도 없어져서 조금이라도 공간을 넓게 확보하려는 죄수들의 이기심이 들끓었습니다. 주인공인 ‘나’는 이런 이기심에 편승해서 노인이 태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조금 뒤 태형을 맞고 비명을 지르는 노인의 비명소리가 감방 안에 울려 퍼집니다. 비명 소리마저 그치고 노인은 숨을 거둡니다. 감방 안에는 긴 침묵이 흐릅니다. 주인공 ‘나’는 견디기 어려운 양심에 가책에 큰 고통을 받게 됩니다. 차라리 노인처럼 매를 맞는 편이 나을 정도의 큰 고통을 겪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자기만을 위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말세를 살아가는 불신자들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이들은 결국 자기를 위하는 것 같지만 자기를 비롯한 모두에게 큰 고통을 안겨다 줍니다. 물론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본문 1절을 보세요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NIV 영어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말세가 되면 terrible times가 도래한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것은 미래 사회의 사람들이 정작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것은 사랑하며 살아가지 않고 사랑해서 안될 것은 사랑하며 살아가게 되기 때문에 고통의 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실례를 19가지 들고 있는데 그 중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2절에서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 돈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4절에서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 보다 더하는 것 3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3가지 사랑이 왜 그리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2절에서 언급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의 문제점과 그 고통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문제가 없어 보이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자신감이나 긍정적인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말하는 것으로서 지나치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이기주의적 자기 사랑이 문제라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 자신을 정도 이상으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시대가 말세라는 것이며 그렇게 정도 이상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가면 자기에게 좋을 것 같지만 결국에 가서는 자기 자신에게 그 이기적인 자기 사랑이 고통이 되고 만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유형의 사람이 겪게 되는 고통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송한 말씀이지만 가정에서도 따돌림 받으며 친구들에게서도 따돌림 받으며 살게 되기 때문에 그 자체가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만 사랑하고,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결국에 가서는 저절로 그렇게 따돌림 받는 그런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돈을 사랑합니다. 본문 2절말씀에서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돈에 집착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물질주의 배금사상에 젖어 사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얼마 전에 서점엘 갔다가 깜짝 놀랄만한 책을 본 일이 있습니다. “펠릭스는 돈을 사랑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의 내용의 일부를 소개해 보면 이렇습니다. 열두 살 소년 펠릭스는 돈 때문에 부모님이 자주 다투는 것을 보고 스스로 돈을 벌어 부자가 돼 보겠다고 다짐합니다. 용돈을 모두 은행에 저축하면 돈이 빨리 늘어날까 하는 생각에 은행을 찾지만 작은 이자에 실망하고 돌아섭니다. 이후 친구 페터와 함께 잔디 깎기와 빵 배달을 하면서 나름대로 돈을 차곡차곡 모으고, 뒤늦게 합세한 친구 잔나와 하인첼 꼬마들이란 회사를 차리면서 좀더 효과적인 수입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잔디 깎기와 달걀 팔기를 하며 나날이 늘어나는 금액에 흐뭇해할 즈음 악기점 주인 슈미츠 아저씨가 구입한 중고 클라리넷상자에 든 금화를 우연히 발견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갑자기 생긴 목돈을 이용해 주식시장과 선물거래라는 것에 눈길을 돌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일찍부터 돈의 중요성을 가르쳐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 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돈벌이의 요령을 가르쳐서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돈벌이에 인생의 목적을 걸게 하고 돈에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게 해서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말세로구나!”소리가 절로 나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대가 어려서부터 돈버는 법을 배워야 할 정도로 돈을 사랑하는 시대입니다. 돈에 집착하고 돈 그 자체가 우상이 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다 주는 그런 시대입니다.

그런데 유념할 것은 돈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반드시 고통을 받게된다는 사실입니다. 최근 매스콤 보도를 통해 아시는 분도 더러 있으시겠지만 어떤 분이 로또 복권 1등에 당첨된 후 이 사실을 부모 형제 친척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오직 자기 가족만 돈을 펑펑 쓰다가 그만 도둑으로 오해받았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 사건은 그가 현금 수송차량 강탈사건의 범인이 아닌 것으로 마무리는 되었지만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드러난 문제점은 사람이 돈을 사랑하게 되면 이처럼 이성도 감정도 마비되어 부모 형제 친척도 모르게 되는 불쌍한 존재가 된다는 문제점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돈도 있어야 하고 재물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돈이나 재물을 사랑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인간은 나그네이기에 나그네 정신으로 나그네 모습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인간이 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돈이나 재물을 사랑하며 살다보면 어떤 고통이 따르게 되는가 하면 소돔 고모라가 망할 때 재물을 사랑하여 뒤돌아다보다가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와 같이 그런 고통이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셋째, 쾌락을 사랑합니다. 본문 4절에서 말씀하는 '쾌락을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쾌락은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맛보는 그런 쾌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정상적 쾌락의 정도를 벗어나 비정상적인 삶이 주는 쾌락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결혼하여 부부관계를 가지면서 쾌락을 누리는 것은 정상적인 쾌락입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부부관계가 아닌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남녀관계에서의 쾌락은 일시적으로는 자신에게 쾌락을 가져다줄 수는 있을지언정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 고통을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이 쾌락이란 용어의 사전적 정의는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즐거움'을 지칭하는 것으로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든 영역에 쾌락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이 힘들고 어려운 세상,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려면 생의 즐거움도 있어야 하고, 쾌락도 있어야 하나 그것이 합법적이고 정상적이어야 하며 또 그것은 하나님 사랑하는 것 보다 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쾌락 사랑 때문에 주일 성수가 문제가 되고 쾌락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면...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문제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 사랑하는 것 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는 자가 받게되는 고통에는 무엇이 있는 것입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로마서 1:24-2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무슨 말씀인가 하면 그렇게 쾌락을 사랑하고 쾌락적인 삶을 추구하여 하나님의 말씀도 어기고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떠나서라도 쾌락을 누리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 자신의 몸에...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미래 사회, 미래 사회 중의 말세라고 하는 미래 사회가 되면 사람들은 자기만 사랑하게 되고, 돈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되고, 하나님 말씀도 어기면서까지 쾌락을 사랑하며 추구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미리 내다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이 말씀에서 쾌락을 사랑한다는 것은 쾌락에 깊이 빠져드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쾌락주의에 젖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에 적당한 즐거움은 필요합니다. 재창조(re-creation)를 위해서 쾌락은 큰 유익을 줍니다. 그래서 쾌락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요 우리 삶에 청량제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쾌락은 적당히 받아들이면 약이 되지만 도가 지나치면 독이 된다는 특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화투놀이를 재미 삼아 해 봅니다. 재미 삼아 돈을 걸고 합니다. 판돈이 점점 커집니다. 돈을 따기 위해 본격적으로 도박으로 발전합니다. 결국 도박에 발을 들이게 되고 돈 잃고 패가망신하여 큰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쾌락에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쾌락을 사랑한다는 것은 절제를 상실한 상태를 말합니다. 브레이크 파열된 자동차가 언덕을 내려가듯이 절제 없는 쾌락은 위험한 것입니다. 모두에게 정말 큰 고통을 안겨다 줍니다. 요즘 매스컴 보도를 보면 정말 이 시대 사람들이 얼마나 쾌락에 깊이 빠져있고 중독되어 있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이 국치일로 여기는 지난 9월 18일 만주침략 72주년을 하루 앞두고 일본인 관광객 380명이 중국여성들과 광둥성의 한 호텔에서 단체 섹스관광을 즐겼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서울 강남의 한 노래방에서 4상의 부부가 서로 부부를 바꾸어서 성관계를 맺은 스와핑 사건 때문에 시끄러웠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 후에 스와핑을 전문으로 하는 인터넷 사이트의 회원이 6000쌍으로 급증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말세로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이렇게 쾌락지상주의가 하늘을 찌르는 이런 때 경건한 삶을 살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큰짐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런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롬 12:2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세적 현상 가운데서 돌아서려면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이를 좇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따르고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잘못된 사랑 왜곡된 사랑을 버리고 우리가 올바로 찾아 나서야 할 사랑은 무엇일까요? 마 22:37을 보면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주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사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셨습니다. 우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죽도록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우리가 우리 몸을 아끼듯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정성을 다해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세에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합니다. 잘못된 사랑 때문에 자신들이 고통을 겪고 있고,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고통을 안겨다 줍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것들을 사랑하는 것에서 돌이켜서 진정 사랑할 것을 사랑하는 자라로 나아와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리를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말세임을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해서는 안 될 것과 진정 사랑해야 할 것을 분별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이 말세에 고통이 따르는 길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그래도 가야합니다. 여기에 영생이 있고, 여기에 진정한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미래 사회에 나타나게 될 사람들의 잘못된 삶의 자세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절부터 4절을 같이 보시겠습니다.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무슨 말씀입니까? 참으로 희한한 사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는 왜 다가오는 것이며, 무엇 때문에 이런 사회가 다가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 인간의 죄와 욕심 때문입니다. 이 인간의 죄와 욕심이 자신을 망치며 가정을 망치고 사회를 망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죄와 욕심 때문에 결국 이 세상은 심판 받게 되고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그 때에 사람들은 뽐내고 교만해지고 악담하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감사할 줄 모르고 경건하지 않고 무정하고 무자비하고 남을 비방하고 무절제하고 난폭하고 선을 좋아하지 않고 배신하고 앞뒤를 가리지 않고 자만으로 부풀어 있고...'
사실 앞에서 예로 들었던 3가지 잘못된 사랑은 자기를 파괴하는 고통을 수반한다면 이 잘못된 삶의 자세들은 이웃과의 관계를 파괴시키는 고통을 수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뽐내고 교만하고 악담하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감사할 줄 모르고 경건하지 않고 무정하고 무자비하며 남을 비방하고 무절제하고 난폭하고 선을 좋아하지 않고 배신하고 앞뒤를 가리지 않고 자만으로 부풀어 있는데 어찌 인간관계가 좋을 수 있겠으며 어찌 이웃과의 관계가 좋을 수 있겠습니까?

얼마 전 포항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청년 2명이 한 처녀에게 자신들은 외국계 비행기 조종사라고 속이면서 접근했습니다. 그리고는 이 처녀와 교제하며 사랑을 나누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성교제 하는데 들어갈 돈이 궁해지자 엉뚱하게도 자기들이 교제하고 있는 이 여자 집에 복면을 하고 침입합니다. 강도 짓을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잘 알고 지내던 터라 이들이 복면을 하고 침입했지만 이 여자가 쉽게 알아보기에 순간 당황하고는... 이 여자를 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시신을 승용차에 싣고 서울로 가 한강에 버렸다가 체포된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점점 악해지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무자비하며 무절제하고 난폭한 사건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는데 이것이 무슨 현상인가 하면... 말세적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래 사회에 나타날 말세적 현상들이 하나 둘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우리들이 피부로 느끼기 시작하는 것은... 인간 존엄성의 파괴와 가정의 붕괴입니다. 인간이 파괴되기 시작하니까 연쇄적으로 가정도 파괴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살다보니 상대방이 너무 이기주의적이고 자기만 사랑하고 잘 참지도 못하며 무정하고 무절제하고 때로는 난폭하기에 참다 참다 못하여 헤어지는 부부나 깨어지는 가정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니 물론 어른들도 피해를 입지만 더욱 피해를 입는 것은 어린 자녀들입니다.

다음으로는, 미래 사회에 나타나게 될 잘못된 신앙생활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5절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무슨 말씀입니까? 이러한 사회가 도래한다는 것입니다.겉으로 보면 경건한 것 같습니다. 교회도 다니고 직분도 받았고 교회에서 봉사도 합니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속빈 강정이라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껍데기인 경건의 모양은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능력도 없고 능력도 부인하면서 위선적으로 말입니다. 그것은 아마 여러 가지 목적 때문에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회적인 체면이나 개인적으로 추구하는 목적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러한 사회가 미래 사회이며 말세 사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개인에게서 나타나게 되면 그는 말세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 여러 내용들은 이렇게 다시 알기 쉽게 3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미래 사회가 되면 사랑이 변질된다. 미래 사회가 되면 사람들의 삶의 자세도 변질된다. 미래 사회가 되면 사람들의 신앙도 변질된다. 미래 사회의 삶의 환경은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점점 살기 좋은 환경이 되어가겠지만 사람들 그 자신은 점점 황폐화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미리 알고 미래 사회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 1절입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자, 그렇다면.. 미래 사회가 어떻게 전개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게 되었으면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이것이 중요한데..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미래 사회의 현상을 알았고 고통도 알았으며 문제점도 다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변질된 것에서부터 다시 순수함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인데 이것은 인간 존엄과 인간 관계와 신앙 생활의 치유와 회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치유와 회복에 있어서 가장 잘 듣는 특효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본문 조금 뒤에 나오는 16-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변질되고 병든 사람을 온전케 하며 다시 새롭게 된 그로 하여금 선한 일을 온전히 행하게 할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의 결론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5절마지막 부분입니다.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무슨 말씀입니까? 이 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1:1-2)
그들의 꾀도 좇지 말고 그들과 함께 걷지도 말며 그들과 자리에 함께 앉지도 말고 그들에게서 완전히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래 사회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알고 잘 대비하며 살고 종말론적인 삶을 살되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그러한 불쌍한 자로 살지 말고 언제 오실 지 모르는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며 늘 깨어 기도하는 가운데 기름을 준비하며 경건의 모양과 함께 경건의 능력 속에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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