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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화해의 복음 (롬 0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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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의 주제는 ‘화해’입니다. 화해란 서로 반목가운데 있던 상태에서,서로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다시 되돌아오고 맺힌 것이 풀어져 서로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하나님과의 화해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의 근원적인 씨앗은 결국 하나님과 화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해하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삶을 사는 한,우리의 삶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화해하는 삶을 살아야 할것입니다.

본문이 바로 그 ‘화해의 복음’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우리는 지금까지 원래 의롭지 못하던 우리들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는 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랬고 그리고 지금 우리도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았은즉,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5장의 주제입니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는 말씀은 말 그대로 하나님과 화평하자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화평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과 화평한 상태는 또한 어떠하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 화평한 상태에 있습니까? 하나님과 화평한 상태는 어떠한 상태입니까? 본문은 몇가지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①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은 상태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하는 사람은 은혜받은 사람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간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심령에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우리는 풍성한 은혜를 사모하여야 합니다. 교회는 무조건 은혜스러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를 상실하면 그 상태는 하나님과 화평하지 못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②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랍니다.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보다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랄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즐거워 하는 사람이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에게 영광을 드릴때 비로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고귀한 인간이 될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자가 될수도 있고 짐승이 될수도 있습니다. 성자와 짐승의 차이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순종하느냐? 아니면 거역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바로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즉 그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입니다.

③ 환난중에도 즐거워 하는 상태입니다. 환난은 즐거움의 대상이 아니라 슬픔과 두려움 공포와 절망의 대상입니다. 환난을 당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우리가운데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환 난을 만났을 때 즐거워 할수 있는 사람도 결코 쉽지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은 환난중에도 즐거워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은 환난 저 너머에 있는 소망을 바라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죽음 저 건너편에 있는 부활을 바라보는 것과 똑같습니다. 본문의 3절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앎이니라/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이 알고 있는 것,그것은 곧 소망인 것입니다.

5절에는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부끄럽다라는 말은 히브리적인 표현입니다. 유대인들은 남에게 거절을 당할때 부끄럽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상근 목사님은 이 말을 배반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환난중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절치 아니하시고 배반치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소망인 것입니다. 루터는 소망이야말로 환난을 이기는 가장 확실한 보증이라고이 부분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환난이 더이상 공포의 대상이 될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즐거워 하게 될것입니다. 왜냐하면 환난중에 인내를 배우게 되고 인내를 통해 우리는 연단될 것이고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거절치 아니하시는 소망을 가지게 될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할 때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평을 하게 됩니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자고 1절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6절에서 11절까지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평케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하신 사역에 대한 말씀입니다. 즉 그의 십자가의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순전히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에서 죽으셨는데 우리가 어떠할 때 죽으셨는가에 대하여 몇가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본문 6절의 말씀에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죽으신 것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앞에서 나의 연약함을 발견할 때에 비로서 생성하기 시작합니다. 나의 연약함을 깊이 깨달을수록 우리의 믿음도 그만큼 자라게 됩니다. 그이유는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고 깊이 깨닫는 사람이 진정한 회개를 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우리가 연약할 때,연약하기 때문에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분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마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는 것처럼,우리의 주님은 우리가 연약할 때에 바로 연약한 우리들을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주님, 나는 연약합니다. 심히도 연약합니다.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이렇게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고백할 때 우리는 비로서 하나님과 화평하는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사람이 자연사를 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위하여 또는 누군가를 위하여 대신 죽어준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7절의 말씀에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남을 대신하여 죽는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더더구나 죄인을 위하여 죽는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혹 강재구 소령처럼 사랑하는 부하들을 위하여 죽는 사람은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을 위하여 대신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노라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었는데,그것은 곧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을 때 이루어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곳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의지를 아주 극명하게 내어 보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지는 죄인된 인간들과 화해하시겠다는 의지입니다. 죄로 인하여 깨어진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다시 새롭게 세우시겠다는 의지입니다. 아직 죄인되었을 때 죄인된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해할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지이며 또한 그의 사랑입니다. 연약함을 고백한 우리들은 더 나아가 우리가 죄인이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독교는 고백의 종교입니다. 사색이나 명상의 종교가 아니라 고백의 종교인데 우리의 고백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고백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앞에서 우리들은 거울앞에선 사람처럼 자신이 죄인인 것을 밝히 깨닫고 죄인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죄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원수의 개념에 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세번째는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이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연약하였고 죄인되었었고 그리고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에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했던 인간들은 살인을 하고 그리고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어떠한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원수관계에 있는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화해하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 그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당신의 의지를 실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여 구원을 얻게함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화목의 내용이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한다,화해한다는 것은 곧 구원함을 얻는다라는 말과 똑 같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해는 곧 구원을 받는 일입니다. 이제 마지막의 13-21까지의 말씀은 한사람으로 인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고 다시 한사람으로 인하여 구원이 임하게 되는 원리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12절 말씀에는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 습니다. 죄를 들여온 한 사람은 바로 인류의 조상 아담입니다. 아담이라는 말은 인간,인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아담을 가르쳐서 14절 후반부에서는 오실자의 표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실자는 물론 그리스도를 가르키는 말입니다. 아담과 그리스도는 공통성과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통성은 모두가 대표성을 갖는다는데에 있습니다. 아담도 그리스도도 모두 인간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성이 바로 대표성인데 그 차이점은 대표성의 성격은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몇가지의 공통성과 차이점을 찾아보고져 합니다.
첫째는 17절의 왕노릇의 공통성과 차이점입니다. 이들은 모두 왕노릇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사망이 왕노릇을 하고 있고 그리스도는 생명이 왕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18절에서 처럼 전자는 정죄에 이르게 되고 후자는 의롭다하심에 이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세째는 19절의 순종치 아니함과 순종함의 차이점입니다.-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첫사람 아담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순종치 아니함으로 죄를 지었고 그래서 사망이 왕노릇하게 하여 결국에는 정죄받고 영원히 죽을수 밖에 없는 처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아담의 원죄를 그대로 가지고 나오는 우리들 모두도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여 주셔서 그리스도를 이 따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순종하셨습니다. 그는 순종함으로 십자가를 지었고 모든 저주를 한 몸에 받으셨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줌으로써 모든 사람의 생명을 구할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생명안에서 왕노릇 하시는 분이며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고 의롭다는 칭의를 받게 하시는 분이며 영원한 영생으로 인도하시는 분인 것입니다. 21절의 말씀을 보면은 죄가 사망안에서 왕노릇 한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가장 큰 축복은 바로 영생의 축복입니다. 영생이냐 아니면 영벌이냐는 갈림길에 우리는 놓여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과 화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면 결국 영벌에 떨어질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이미 구원의 길을 우리에게 열어놓으셨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를 나의 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원수되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음을 믿고 그렇게 고백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의 보혈의 피로 나의 모든 죄가 씻어졌음을 믿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른다는 확신을 갖는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우리의 믿음의 핵심이요 모든 것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한 삶을 사는 사람은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순종함으로 기쁨을 얻는 사람입니다. 그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같지 않는 영생에 이르게 하는 기쁨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담의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나무에 접붙임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생명이 우리의 왕노릇을 하게 될것입니다. 승리와 생명과 영생이 우리의 것입니다. 죄와 사망에서의 자유함이 우리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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